인엽

파수꾼 (2010): 제가 제 형제를 지키는 자입니까?


2011년 9월 7일 이인엽

 




1. 용서와 거절의 문제


(스포일러 있음)


평이 워낙 좋아서 기대하고 본 영화인데, 역시 실망스럽지 않았다. 세 배우의 연기는 아주 자연스러웠고, 이들의 친구관계나 고등학교 남학생들의 세계에 대한 묘사도 단순하지만 설득력이 있었다.


기태, 희준, 동윤, 세 친구는 학교가 끝나면 기차길 옆에서 야구를 하고 서로의 연애 사업도 도와주는 단짝 친구들이다. 그러나 어느날 부터 세사람의 관계에는 오해와 앙금이 생겨나고, 걷잡을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영화는 기태(이제훈)의 자살 이후 아버지가 친구들을 만나 기태와의 관계를 추적하는 과정을 통해, 과거 세 사람의 이야기를 짚어 나간다.



여자친구 문제나 엄마가 없는 기태의 가정 상황 등으로 생긴 오해들로, 희준(박정민)은 기태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하는데, 기태는 희준을 달래지 못하자 폭력을 행사하고 희준은 점점 더 마음을 닫는다. 좋아하던 희준이 자신을 멀리하는 것에 상심과 분노를 느끼는 기태는, 희준에게 더 가학적으로 행동하고, 희준은 마침내 기태와 관계를 끊고 전학을 가게 된다. 이 과정에서 동윤(서준영)도 기태에게 분노하고 여자친구인 세정의 문제로 두 사람의 관계도 틀어진다. 기태는 자기를 거절하는 친구들에 당황하고, 폭력과 분노로 대응하다가 나중에는 사과하고 사정도 해 보지만, 이제 관계는 선을 넘어가 버렸다.


엄마가 없는 기태에게는 친구들의 인정과 주목받는 것이 삶의 이유였다. 특히 단짝인 동윤과 희준과의 관계, 그리고 반의 주먹짱으로 느끼는 우쭐함 등등. 그런데, 각별한 친구였던 동윤과 희준이 자신을 거절하기 시작하자 어쩔줄을 모른다. 상황이 파국에 이르고, ‘너와 진정한 친구였던 적은 한번도 없고 너는 역겨운 존재’라는 희준과 동윤의 말은, 기태의 주먹보다도 더욱 날카롭고 파괴적이다. 두 친구들로 부터 거절당한 기태의 뒷모습은 처절한 외로움이다. 자신을 지탱해 주던 날개가 부러진 새처럼 그는 아파트 아래로 추락했을 것이다.


 

 


20세기 소년이라는 일본 만화를 흥미있게 본 기억이 난다. (여기도 스포일러 있음) ‘친구’라는 의문의 존재가 이끄는 기괴한 사교집단의 세계지배에 맞서 싸우는 주인공들. 과거, 현재, 미래를 오가며, 온갖 난리를 다 겪는데, 알고보니 그 괴물같은 ‘친구’는, 주인공들의 유년시절 속 왕따와 거절감을 겪은 한 평범한 ‘친구’였다는 설정. 거절감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섭고, 인격을 파괴하는 것인가를 잘 보여주는 이야기다. 




 

2. 폭력과 권력관계


한편, 세친구가 이러한 파국을 맞게 되기까지에는 서로의 관계 뿐 아니라 한가지 더 중요한 변수가 있었다. 그것은 ‘폭력과 권력의 문제’이다. 기태는 두가지의 세계 속에 속해있다. 단짝인 동윤과 희준과 함께 하는 수평적인 친구관계, 그리고 고등학생이 되어 주먹짱이 된 자기를 중심으로하는 반에서의 수직적인 권력관계. 동윤의 회상장면에서 기태는 너(동윤)만 나를 알아주면 되지 주먹짱 같은건 중요하지 않다고 하지만, 기태는 두가지 관계, 그리고 그속에서 경험하는 두 가지 정체성 속에서 방황한다. 그리고 희준과 갈등이 생기자, 수평적 친구관계가 아닌, 수직적 권력관계 속의 폭력을 통해 문제를 풀려고 한다. 바로 이것이 모든 것이 망가진 원인이다. 물론 엄마없이 살아온 기태가 관계에 있서 미숙했다고 할 수 있지만, 동등해야할 친구관계에 폭력과 지배의 원리를 가지고 들어온 이상, 진정한 우정은 더이상 불가능해진다. 희준에게 가학적으로 집착하는 기태는 괴물 그 자체이다.  


개인적으로 중학교 다닐때, 학교에 날라리들의 조직 같은게 있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일진회?). 신기한 것은 거기에 들어가면 애들의 성격 자체가 바뀐다는 사실. 중1때 같은 반에서 나름 재미있게 어울렸던 친구가 있었는데, 2학년때 다른반이 된 사이에, 이 친구가 이 ‘조직’에 들어갔다. 그러더니 다른 반을 돌아다니면서 애들 물건을 훔쳐서 팔거나 돈을 뺏는 것이었다. 어느날은 다른 애들과 우리 반에 와서 물건을 훔치는 것을 보고, 내가 왜 도둑질하냐고 추궁하니, 이때는 아직 양심이 조금은 남아있는지, 눈을 마주치지 못하면서 그런적 없다고만 했다. 3학년이 되서 같은 반이 되었는데 이때는 대놓고 아이들을 협박하고 괴롭혔다. 싸움을 그렇게 잘하지도 않았는데도  조직을 믿고 설치고, 이때는 예전에 좀 친했던 관계도 무시한채 나에게도 대놓고 눈을 부라리고 욕도 하고 그랬다. 예전의 그 친구는 사라지고 다른 사람이 된 것이었다.


폭력과 권력에 기반한 수직적 관계는 동등한 수평적 관계를 대체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오해나 갈등이 생길 경우, 이제 진심으로 미안해 하고 상대방에게 용서를 구할 필요가 없이, 주먹과 협박이면 상대를 굴복시킬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거칠고 남성적인것이 멋있다고 착각하지만, 사실 이는 소통할 줄 모르는 유아기적 남성들이 만들어 가는 ‘동물의 왕국’에 불과하다. 영화 ‘달콤한 인생’에서 볼 수 있듯이 (예전에 쓴 영화평을 참고하시라), 미안하다는 진심어린 말을 할 줄 몰라서, 사람을 생매장하고 팔다리가 부러져야만 하는 한심한 모습이, 마초들이 설치는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그나마 기태는 순수함이 남이 있는 아이였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끝까지 두 친구에게 다가가 보려하고, 결국 그것이 거부당하자 삶의 의미를 잃고 목숨을 포기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기태의 말은 (네가 알아주는 것이 전부라는) 진심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남성들은 너무나 쉽게 폭력과 수직적 관계에 동화되어 버린다. 폭력과 권력, 쾌락은, 진정한 소통과 사랑에 대한 열망을 대체해 버릴 수 있는 것. 특히 군대와 직장생활은 이러한 변화를 개인에게 사회적으로 강제하는 과정이다. 지금은 윗사람에게 밟히더라도, 언젠가 나도 남들 위에 군림하며, 맘에 안드는 아래것들(?)을 맘대로 할 수 있다는 권력관계. 상호적인 소통과 이해, 존중과 선택에 기반한 사랑이 아닌, 나의 만족을 위해 상대방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관계. 오늘의 수많은 ‘기태’들은 아마 우정 따위는 쉽게 내팽개치고, 단순히 권력과 쾌락을 추구하는 짐승같은 존재, 영혼이 없는 고깃덩어리가 되어 가고 있을 것이다. ‘세상은 정글이야’라고 말하면서 ‘짐승’이 되어 가는 스스로를 합리화 하는 것. 그러나 세상이 ‘정글’인 이유는, 바로 너희 같은 ‘짐승’들이 설치기 때문인 것을…


 


 

3. 파수꾼


기태가 폭력을 통해 선을 넘어 버린 것은 사실이지만, 두 세계 속에서 방황할 때 친구들이 그를 한번더 받아주고 제대로 된 길로 이끌어 줬다면 어땠을까? 기태가 ‘어쩌다가 이렇게 되어버렸을까’를 되뇌이는 걸 보면, 그는 정말 상황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몰랐던 것 같다. 


가학적으로 군림하려는 기태에게 충분히 질렸을 수 있지만, 두 친구들의 절교는 기태에게 사형선고와도 같다. 누군가 ‘타자는 지옥’이다라고 했던가? 이는 폭력을 휘두르는 것 보다도 무서운 죄일 수 있다. 기태의 아버지를 다시만난 희준은 의외로 담담하다. 기태는 마음에서 지워버린지 오래고, 기태가 자살하기 전에 이미 전학도 가버렸으니, 이제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는 태도. 담담한 (혹은 담담한 척 하는) 희준과 달리, 동윤은 기태의 죽음에 대한 괴로움을 견디지 못한다. 자신의 절교가 기태에게 어떤 의미였을지를 알기 때문이다.





감독이 의도했는지 모르겠지만 ‘파수꾼’이라는 제목은 왠지 성경의 몇가지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창세기 4:9 주님께서 가인에게 물으셨다. "너의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모릅니다. 제가 제 형제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Am I my brother’s keeper)?"


에스겔 33:7-11 너 사람아,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다. 그러므로 너는 내가 하는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하여라.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하였는데도, 네가 그 악인에게 말하여 그가 악한 길을 버리고 떠나도록 경고하지 않으면, 그 악인은 자신의 죄가 있어서 죽을 것이지만, 그 사람이 죽은 책임은 내가 너에게 묻겠다. 네가 악인에게, 그의 길에서 떠나서 거기에서 돌이키도록 경고하였는데도, 그가 자신의 길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그는 자신의 죄 때문에 죽지만, 너는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 너는 그들에게 전하여라.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내가 내 삶을 두고 맹세한다.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한다. […]


신은 우리가 우리의 형제를 지키는 자, 곧 파수꾼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책임을 다하지 않았을 때, 우리 형제의 피를 우리 손에서 찾겠다는 무시무시한 경고의 말이다. 내가 설령 직접 죽이지 않았더라도, 나는 살인자일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그 사람의 존재를 마음속에서 지워버리고, 죽여버렸기 때문이다. 그가 잘못된 길을 갈 때, 그를 붙잡아주고 지적해 줄 의무를 져버렸기 때문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마음에서 지워버리고 포기할 때, 그것은 누군가에게 사형선고 일 수 있고, 악마에게 그 사람을 내어주는 것일 수 있다.


약간 다른 이야기지만, 미국사회에서 실망하고, 특히 미국의 보수꼴통 기독교인들에게서 실망하는 이유 중 하나는, 사회문제를 근본적으로 분리(절교)를 통해서 풀고자 하기 때문이다. 생명의 신성함을 이유로 낙태 반대에 목숨을 거는 기독인들이, 사형제도와 총기소유의 광적인 지지자들이라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감옥과 죄수는 넘쳐나고 빈부의 격차는 지역적 분리로 확연히 나타난다. 빈민지역을 따로 만들어 놓고, 내 집, 우리 동네에 피해만 안오면 (미국인들이 입버릇처럼 되뇌이는, Get out of my property), 거기서 서로 싸우든 죽이든 상관 안하겠다는 식의 생각. 공동체는 없고 개인의 이익만 남은, 이러한 결과가 결국 부메랑처럼 스스로에게 돌아올 것을 모르는 무지함.


오늘 내가 포기하고 추방한 한 사람의 형제는 언젠가 무시무시한 괴물이 되어 돌아올 수 있다. 반대로, 구제불능처럼 보이는 오늘의 악한들도 언젠가 누군가가 믿어주고 용서해 주었더라면 변했을 수 있는 형제는 아니었을까?


결국 우리 모두는 용서받고 용서해야 할 존재들이다. 그리고 기독교는, 예수라는 이름으로 나타난 절대자의 용서가 발하는 거대한 에너지가, 오늘 이 한사람, 그리고 내일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종교이다.



물론 안타까운 것은 이 용서마져 권력에 의해 왜곡되고 있는 점이다. 얼마전 성희롱을 한 한 국회의원에 대한 제명안에 대해 다른 국회의원이 예수의 이름을 거명하며 용서를 운운한 적이 있다.


그러나 ‘용서’란 권력의 표피를 벗고 동등한 인간대 인간으로, 가해자가 피해자로 부터 받는 것이다. 감옥의 두 죄인이 서로 용서해주며 죄 없다고 한다면 그게 무슨 코메디인가? 권력을 바탕으로 가해진 성희롱에 대해 권력자들끼리 스스로 용서하자고 예수의 이름을 들먹이는건 역겨운 일일 수 밖에 없다.


기독교가 이미 가진자와 기득권층의 종교가 되어 가고 있기에, 이들이 말하는 용서에는 더이상 '감동'이 없다. 가해자의 진정한 사죄와 무너진 정의의 회복을 통해, 피해자에게서 자발적으로 주어지는 용서가 아니라, 권력을 가진 가해자의 행위에 눈감으라는, 피해자에게 너도 죄인이니 입다물라는 식의 현대 교회의 가르침을 들으면, 아마 예수가 심히 부끄러워할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두 진정한 용서와 회복이 필요하다. 절교는 살인이며, 용서하지 못한자와 용서받지 못한자 모두 지옥 속에서 살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내가 포기하고 외면했던 그 친구들은 오늘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제가 제 형제를 지키는 자입니까?”


“그렇다. 나는 너를 네 형제의 파수꾼으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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