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엽


영화 ‘시(2010)’, 그리고 ‘밀양’과 ‘마더’

: 가족주의를 넘어서는 여성의 성장영화(2010/06)

 

2010년 6월 이인엽 

 




     개인적으로 이창동 감독의 영화들을 인상깊게 보아왔기에, 이 영화 ‘시’는 이번 여름 한국에 갔을 때 기대감을 가지고 극장에서 관람했다. 아내와 같이 영화를 보았는데, 이 글 내용의 상당부분은 아내의 생각이거나 아내와 대화를 나누면서 나온 생각임을 밝혀둔다. 영화가 여성의 심리를 섬세하게 따라가는 내용이다 보니, 미처 이해하지 못한 부분들을 아내가 설명해 준 부분들이 많았다.


     영화의 주인공 미자(윤정희)는 소녀적인 감성을 가진, 때론 주책스럽기도 한 여성이다. 꽃을 좋아하고 늙은 나이에 시를 배워보고자 강의를 듣는 등, 그녀는 삶의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녀의 삶은, 이혼한 딸이 맡겨둔 손자를 혼자 돌보며, 노인 간병을 하며 근근히 살아가는 등,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다. 설상 가상으로 강에 뛰어들어 자살한 한 여학생이, 죽기전까지 미자의 손자와 다른 남학생들에게 성폭행을 당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러한 현실속에 시를 배운다는 것은, 추함속에서 미를 추구하는 그녀의 의지를 상징한다. 그것은 동시에 아름다움을 찾음으로서 삶의 추함에서 도피하고자 하는 열망일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을 도외시하고, 이웃의 고통에 무관심한 채, 자신의 삶에 같혀 소녀적 감성만을 추구하는 삶은 아름다움이 아닌 이기적인 소시민의 삶에 불과하다. 하지만 일련의 사건속에서, 그녀가 생각했던 미와 추의 경계와 정의는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녀는 예전처럼 추를 멀리하고 미를 추구하고자 하는 태도와, 자신의 현실속의 추함을 직면하고 그 속에서 미를 찾아야 하는 정신적 성숙에의 요구 사이에서 고민하게 된다.  이러한 성숙의 과정은 이창동 감독의 전작인 ‘밀양’에서도 잘 그려진 바 있다. 자신에게 닥치는 불행과 잘못된 선택의 결과를 직면하지 못하는 신애(전도연)는, 지속적으로 도피와 퇴행의 과정, 그로인한 고통과 갈등을 겪는데, 그러면서 자아와 인생을 직면해 가는 모습이 고통스럽게 그려졌었다. 이 영화에서도 주인공인 미자는 소녀적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현실의 추함을 회피하는 존재에서, 현실을 직면하고 올바름을 선택하는 것으로 정신적 성장 과정을 보여준다. 


     그녀가 가해자 부모 모임에서 갑자기 뛰어나가 바깥의 꽃을 관찰하는 장면은 그녀의  도피심리를 잘 보여준다. 또한 가해자 아버지들에게 떠밀려 합의를 종용하러 피해자 여학생의 엄마를 찾아갔을 때, 그녀는 살구에 대한 이야기를 수다스럽게 늘어놓고 돌아서다가 그제서야 자기가 왜 왔었는가를 다시 기억한다. 이는 그녀가 겪고 있는 알츠하이머 증상과 무의식적 도피심리가 상호작용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시 낭송 모임의 한 경찰과의 만남은 그녀에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음담패설을 늘어놓는 그가 사실 경찰  내부 비리를 고발해서 좌천당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미와 추의 경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져오고, 그녀가 최종적으로 바른 선택을 내리는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손자의 성폭력 사건은 그녀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지만, 동시에 새로운 시각과 정신적 성숙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녀는 피해 여학생의 삶을 관찰해 가며 그녀의 고통을 되 짚는다. 사건 현장인 과학실을 살펴보고, 여학생의 장례 미사 장소를 찾아가 사진을 가져와 손자의 식탁에 올려 놓는 등, 그녀는 한 손자의 할머니가 아니라, 여성이자 인간으로서 피해자와 가해자를 바라본다. 이러한 관찰과 고민은 미자의 정신세계가 급성장하고,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손자 입에 밥 들어가는 것이 삶의 낙이었던 그녀였지만, 반성의 기미가 전혀 없는 손자를 보면서, 자기 혈육인 손자가 아닌, 피해 여학생에게 공감하고 연대하는 선택을 내린다.


     자기 가족이 아닌 약자이자 피해자에 연대하는 미자의 최종적 선택은, 가족주의에 익숙한 우리에게 큰 놀라움을 준다. 이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 ‘마더’에서 김혜자가 연기한 어머니와 큰 대조를 이룬다. 영화 마더에서, 아들의 살인사건을 덮기 위해 살인까지 저지르고 망각의 막춤속에 빠져드는 김혜자의 모습은 지옥도를 방불케 했는데, 이 영화, 시에서 주인공 미자는 자신의 선택을 통해 망각에 저항하고 가족주의를 넘어, 여성과 여성, 약자와 피해자와의 연대를 통한 초월의 단계를 보여준다. 참고로 봉준호 감독은, 영화 '괴물'에서도 가족주의를 양면적으로 관찰한 바 있다.  가족애는 괴물에 맞서 싸우는 힘이기도 하지만 배타적 집단성으로서의 가족주의가 영화 말미에 일종의 입양을 통해 극복되는 것을 보여준다. 사족이지만 영화속의 괴물이 ‘마더’를 상징한다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괴물의 입은 약간 자궁처럼 보이기도 하고 영화의 가족속에 엄마가 철저히 부재하다는 점도 이런 주장과 연결되기도 한다.)


 



     이 영화 ‘시’에서는 남성성과 여성성, 피해자와 가해자의 대비가 극대화 되는 것 같다. 영화 밀양에서는 오히려 신애가 아집이나 퇴행적 성향을 보이고, 그녀를 사랑하는 카센터 사장 (송강호)이 그녀를 지고지순하게 보호하고 지켜주는 반면에, 이 영화 시에서의 남성들은 거의다 속물적 가해자의 모습을 보인다. 가해 남학생들과 미자의 손자는 도대체 아무 생각이 없는 존재들 처럼 보이는데, 손자는 죽은 여학생의 사진을 보고도 아무런 감흥을 내비치지 않고 그저 밥을 먹고 TV 를 보며 낄낄 대기나 한다. 돈으로 사건을 무마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가해자 남학생들의 아버지들은 극단적 속물의 경향을 보여준다. 몸이 마비되서 미자의 간병을 받는 강노인은(김희라), 힘을 잃은 남성을 상징하는데, 어떻게든 남자 구실을 한번만 하게 해달라는 추레한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마초적, 그리고 말초적’ 남성들 속에서, 미자는 관찰과 깊은 고민을 통해 최후의 선택을 내리고 자신의 인생을 정리한다. 약한듯 보였던 그녀가 모든 것을 바꿔 놓는 것이다. 아무런 가책 없는 손자가 동네 여자 아이들과 낄낄대며 노는 장면은 마치 또다른 성폭력의 가능성을 예고하는 듯 하고, 이를 차갑게 지켜보는 미자의 모습은 중요한 결심이 임박했음을 알려준다. 


 



     영화 밀양에서와 같이 이 영화도 경기도의 소도시의 풍경들을 담아내고 있어 좋은 인상을 받았다. 한편으로는 지방 도시 안의 권력관계와 공고한 기득권층의 횡포를 암시하는 면도 있는 것 같다. 예를 들어 부동산을 하는 가해자 아버지 사무실에서 남자들이 모의를 하는 모습과 농사짓는 가난한 피해자 여학생의 엄마가 대비되는 장면 등이 그런 대비를 보여준다. 아내는 영화속에 비치는 외딴 정류장이나 시골의 풍경이 지방도시의 성폭력 사건을 떠올리게 해서 공포스러운 인상을 주었다고 이야기 하기도 했다.


     영화에 이입이 잘 안되는 사람에게는 주인공 미자의 심리를 따라가는 정적인 구성이 무척 지루 할 수 있고, 반대로 영화에 깊이 이입된 사람은 영화가 주는 긴장감과 불편함으로 힘들 수도 있는 것 같다. 이 영화가 대중적으로 흥행하기 어려운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윤정희 씨를 비롯해 연기자들의 연기도 무척이나 자연스럽고, 각본과 극의 장면들, 전개는 무척 깊은 고민과 세심함의 드러낸다. 영화의 주 소재인 청소년들의 성폭행 사건들이 심심치 않게 있어 왔기에 시사성도 있고, 무엇보다 주인공 미자가 망각의 유혹과 이기적 가족주의의 한계를 넘어, 올바른 선택을 내리고 자신의 삶과 사건을 정리하는 결말은 먹먹함과 감동을 준다. 어머니로서의 여성과 모성애도 대단하지만, 그것마저 초월하고 인류애에 다다르면 여성은 더 위대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미자(美子)는 결국 추함속에서 아름다움을 찾았고, 도피와 망각이 아닌 직면과 올바름속에 자기 삶의 의미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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