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엽

라이프 오브 파이(2012): 작렬하는 복선들, 그리고 내면과 인생에 대한 성찰

 

 

2013년 1월 20일 이인엽

 

 

 

 

영화는 여러가지로 화제가 된 것 같은데, 이안 감독 자체가 워낙 유명한 사람이고, 한층 진보한 3D기술이나 수려한 영상등도 인상적이었다. 동시에 영화속의 여러가지 비유들이나 다양한 해석 가능성들도 많은 이야기 거리를 준다. 보고나서 곰곰히 생각을 해보니, 감독이 깔아놓은 복선들도 참 많았고, 인생과 내면에 대한 통찰도 주는 것 같다. 스포일러가 많은 글이니 영화를 보신분만 읽으시기를 권하면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정리해 보려 한다.

 

 

1. 두가지 이야기와 복선들

 

이 영화가 던지는 일종의 반전은, 주인공 파이가 이제까지 한 이야기와 다른 두번째 버전을 마지막에 이야기 함으로서, 두가지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다는 것이다. 영화를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첫번째는 네가지 동물들(얼룩말, 오랑우탄, 하이에나, 호랑이), 그 중에서도 주로 호랑이와 함께 하는 항해의 이야기이고, 두번째는 사실 네가지 동물들이 다리다친 선원, 자신의 엄마, 공격적인 요리사, 그리고 자기 자신을 상징하고, 요리사가 다리다친 선원과 어머니를 살해하자, 자신이 요리사를 죽였고, 인육을 먹는 일이 벌어졌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 선택과 상관없이 주는 메시지가 있기 때문에, 이 두가지 중에 어떤 것이 진실일지를 판단 하는 것은 중요할 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다. 특히 두번째 스토리로 영화를 만든다면 호러영화(?)가 되기 때문에, 감독은 영상이 없이 주인공의 서술로 아주 짧게 이야기로 처리했고, 이것은 어린 관객들이나, 복잡한 스토리와 상관없이 수려한 화면와 3D 기술을 기대하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 혹은 상술(?)일수도 있겠다.

 

한편, 영화를 보고 생각할 수록 두번째 이야기와 연결되는 복선들이 많이 있다는 생각이 들고, 그렇게 볼 때 찾아지는 생각의 거리들도 많은 것 같다. 약간 숨은 그림 찾기 같지만 몇가지를 언급해 보자. 

 

먼저 주인공 '파이'와 호랑이 '리처드 파커'는 둘다 이름에 대한 사연이 있다. 삼촌이 프랑스 수영장의 이름에서 따온 이름인 ‘피신 몰리토 파텔’은 주인공에게 ‘피싱(Pissing-오줌을 싼다)’라는 괴로운 별명을 안겨주는데, 주인공은 ‘파이(원주율)’라는 별명으로 각인시키기 위해 전체 학생들 앞에서 원주율을 엄청난 자리수까지 외워보이기도 한다. 호랑이 이름의 사연도 특이한데, 원래 ‘리처드 파커’라는 이름을 가진 사냥꾼이 호랑이의 이름을 ‘목마름(Thirsty)’이라고 지었는데, 서류상의 오류로, 호랑이가 리처드 파커가 되고, 사냥꾼이 목마름이 되어버렸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아시겠지만, 영화 전체에서, 그리고 특히 두번째 이야기에서, 호랑이 리처드 파커는 주인공 파이의 거울 이미지, 혹은 또 다른 자아, 내면에 숨어있는 '어떤 것'을 상징하고 있다. 먼저 ‘목마름’은 힌두교 기독교 이슬람교 세 종교를 모두 믿을 정도로 종교를 갈구하는 파이의 성향을 상징하는데, 성당에 들어가 몸에 뿌려야 할 성수를 몰래 마시는 장면, 그리고 그걸 본 신부가 ‘목마르냐’고 물으며 물을 건네는 장면과 연결된다. 이와 유사하게, ‘파이(원주율, π)’는 원이라는 도형을 설명해주는 가장 과학적인 요소이면서, 동시에 끝이 없이 지속되는 소수점은 인간 지성의 한계와 신비를 동시에 보여주는 양면적인 요소이다. 이해할 듯 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신이라는 존재를 떠올리게도 하며, 합리적 과학적 사고를 상징하는 아버지와 신비적 종교성을 인정하는 어머니간의 긴장관계와도 연결된다. ‘리차드 파커’는 더욱 재미있는데, 이 이름은 우리가 아는 에드가 앨런 포우를 비롯한 여러 작가들의 소설에서, 난파되어 살해되고 다른 선원들에게 ‘인육’을 제공하게 되는 인물의 이름으로 여러번 사용되어었다고 한다. 호랑이를 보고 영혼을 느꼈다고 하는 파이의 말을 부정하며, 아버지가 그것은 단지 호랑이의 눈에 비친 ‘네 자신’을 본 거라고 하는 말도, 거울 이미지로서의 호랑이와 파이의 관계를 상징해준다.  

 

가장 단순하게, 파이와 호랑이의 얼굴을 양쪽에 배치한 포스터 자체도 이런 추측을 지지해주는데, 이는 주인공 제이크가 인간일 때의 얼굴과 나비족이 되었을 때의 얼굴을 같이 배치한, 영화 ‘아바타’의 포스터를 떠올리게도 하고, 이는 같은 3D영화인 아바타에 대한 일종의 패러디처럼 보이기도 한다. 

 

                                 

 

결국 과학과 종교, 채식과 육식, 평화와 폭력등의 양면적인 요소들이, 주인공 '파이'와 호랑이 '리처드 파커'에게서 여러번 교차되는데, 파이는 종교와 신을 갈구하면서, 동시에, 호랑이로 상징된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어떤 ‘위험한 것’을 만나보려한다. 이는 아버지의 동물원에서 피뭍은 고기를 내밀어 몰래 호랑이를 만나보려는 위험천만한 시도에서 보여진다.

 

상징들이 주는 의미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기 전에, 몇가지 더 복선들을 생각해보자. 유명한 제라르 드빠르디유가 난데없이 '요리사'라는 단역으로 출연한 것은 그만큼 의미가 있기 때문이기도 한데, 식당에서 그가 식사 메뉴로 '돼지 간과 소시지(순대), 고기국물'을 채식주의자인 파이의 어머니에게 내밀면서 먹으라고 강요하고, 또 거기에 아버지가 분노해 멱살을 잡는 장면은, 두번째 이야기에서 일어났을 법한 인육을 먹는 장면을 시연한 것일 수 있고, '요리사'를 '하이에나'로 연결시켜 주는 장면이다. 동시에 불교도이자 채식주의자이며 같은 아시안(아마도 일본인)인  '선원'이, 가족들에게 다가와 위로하고 말을 거는 모습은 '선원'을 다리다친 '얼룩말'로 연결시켜 준다. 첫번째 이야기에서 배가 침몰하기 전에 주인공이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들이 요리사와 선원이라는 점도 그렇다. '오랑우탄'은 바나나를 타고 생존해 배로 넘어오는데, 그중에 가장 인간과 유사하고 교감하는 동물이라는 것은, '엄마'와 파이의 관계성을 암시하기도 하며, 첫번째 이야기에서 파이는 하이에나가 얼룩말을 죽이자 괴로워 하며 지켜만 보지만, 오랑우탄을 죽이자 견디지 못해 소리를 지르고, 순간, 그때까지 존재감이 없던 호랑이가 방수천 안에서 솟구치듯 튀어나와 하이에나를 순식간에 살해하는 장면도 연결된다. 사소한 것이지만, 하이에나가 얼룩말과 오랑우탄을 죽였고, 호랑이가 하이에나를 죽였으며, 아마 얼룩말의 고기를 먹었을 수 있는데, 방수천 아래에 남아있어야 할 죽은 동물들의 뼈가 전혀 보이지 않는 다는 점도, 그것이 비유일 가능성을 높여주기도 한다.

 

중간에 정박했던 전체가 나무뿌리들로 이루어졌고, 물위에 떠 있으며, 미어캣들이 살고 있는 '섬'의 장면과 설정들도 상당히 비유적이고 비현실적이다. 여기서도 과일속의 이빨이라던지, 직립을 해서 약간 사람처럼 느껴지는 미어캣을 호랑이가 잡아먹은 것, 밤이되면 호수가 산성이 되고 섬 자체가 생물을 잡아먹는 다는 설명 등등에서도, 과도할 정도로 '육식'이나 '식인'에 대한 메타포가 반복되고 있다. 

 

물론 전반적으로는 첫번째 이야기가 사실이라도 해도 영화 자체에 큰 무리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생각해 볼수록 두번째 이야기에 대한 복선들이 좀더 많았다는 생각이 든다.

 

 

2. 내 안에는 무엇이 있는가?

 

 

앞에서 이야기 했듯이, 호랑이는 주인공의 또 다른 자아, 혹은 내면에 잠자고 있었던 ‘그 무엇’일 수 있다. 어머니(오랑우탄)의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을 맞이하는 순간, 배의 밑에서 잠자고 있던 호랑이가 솟구쳐 하이에나를 살해 하는데, 주인공 파이의 내면에서 잠자고 있던 그 무엇(폭력, 본능, 충동, 욕망 등등)의 실체가 나타나는 것일 수도 있고, 자아의 분열을 상징할 수도 있다. 

 

혹자는 정신분석적인 입장에서 주인공이 살인, 어머니의 죽음, 식인 등의 극단적인 상황을 견딜수가 없어서 자신의 일부이자 분열된 자아인 호랑이를 만들어 내었다고 했는데, 이것도 하나의 해석일 수 있겠다. 

 

인생이란, 성숙이란, 그리고 영성의 추구란, 초월자에 대한 갈증, 그리고 세상에 대한 탐구, 그리고 내면에 대한 성찰의 과정일 수 있다. 동양적으로 말하면 ‘천/지/인’이라는 세가지 요소와도 맞닿는다. 이원론 적으로는 한쪽 끝에는 선과 진리를 가진 신의 존재가 있을 수 있고, 다른 한편에는 악과 고통이 있을 수 있다. 악은, 하이에나와 요리사라는 외적인 존재일 수도 있지만, 내 내면의 호랑이 일 수도 있다. 하이에나를 죽이기 위해 내면의 호랑이가 발현될 수도 있기에, 이 두가지는 상호작용 할 수도 있다. 흔히 말하듯, 괴물과 싸우면서 내 안의 괴물이 만들어지거나 발견되는 현상. 인생에 대한 고민을 제대로 해 나가는 사람이라면 이런 요소들을 직면하지 않을 수 없는 것.

 

망망대해에 홀로 놓인 작은 '배'를 높은 상공에서 내리 비추는 장면이 있는데, 배의 절반은 하얀 방수천으로 다른 반은 붉은 색의 배 밑바닥이 보여, 마치 절반으로 나눠진 알약 캡슐처럼 보이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인간의 내면과 외면, 이중성을 보여주는 것인가? 호랑이는 방수천 아래에 있다가, 나타났다 숨었다를 반복한다. 엄청난 점프력을 가진 호랑이가 방수천 위를 기어오르지 못한다는 것이 황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어쩌면 호랑이와 방수천은, 우리 내면의 '그 무엇'과, 우리를 덮고 있는 외피 – 예의, 규범, 문화 – 등을 상징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를 위협하거나 괴롭히는 그 무엇은 다른 사람에게는 잘 나타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호랑이를 간단히 없애버리거나 죽여버릴 수도 없는 것은, 그것이 나에게 위협이 될 수도, 아니면 에너지와 경각심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간단한 예로 성적인 욕망은 인간을 가장 비참하고 추하게 만들 수 있지만, 반대로 사랑하는 이와 누리는 기쁨, 그리고 생명 탄생의 원천이 될 수도 있다. 거세를 하게되면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을 지언정, 잉태의 능력도 사라진다. 이것이 인생의 오묘함이고, 조물주의 신비한 설정이다. 결국 내면에 숨어있던 호랑이를 발견하고 그것과 싸우고 길들이고 적응해 나가는 과정이 필요한 것. "인간의 마음에는 하얀개와 까만개 두 마리가 서로 잡아먹으려고 싸우고 있는데, 어떤 개가 이길까? 당신이 먹이를 더 많이 주는 개가 이긴다..." 뭐 이런 비유도 생각이 난다.  

 

호랑이에 대처하는 한가지 방법은, 호랑이가 나오지 못하도록 배 전체를 방수천으로 더 완벽하게 덮는 것이나, 호랑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자기최면을 거는 것이다. 많은 종교들은 규율이나 훈련을 통해 이러한 목표를 추구하는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되지만, 현실과 점점 더 괴리되고, 위선적인 모습을 가져올 수도 있다. 성경의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는, 바리새인으로 대표되는 당시의 종교인들이 자기 내면의 악을 못본체 하고, 규율과 위선에 절어있는 것에 대해, '회칠한 무덤'이라고 통렬히 지적했다. 속은 썩은 시체로 차있는데, 겉만 번지르르하게 치장했다는 것이다. 

 

오늘의 기독교는, 우리안의 호랑이는 죽었다라고 다 같이 주문을 외우면서, 문제가 해결됬다고 믿고 싶어하는 것은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볼 시도도 하지 않고, 내면에 대한 이해 자체가 없는 화석화된 신앙이다. 자신에 대한 너무나도 얄팍한 이해, 그리고 그와 동반되는 세상에 대한, 신에 대한 참을 수 없는 가벼운 이해와 무지. 

 

영성과 기도라는 것은, 신을 향하여 세상을 향하여, 내 자신을 향하여 깊이 나아가고, 이해와 공감 소통이 깊어지는 것이어야 함에도, 우리의 기도는 ‘주문’ 외우기 식, 그리고 나에게 필요한 것만 ‘주문’하는 그런 눈먼자의 기도, 눈 감은, 눈을 감기로 결심한 자의 기도는 아닌가 생각해 본다.

 

나의 말과 생각과 상관없이 튀어나오는 내면의 호랑이는, 결국 나의 진실한 모습,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숨길 수 없는 증언이요, 끝나지 않은 싸움, 아직도 가야할 길, 나를 은총과 겸손으로 내어미는 채찍일 수도 있다. 모든 것의 출발점은 문제 자체를 인정하는 것이다. 

 

사람이 솔직해질 수만 있어도, 정신병적 현상들의 상당부분은 해결 가능하다. 스코트 펙이 쓴 '거짓의 사람들'을 보면, 정신질환의 상당부분은, 현실의 전체 혹은 일부분을 어떠한 손쉬운 거짓말로 덮는 것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내가 어떠한 사람인가 정확히 보는 것, 자체가 성숙과 변화의 시작이다. 

 

 

3. 인생이란 무엇일까?

 

 

말했듯이 인생은 내면을 들여다 보는 과정이자 세상을 이해하는 과정이다. 영화에서 보여지는 주인공의 항해는 역시 '내면과 세상과 신'에 대한 탐구의 과정이다.

 

아내는 동물들을 가득 태우고 항해하는 배를 보면서 노아의 방주가 떠올랐다고 했다. 그러고 보면, 주인공은 작은 배에서 “Welcome to the Pi’s Arc”라는 말을 했던것도 같다. 그런데 성경의 이야기와 달리 큰 배는 깨어지고 동물들과 가족들은 죽고 만다. 방주가 왜 깨어졌을까? 세계 최고의 엔지니어 일본인들이 이해할 수 없다고 질문하지만, 영화는 끝까지 답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파선으로 인해 파이의 인생(Life of Pi)은 극심한 고통의 시간을 겪게 되었으나, 동시에 자신의 내면의 깊은 곳을 관찰하고, 세상과 삶의 의미를 고민하게 되는 여정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역시 아내는 영화를 보고나서 극한 상황을 경험한 사람만이 깨달을 수 있는 것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고 보면, 집채만한 고래나 신비한 빛을 내는 플랑크톤과 해파리들을 보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떠올리게 하는 날치떼들을 만나 굶주림을 면하는 순간들이 연결 된다. 무엇보다 폭풍속에서 배가 깨어지고, 가족들이 다 죽어버리는 현실에 대해 목놓아 원망하는 순간에 신의 섭리가 살아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장면이 인상적인데, 주인공은 배의 절반을 덮고 호랑이를 가리고 있는 방수천을 걷고(영화속에서 유일하게), 호랑이에게 폭풍속에서 나타난 신의 흔적을 보라고 외친다.

 

첫번째 이야기 중에서도 가장 비유적인 섬에 대한 장면. 자신이 안락한 쉼터라고 생각한 섬이 결국 자신을 죽일 수 있다는 것. 주인공에게는 담수와 식물 뿌리, 과일 등이 있고, 호랑이에게는 미어캣이 있는, 먹을것이 충분히 보장된 그곳이 사실은 죽음의 섬이라는 것. 세상과 동떨어져 결국은 잊혀지고 섬에게 먹혀버릴 수 있다는 것도 상징적이다.

 

 

4. 신은 어디에?

 

이 영화는 종교적 영화이다. 주인공이 힌두교, 기독교, 이슬람교 모두를 믿는 다는 설정이 재미있기도 하고, 혹자에게는 불편할 수도 있겠다.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그 장면에서 몇몇 관중이 갑자기 일어나 걸어나갔는데, 미국 남부에 있다보니 혹시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분연한 거부(?)의 의사는 아닌가 추측해보기도 했다.

 

조금 다른 상황일 수 있지만, 다빈치 코드나 레이디가가 사건 등에서 보듯이, 어떤 영화나 문화적 현상들을 단지 기독교 적이나 반기독교적이냐로 나누는데 목숨 거는 단순한 사람들을 보면, 그들이 가진 기독교에 대한 이해 자체가 매우 조악하다는 것을 보게 된다. ‘기표’에 목숨건다는 것은 ‘기표와 기의의 차이’ 자체를 이해 못하는 것이요, 결국은 ‘기의’에 대한 이해 없음을 고백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   

 

문득, 영화 ‘밀양’도 생각이 난다. 어설프게 왜곡된 신을 주입하려고 하기 보다는, 차라리 숨어있는 신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영화가 더 기독교에 가까울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신은 아름다운 별빛속에서도, 가혹한 폭풍우 속에서도 만날 수 있다. ‘숨어있는 신’은, 자신을 찾는 자에게서 그리 멀지만은 않다.

 

 

5. 오늘의 기독교는?

 

내면에 대한 솔직함과 성찰, 세상에 대한 민감함과 고민, 신에 대한 갈망과 추구가 없다면, 오늘의 기독교는 사기꾼들의 집회요 약장수의 감언이설이 될 수밖에 없다. 영성도, 고민도, 신비(신비주의가 아닌)도 없는, 신에 대한 겸손도, 세상에 대한 공감과 연대도, 자신에 대한 반성도 없는 싸구려 종교의 탄생이다. 

 

혹시 우리는, 고차방정식을 가르치면서, 그것을 푸는 공식과 과정을 차근차근 알려줘서 새로운 문제들을 풀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아니라, 한가지 문제의 답을 알려주고 그냥 외우도록 시키고 있는 건 아닌가 싶을때가 있다. 그것이 정답이더라도, 그 문제를 이해하거나, 다른 문제는 절대 풀 수가 없다. 

 

비슷한 의미에서 예수가 구원의 길일 지라도, 그 과정에서 거쳐야 할, 내면의 성찰, 세상과 삶에 대한 고민, 신에게 나아가는 영성과 성숙의 길을 말하지 않는다면, 내 삶의 구체적인 문제들을 풀어나가는데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남묘호랑개교'인가 하는 주문을 외우는 종교처럼, 이해하지 못하는 주문을 외워, 문제가 해결되리라 믿는 마술적 사고는 아닌가 하는 것. 

 

개인적으로는, 영화에서 보였던 섬에 사는 '미어캣'의 세계가 떠오른다. 세상과 끊어진 '무지의 섬'에서 자신들만의 세계를 이루고 몰려다니는. 그 섬이 결국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것도 모르는. 

 

인격과 신앙의 한 단계에 머무르기로 작정하고, 변화와 성숙을 거부하는 것. 

한때 효과가 있었던 어떠한 단순한 논리, 설명 만으로 쉽게 나와 세상과 신을 규정하는. 

신 앞에 선 단독자로서의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수동적으로 손쉬운 해결책을 기다리는. 

자기에게 주어진 조악한 사고의 프레임에 만족하며 털끝만치도 의심하지 않는. 

신의 이름을 수없이 말하지만, 그의 애타는 소원과는 접접을 찾기 어려운. 

세상의 약자들과 그들의 고통에 대한 공감능력을 배우지 못한. 

기득권 세력 만들어 내는 선동적 담론들에 가장 쉽게 휘둘리는. 

자기 자신에 대한 과도한 집착, 하지만 정직한 자기 인식은 부재한. 

욕망의 얼굴을 하고 있으나 그것을 보지 못하는. 

 

그것이 우리의 모습은 아닐까?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나에게.

우리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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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 생각나는 노래 한곡을 링크해 본다. 브라운아이드 소울의 곡이다.

 

 

폭풍속의 주

 

잔잔하던 내 바다 거센바람 불어와 지친 내 몸을 흔드네

고요하던 내맘은 쓸쓸한 밤 홀로 헤매이고 거센파도 나를 덮쳐도

 

오직 주님만 바라봅니다

내 모든걸 아시는 주님 모든짐을 주께 맡기네

 

이끄소서 만왕의 주 날 붙드소서 전능의 주여

잡으소서 생명의 주 날 건지소서 폭풍걷히고 비추리라

 

작고 약한 나의 맘 오늘도 안으시는 내겐 한없는 그 사랑

메마른 가지처럼 한없이 지쳐만가던 삶에 빛이 되신 주님오셔서

 

상한 나의 맘 감싸주시네

내 모든걸 받으신 주님 폭풍속에 구원되시네

 

이끄소서 만왕의 주 날 붙드소서 전능의 주여

잡으소서 생명의 주 날 건지소서 폭풍걷히고 비추리라

 

나 이제 주의 이름높여 노래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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