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엽

아바타와 디스트릭트 9에서 보는 정치의식: 인종차별과 제국주의 비판


2009년 12월 이인엽 (www.blog.naver.com/inyeop2)


영화 ‘아바타(Avatar, 2009)’와 ‘디스트릭트9(District 9, 2009)’, 이 두 영화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간단히 외계인을 소재로 한 SF라는 점, 그리고 제임스 카메론이 각각 감독(아바타)과 제작자 (디스트릭트9)로 참여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는데, 개인적으로는, 인종차별과 침략전쟁이라는 주제를 피해자의 관점으로 보여줌으로서, 비판적 메시지를 전달했다는 것을 생각해 보고 싶다.


많이 이야기 되듯, 아바타는 '아라비아의 로렌스(Lawrence of Arabia, 1962)'나, '늑대와 춤을(Dances with wolves, 1990)'과 같이, 이질적 집단에 들어간 외부인 주인공이 그에 동화되고, 그들을 위해 싸우게 된다는 주제를 반복하고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실험실에서 만들어낸 외계인의 몸에 인간의 정신이 들어가 외계인 공동체를 경험한다는 SF적 상상력과 이런 상상력을 가능케 한 컴퓨터 그래픽 기술일 텐데, 이에 힘입어 영화는 메시지를 잘 전달해 냈다.




 


1. 아바타 – 줄거리


(스포일러 있음)


주인공 제이크는 하반신이 마비된 해병대원으로 죽은 형을 대신해 아바타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다. 그의 임무는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나비족의 몸을 입고 나비 족 공동체속에 들어가 그들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고, 지구인들이 원하는 희귀자원 ‘언옵타늄(Unoptanium)’을 채굴할 수 있게, 나비 족을 타 지역으로 이주 시키는 것. 그러나 나비족과 어울리게 된 그는 그들의 문화와 생활방식에 공감하고, 자신을 훈련시켜준 나비족 여인 네이티리와 사랑에 빠지는데, 자신들이 거주하는 나무를 신성시여기는 이들이 절대 다른 곳으로 이주하지 않을 것임을 알게 된다. 그러자 프로젝트를 주도하는 거대기업의 대리인과 전쟁광인 쿼리치 대령은 외교적인 수단은 더이상 먹히지 않는다며, 무력으로 나비족의 터전을 파괴하는데, 이로인해 죽어가고 고통 받는 나비족의 모습이 처절하게 묘사된다. 중요한 것은 제이크가 아바타의 몸을 입고 나비족의 일원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의 입장에서 이러한 상황을 바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상대방, 피해자의 관점으로 같은 사건을 바라 볼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영화의 중요한 설정이다.


 



2. 서구 중심적 시각, 인디언 학살에 대한 패러디


영화를 보다 보면 무대만 옮겨 왔을 뿐, 이것이 미국 초기의 인디언 학살과, 베트남 전쟁, 그리고 최근의 이라크 전쟁 등, 미국 역사속의 침략과 학살을 패러디 하고 있음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특히 미국의 인디언(아메리카 원주민) 학살은 인종말살에 가까울 정도로 처참했고, 살아님은 인디언들도 차별과 트라우마, 가난 속에서 살고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악행이 가능했던 이유 중 하나가, 그들을 같은 인간이 아닌 ‘타자’로 보고 그들의 입장과 관점에 대한 고려가 없었다는 점이다. 원래 인디언(Indian)이라는 명칭 자체가, 그들을 인도인이라고 오해한 콜럼버스에 의해 붙여진 잘못된 이름이다. 요즘엔 공식적으로는 아메리카 원주민 (Native American)이라는 이름이 쓰이고 있지만, 이들을 인디언이라고 불렀다는 자체가, 그들이 누구인지에 대한 이해나 관심이 전혀 없이, 서구인의 관점에서, 금이 있다는 인도를 찾는 것, 이들의 땅과 자원을 빼았는 것만이 중요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디언들은 서구인들에 의해 무참히 학살되고, 삶의 터전을 빼았겼을 뿐 더러, 지금도 미국 시민권조차 없이, 대부분 '인디언 보호구역(Indian Reservation)'에서 살고 있다. 이 명칭 자체도 개인적으로 깊은 불쾌함을 느꼈는데, 마치 '야생동물 보호구역(Wildlife Reservation)'을 떠올리게 하는 이 이름은, 미국인들이 인디언들을 마치 인간이 아닌 ‘야생문명’처럼 인식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유명한 TV시리즈이자 영화인 ‘스타트랙(Star Trek)’도 결국 서구인들이 타자를 만나고 그들과 상호작용하는 과정을 패러디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서구인들의 오만과 타자를 야만으로 폄하하고 왜곡해 온 자기중심적 시각은 에드워드 사이드의 유명한 책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에서 잘 비판된 바 있다. 실제 서구인들이 제국주의적 침략과 식민화에서 보인 태도와 그로 인한 원주민과 제3세계의 희생을 보면, 과연 누가 문명이고 누가 야만인지 다시 생각해 보게 되는데, 이는 스스로 문명인체 하면서 타자를 야만과 악으로 보고 그들의 문명을 마음대로 파괴하고 착취한 서구인들의 행태가, 사실은 지극히 ‘야만적’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야만으로 폄하된 제3세계의 원주민 문명속에서도 평화와 공존, 생명존중 등 배워야 할 문명들이 분명히 존재했다.  


 



3. 인디언들의 비참한 역사


말이 나온 김에 조금더 인디언들의 역사와 현실을 이야기 해 보면, 인디언들은 미국인들에 의한 조직적 학살, 강제 이주, 그리고 유럽인들이 가져온 전염병에 의해 1000만 명이 넘던 인구가 현재 200만 명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말살 되었다. 예를 들어 미국 동남부 현재의 조지아주에 살던 체로키 부족은, 서구 문화와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미국의 체제와 공존을 택했는데, 연방정부와의 조약에 의해  자치정부와 영토를 보장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 땅에서 금광이 발견되자, 이들을 지지하는 대법원 판결에도 불구하고, 인종차별주의적이었던 당시 대통령 앤드류 잭슨은 이들을 1838년 오클라호마로 강제 이주시킨다. 이 과정에서 만칠천명중 무려 사천명이 숨지게 되어 이들의 이주를 ‘눈물의 행로(Trail of Tears)’라고 부른다. 오늘날에도 인디언들의 현실은 처참한데, 그들은 미국 시민권조차 없고, 상당수가 실업과 높은 자살률에 시달리며, 약물, 알콜중독, 도박에 빠져 살고 있다. 인디언보호구역은 주 법이 적용되지않는 치외법권지역으로, 많은 지역에 전기나 수도시설 등 기본적인 인프라도 되어 있지 않고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해, 실업률이 미국 전국 평균보다 10배나 높고, 평균 가계 수입이 흑인들을 비롯한 미국의 소수민족 중 가장 적은 1000달러 미만이며, 인디언들의 예상 수명은 미국 평균보다 20년 이상 낮다고 한다. 심지어는 1960년대까지, 건강검진으로 속여서 인디언 여성들에게 동의 없이 불임시술을 받게 해왔다는 끔찍한 사실도 폭로 되었다. 인디언들의 의식과 전통을 금지시키고, 인디언 지역에 카톨릭 학교를 세우고 강제로 인디언 어린이들을 입학시켜, 십대 여아를 속옷까지 벗겨 가죽채찍으로 때리고 독방에 가두는 등, 억압적인 교육으로 비인간적으로 백인화 시키기도 했다. 최근 인디언 보호구역에 도박시설을 짓는 것을 허가 하게 되면서(미국은 라스베가스 등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도박이 불법), 인디언 보호구역은 한국의 강원랜드와 같이 도박중독이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요즘 미국에선 이들을 인도인(영어로 같은 Indian)과 구분하기 위해 '카지노 인디언 (Casino Indian)'이라고 농담삼아 부르기도 한다. 어렸을 때 재미있게 읽은 마크 트웨인의 소설 ‘톰 소여의 모험’에 보면, ‘인디언 조’라는 인물이 살인범에다 톰과 베키까지 죽이려다 동굴에 같혀 굶어 죽는 악역으로 설정되어 있는데, 은연중에 인디언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었던 것 같다. 그가 왜 혼자 돌아다니는지, 어디서 온 사람인지는 아무런 설명이 없지만, 실제로 그런 인물이 있었다면, 위에서 설명한 인디언의 슬픈 역사 속의 한 희생자는 아니었을까? 보다 관심이 있다면 ‘내 이름은 용감한 새’라는 한 인디언 여성의 자전적 소설을 추천한다.


 




결국 땅의 원주인인 인디언들은 미국 내부에서 무자비하게 식민지화 되었고, 인디언들에 대한 미국 정부의 정책은 과거와 현재를 막론하고 실로 ‘악마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마치 이들을 약화, 멸종시키기로 작정한 듯 하다. 왜일까? 엄밀하게 따지면, 그들이 미국 땅의 원 주인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그들의 존재가 부각될 때마다, 미국의 추악한 역사를 상기 시키기 때문은 아닐까? 마치 일본정부가 위안부 할머니들이 돌아가시기를 기다리듯 말이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다면, 미국이 언제나 아름답고 정의로운 나라라고만 생각하는 것은 정말 어려워 진다. 미국의 역사와 영토에는 너무나 많은 무고한 피가 묻어있기 때문이다.



1971년 히트했던 Indian Reservation (인디언 보호구역)이라는 팝송을 보면, 인디언들의 설움이 일부 느껴진다.


Indian Reservation (인디언 보호구역)


They took the whole Cherokee nation 그들은 체로키 나라를 빼았아, 

put us on this reservation 우리를 이 보호구역에 가둬 놓았네

Took away our ways of life 우리 생활 방식을 앗아가고 

tomahawk and the bow and knife 도끼와 활과 칼마저 빼앗아 갔지


Took away our native tongue 우리의 말을 빼앗고

taught their English to our young 우리 애들에게 자기들 영어를 가르쳤네

And all the beads we made by hand 우리가 손으로 만들던 구슬들은

are nowadays made in Japan 이제 일본에서 만들어내고 있다네


Cherokee people, Cherokee tribe 체로키인들, 체로키 부족

so proud to live, so proud to die 자랑스럽게 살고 자랑스럽게 죽네


They took the whole Indian nation 인디안 나라 전체를 앗아가고

locked us on this reservation 우리를 이 보호구역에 가둬놓았네

Though I wear a shirt and tie 비록 내가 셔츠를 입고 넥타이를 매지만

I'm still part redman deep inside 아직도 마음 깊은 곳엔, 붉은 얼굴 체로키 인이야


Cherokee people, Cherokee tribe 체로키인들, 체로키 부족

so proud to live, so proud to die 자랑스럽게 살고 자랑스럽게 죽네


But maybe someday when they learn 그러나 언젠가 알게 될꺼야

Cherokee nation will return, 체로키의 나라가 돌아오리란 걸,

will return, will return, 체로키의 나라가 회복되리란 것을.....

will return, will return



아바타는 노골족으로 인디언들이 처했던 상황을 패러디 하는데, 나비족이 된 제이크의 시각에서 보면, 같은 지구인들, 즉 침략자의 관점과 행동이 얼마나 일방적이고 폭력적인가를 잘 보여준다. 결국 현실의 역사와는 달리, 나비족과 나비족에 동화된 제이크가, 침략자인 지구인들(결국 미국인들)을 몰아내는 것으로 마무리 되어, 영화로서나마 속시원함을 느끼게 해 준다. 한가지 한계라면, 역시 외부인인 제이크가 이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 일종의 메시야 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 역시 서구중심적이라고 볼 수 있는 요소. 생각나는 영화로, '파워 오브 원'이라는 남아공의 반 아파르트헤이트 영화가 있는데, 여기서도 백인인 주인공이, 예언으로 전해져 온 레인메이커(일종의 구원자)로 선택 받는 것이 역시 유사한 한계점이었던 것 같다. 



 


4. 디스트릭트9과 공감의 문제


(역시 스포일러 있음)


영화 디스트릭트9도 유사한 주제의식을 잘 드러내 준다. 어느날 외계인들이 모선을 타고 남아공에 도착하는데, 그들은 앞선 과학기술에도 불구하고 심각한 질병과 굶주림으로 비참한 상태였고, 일종의 난민처럼 캠프에 수용된다. 주인공 비커스는 외계인 통제를 담당하기로 계약을 맺은 민간 회사 ‘MNU (Multi-National United)’의 직원이다. 그가 특별히 사악해 보이지는 않지만, 단순하고 생각없는 인물로, 장난삼아 외계인의 태아를 낙태시키는 등, 이들을 타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키라는 회사의 명령을 별 생각 없이 수행한다. 그러던중 우연히 외계인의 생화학 물질에 노출되면서 그의 DNA는 외계인의 것과 합성되는데, 이후 그는 신체는 점점 외계인으로 변해간다(이는 영화 더 플라이(The Fly)를 떠올리게 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외계인이 겪었던 일들 동일하게 겪기 시작한다. 지구인들이 입수한 외계인들의 첨단 무기는 외계인 DNA를 인식할때만 작동되는데, 그가 외계인 DNA를 갖게 되면서, 그는 회사의 필요에 의해 실험대상이 된다. 겉으로는 외계인을 난민으로 수용하고 보호하는 듯 했지만, MNU는 오직 기술과 무기개발을 위한 도구로서 그들을 이용했고, 비밀리에 잔혹한 생체실험을 진행했는데, 비커스도 MNU의 고위 간부인 그의 장인의 냉정한 동의하에, 무시무시한 생체실험과 해부를 당할 위기 처하고, 겨우 탈출하게 된다. 외계인이 되어 감으로서, 더이상 그는 인간이 아니고, 모든 권리를 박탈당하며, 벌레처럼 해부를 당해도 상관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아무 생각 없던 그가, 외계인의 신체를 갖게 되면서, 외계인이 당했던 끔찍한 차별과 학살을 고스란히 경험하는데, 그 과정에서 그는 외계인들이 처한 현실에 눈을 뜨고 비로서 그들을 인격체로 느끼기 시작하는 것이다.





아바타가 인디언학살이나 침략전쟁을 패러디하고 있다면, 디스트릭트9은 인종문제나 난민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영화의 무대가 인종차별 정책 아파르트헤이트로 유명한 남아공인 것부터 시작해, 남아공에서 백인들만의 구역 이름이 ‘디스트릭트6’였다는 사실에 대한 풍자, 그리고 외계인의 외양을 바퀴벌레(긴 더듬이에 갑각류 같은 갈색 피부를 가진)와 유사하게 설정한 것 등에서 잘 드러난다. 르완다에서 일어난 인종청소를 다룬 영화 ‘호텔 르완다(Hotel Rwanda)’를 보면, 후투 족이 투치 족을 학살하면서 그들을 바퀴벌레(cockroach)라고 부르는데, 학살자의 관점에서 난민이나 타인종은 정말 죽여 없애야 할 해충처럼 보일 지 모른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들이 바퀴벌레가 아니라, 그들을 타자로 보는 학살자의 관점이 그들을 바퀴벌레로 보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외계인으로 변해가기 시작한 주인공은 비로서 그들의 입장과 고통을 느끼고 그들과 교감하게 된다. 타자를 없어져야 할 해충같은 존재로 보는 시각이, 당사자에게 얼마나 끔찍할 수 있는지를 이 영화는 잘 묘사해 준다.   






5. 미국의 패권주의와 대테러전쟁에 대한 패러디


이러한 공감의 부재와 자기중심적 시각은, 개인들의 이기심과 그것들이 모여서 형성된 국가 이기주의, 인종차별, 제국주의로 나타난다. 미국인들의 특징 중 하나는, 자국의 이익이 걸린 문제에 대해 열을 올리지만, 해외에서 미국의 정책과 개입으로 벌어지는 인권유린과 폭력에 대해서는 지극히 무관심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많은 미국인들이, 냉전기 CIA와 미군에 의해 제3세계에서 저질러진 악행들에 대해, 무지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지금도 그런 내부 비판을 하면 극단주의자나 심지어 '빨갱이'라고 몰아부치는 분위기가 존재한다. 9.11 테러의 희생자들에 대해 아파하고 분개하는 것은 공감이 가지만, 그것이 명분 없는 이라크 전쟁과 그로 인해 일어난 엄청난 민간인들의 희생을 합리화 해주지는 않는다. 안타까운 것은 이라크 전쟁의 실패로 부시정부에 대한 비판이 일고 오바마가 당선이 되었지만, 대부분의 미국인들의 비판은, 충분한 대비 없이 전쟁을 해서 미군들이 죽고 미국의 국익에 해를 입혔다는 것에 국한된다. 전쟁 자체에 정당한 명분이 없었고 (부시가 주장한 9.11테러나 알카에다와 후세인 정부의 연관성, 그리고 대량살상무기는 결국 발견되지 않았다) 그로 인해 이라크 인들이 엄청난 고통을 받았다는 것에 대해서는 별 자성의 목소리나 비판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자기 중심적 시각의 한계에 빠져, 대체 왜 제3세계에서 반미의식이 생기며, 이슬람권이 점점 미국에 대한 증오를 갖게 되는지는 고민하지 않는다.  


아바타는 인디언에 대한 학살을 다루는 동시에 미국의 패권주의적 침략전쟁과 현재의 대테러전쟁을 노골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아바타에서 전쟁광 쿼리치 대령과 다국적기업의 대표가 나비족의 터전을 무참히 파괴하는 장면은, 베트남전을 배경으로 한 유명한 영화 ‘지옥의 묵시록(Apocalipse Now, 1979)’에서 바그너의 음악 ‘발퀴레의 기행’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헬기부대가 베트남 마을에 네이팜탄을 사정없이 퍼붓는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재미있는 것은 영화 ‘지옥의 묵시록’에서 헬기부대의 이름이 ‘제 6기병대(Six Cavalry Brigade)’로, 과거 말 타고 전쟁하던 기병대가 현재의 헬기부대로 이어진 것으로 (더이상 말을 전쟁에서 쓰지 않기에), 역사는 과거 인디언들을 사냥하던 때나 베트남 전쟁때나 유사하게 반복된다는 생각을 하게 했었다.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Dr. Strangelove, 1964)'에서 소련에 핵무기를 떨어뜨리러 가는 비행기 조정사가 ‘카우보이 모자’를 쓴 채 폭탄을 말처럼 따고 떨어지는 장면도, 미국 역사 속에 배어있는 폭력성을 잘 풍자하고 있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 비고 모텐슨 주연의 영화 '폭력의 역사(History of violence, 2005)'는 원죄적인 미국의 폭력의 역사가 어떻게 반복, 재생되는지에 대한 탁월한 은유라고 할 수 있다.  


공격을 결정하고, 출동하기 전 쿼리치 대령이 부대원들에게 연설하는 장면에서는 ‘선제공격(Preemptive Strike)’이나 ‘테러리즘(Terrorism)’, 그리고 ‘외교적 접근법(diplomatic solution)’이 실패했기에 이제 무력으로 나가야 한다는, 부시 류의 익숙한 표현들이 노골적으로 사용되는데, 이는 현재의 대테러 전쟁에 대한 비판으로, 미국 보수주의 자들의 마음을 심히 불편하게 했을 것이다.




 


6. 자본주의 (초국적 기업과 군대) vs. 자연주의


영화에서 묘사되는 악은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초국적기업과 군사주의를 대표하는 군부대이다. 이는 미국의 패권을 지탱하는 양 날개로서, 영화에서도 서로 협력하며 나비족에 대한 침략과 착취의 업무를 수행한다. 디스트릭트9에서 다국적 기업 MNU는 표면적으로는 정부와 계약을 맺은 기업으로 외계인 관리업무를 맡고 있지만 실제로는 군수산업을 통해 이익을 창출하고 외계인을 생체실험하는 추악한 집단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욕망에 기반한 문명은 인간에 대한 착취와 자연에 대한 파괴를 가져오는데, 이와 대비되는 나비족의 문명의 핵심은 자연과 공동체로, 인간과 자연은 연결되어 있고 모든 생명은 존중되어야 한다는 사상으로, 동양 사상이나 자연주의, 가이아이론 등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 아바타는, 자본주의와 군사주의에 대한 비판의 메시지를 노골적으로 다루면서, 자연주의 문명의 나비 족이 침략자인 지구인들을 물리치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이러한 메시지는 예상대로 미국 보수층에게서 반감을 일으키고 있다. 먼저 영화는 환경보호주의 메시지를 강하게 전달하고 있는데, 이는 전통적으로 민주당의 이슈이고 (미국은 실질적인 양당제로 녹색당은 거의 영향력이 약하기에 민주당이 환경이슈를 일부 대변하고 있다) 공화당은 이에 비판적인 편이다. 한 예로 앨 고어의 책과 영화 ‘불편한 진실(Inconvenient Truth)’로 잘 알려진 지구온난(Global Warming) 문제는 미국내에서 큰 논쟁거리인데, 보수층은 이를 거의 사기라고 치부하고 있다. 심지어 Fox 뉴스의 시사 프로그램 진행자 글렌 벡(Glenn Beck)은 프로그램 중간에 갑자기 숨을 거칠게 내 뱉고는, 지구온난화를 주장하는 논리에 의하면(Co2를 배출함으로서) 자기가 얼마나 지구를 오염시켰느냐면서, 이를 비웃기도 했다. 하지만 보다 보수층의 심리를 불편하게 하는 것은, 앞에서 말했듯이, 인디언 학살을 비롯한 과거 미국의 추악한 역사를 상기시키는 내용과, 현재진행형인 대테러 전쟁에 대한 비판적 메시지가 들어가 있는 것, 결과적으로 영화속에서 미군과 다국적기업이 침략자로 설정되어 만행을 저지르고, 피해자의 시각으로 이를 바라보게 한 후, 미군이 아닌 나비족의 승리를 응원하게 하는 영화의 관점 때문일 것이다.


미국의 보수 기독교 그룹에서는 이 영화가 무신론적이니 자연주의적이니 하며 비판하는 목소리가 있는데 (기독교 영화도 아닌데, 무신론이라는 비판을 들이대는 건 대체 무슨 논리인지?), 그런 얘기를 하기 전에, 왜곡된 성경 해석을 통해 제국주의와 인종차별, 침략전쟁을 합리화 해 온 보수 기독교의 과거 역사에 대해 반성을 해봐야 하지는 않을까 싶다. 실제로 미국 보수 기독교의 세계관을 들여다 보면, 예수의 가르침 보다는, 미국의 자본주의와 군사주의를 옹호, 찬미하는 내용이 더 핵심이 아닌가 싶을 정도인데, 이들이 ‘아바타’를 보고 불편함을 느낀다면, 아마도 영화가 자신들의 국가 이데올로기에 비판을 가하기 때문일 것이다. 


 



7. 마치며


영화 ‘아바타’는 3부작으로 계획되어 있다고 하며, 영화는 나비족이 된 제이크가 눈을 뜨는 장면으로 마치는데, 특히 진짜 나비족이 된 제이크의 삶이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 지 궁금함을 느끼게 된다. 이번에는 나비족의 승리로 전투가 끝나고 지구인들은 쫓겨가게 되었지만, 그들이 원하는 자원이 남아있는 한, 아마도 더욱 강력한 군대로 무장하고 돌아올 가능성이 크다. 외계인의 몸을 택한 제이크와 달리, 디스트릭트9의 비커스는 결국 본인의 의사와 달리 점점더 외계인으로 탈바꿈하고, 외계인 구역으로 잠적하는데, 떠나간 외계인 지도자가 와서 다시 DNA를 변형시켜 줄 것을 기다린다.  두 작품 다 속편을 기대하게 만든다.


영화의 메시지는 결국, 우리 식으로 말하면 '역지사지(易地思之)'를 생각하게 하며, 영어표헌으로는 누군가의 입장이 되어 본다라는 표현 “put yourself in someone’s shoes”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적으로 말한다면, ‘네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 ‘네 몸과 같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보수 기독교의 또 다른 문제를 들라면, 개인적 죄의 문제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타인의 고통의 문제, 화해와 평화의 문제를 도외시 하고 있다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는 기독교를 지극히 '개인화' 시키고, 사회적 이슈에 있어서는 예수의 가르침이 아닌, 자본주의와 국가주의를 따르고 있기 때문이리라.


최근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한 사이코 패스에 대한 관심이 유행한 적이 있는데, 누구나 자기 자신의 시각에만 같혀 있고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능력이 없다면, 정도는 다르지만 사이코패스 같은 무자비한 가해자의 위치에 설 수 있다. 그것이 개인을 넘어 인종적, 국가적 단위로 확대된다면, 그 폭력과 악행은 역사를 피로 물들인다. 


성경을 정복사관으로 왜곡한 서구의 역사는 이러한 피의 역사에 심각한 책임이 있으며, 결과적으로, 극단화된 미국식 자본주의와 군사주의는 21세기에도 야만의 얼굴을 드리우고 있다. 힘을 가진자가 피해자의 시각을 배우지 못한다면, 피의 역사 반복 될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 미래를 선택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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