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엽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2003): 혼자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의 먹먹함, 그리고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

 

 

2010년 12월 이인엽

 

 

 

 

잔잔하면서 슬픔이 느껴지는 OST 한 곡을 들으며 영화이야기를 해보자. 

 

 

1. 줄거리 (스포일러 있음)

 

도박장에서 알바를 하는 평범한 대학생 츠네오는, 여자관계도 자유분방하고, 복잡한건 생각하지 않는 쿨한 청년이다. 도박장 손님들의 대화속에서, 유모차에 무언가를 몰래 싣고 다니는 수상한 동네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궁금해 하는데, 길에서 우연히 그 할머니가 놓친 유모차를 들여다 보게 된다. 그 안에는 장애로 걷지 못하는 손녀 쿠미코가 타고 있었다.

 

이날 쿠미코의 집에서 얻어먹은 계란말이의 맛에 반한 츠네오는 그녀의 집을 계속 찾게 되고, 유모차에 숨어서 산책을 하고, 남이 읽다 버린 책들을 통해 세상을 보는 특이한 쿠미코에게 호기심을 갖게 된다. 그녀는 걷지 못하는 장애인이지만, 나름의 자존심과 성격이 있는 독특한 여성이었다. 쿠미코는 프랑소와즈 사강의 연작소설에 빠져 있는데, 자기를 소설의 주인공인 '조제'라고 불러달라고 한다.

 

복지과에 부탁해 장애인이 살기 좋은 형태로 집을 개조해 주는 등, 츠네오는 조제를 위해 애를 써보지만, 조제가 상처받을 것을 걱정하는 할머니는 츠네오에게 더이상 찾아오지 말라고 한다. 인생과 사람을 알고 현실을 아는 할머니는 조제를 걱정하는 것이다. “조제는 깨진 그릇이야...깨진 그릇은 겸손해야지돼....”라고 하며. 애써 조제를 잊어보려던 츠네오는 조제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혼자된 그녀를 찾아가는데, 그날 두 사람은 사랑을 나누고 함께 살기 시작한다. 조제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가보고 싶었던 동물원에 가서 츠네오와 함께 바로 눈 앞에서 호랑이를 본다.

 

츠네오는 집안 제사에 그녀를 데려가 가족들에게 소개하려고 했었는데, 그날이 다가오자, 대신 그녀와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조제가 보고싶어 했던 수족관은 휴관일이고 물고기를 보지 못한 두 사람은 바닷가에서 사진을 찍는다. 그 과정에서 약간의 삐걱거림도 있고, 츠네오는 그녀를 업고 다니는 것이 힘들다는 말도 하는데...

 

바다속을 테마로 한 모텔에서 함께 사랑을 나누고, 조제는,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언젠가 당신이 떠나고 나면 나는 미아가 된 조개껍데기처럼 혼자서 바다밑을 떠다니겠지. 하지만 그것도 괜찮아.”

 

결국 츠네오는 몇 달 후 그녀를 떠난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자기가 그냥 도망쳤다고 하면서... 그리고는 예전 여자친구에게로 돌아가 함께 길을 걷던 중, 조제를 생각하고 길에서 울음을 터뜨리고 주저 앉는다. 죄책감과 슬픔이 섞인 울음. 

 

조제는 이제 복지과에서 준 전동 휠체어를 타고 다니며 장을 보고 혼자 음식을 해 먹는다. 예전처럼 음식을 하기위해 올라간 보조 계단에서 다이빙하듯이 뛰어내리고… 츠네오가 떠나갔음에도 조제의 일상은 계속된다. 

 

 

 

 

 

2.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

 

영화를 보고 무척 마음이 착잡(복잡?)했다. 아내와 같이 보았는데, 한동안 멍하게 있다가 갑자기 눈물이 나와서 민망하게 방석으로 얼굴을 가리고 한참동안 울었다. 영화보고 이렇게 울어본 것도 오랫만이다.

 

두 사람이 친밀감과 정을 쌓아가며 사랑에 빠지고 추억을 만들며 앞으로도 함께 하리라 생각을 했는데, 츠네오가 견디지 못하고 조제를 떠났다는 것이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장애인과 함께 평생을 함께 한다는 것이 자신이 없었겠지. 그래도 사랑하고 추억을 함께 만들었는데. 어떻게…?

 

바닷속을 형상화 한 모텔에서, 조제의 대사를 잊을 수 없는데, 자기는 깊고 깊은 바다속에서 왔고, 츠네오가 언젠가 자기를 떠나면 자신은 원래 왔던 곳, 침묵과 고독만이 감도는 바다속으로 돌아간다고. 장애인으로 살아온 조제는 자신이 남들과 같은 평범한 사랑을 평생 이어가는게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가버릴 수 있다는 것을 예상하는 듯 하다. 

“언젠가 당신이 떠나고 나면, 나는 미아가 된 조개껍데기처럼 혼자서 바다밑을 떠다니겠지. 하지만 그것도 괜찮아…”

 

혹자는 츠네오의 감정은 사랑이 아닌, 뭔가 독특한 조제에 대한 호기심과 동정심 뿐이었고 조제의 예쁜 얼굴에 단순히 끌렸던 것이라고, 그래서 떠난것이라고 해석 하기도 했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이야기지만 영화의 흐름을 볼 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영화속에서 츠네오의 갈등과 회한이 중요한 장면으로 그려지기에. 

 

그녀에 대한 신비감과 호기심, 그리고 힘든 그녀를 돕고 싶은 동정심도 있었겠지만, 츠네오는 그녀에 대한 사랑이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를 자기 가족들에게 데려가 소개시키려고도 했었고, 그녀와 헤어지고나서 길을 걸어가다 북받치는 울음에 주저 않기도 한 것이다.

 

결국, 사랑이 없어서라기 보다는, 사랑이 있었지만, 그녀의 약점을 평생 짊어질 자신이 없어지고, 현실에 지쳐갔기 때문이리라. 영화속에선 조제의 신체 장애가 부각 되었지만 우리 모두에게는 각각의 약점과 신체적 혹은 인격적 장애가 있다. 사랑을 하더라도 힘든 것이다. 상대방의 약점을 받아주고 그걸 평생 함께 지고 산다는 것은. 어쩌면 츠네오는 진지했기 때문에, 솔직한 선택을 내렸을 수도 있다. 제사에 오지 않는 츠네오에게 동생이 웃으며 날카로운 질문을 한다. “지쳤어?”

 

츠네오는 성격 좋은 남자이다. 장애인인 조제와 함께 다니고 사귀는 것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을 정도로. 자신의 말처럼 복잡한것은 생각하기 싫어하고 자유분방한. 이에 비해, 조제와 함께 고아원에 있다가 함께 도망쳐 나와서, 조제에게 억지로 입양된(?) 아들은, 조제를 볼 때마다 거칠게 욕을 하고 화를 내지만, 조제가 시키는 일을 거절 못하고 돕는다. 결국 조제에게 남은 것은 츠네오가 아니라 입양된 아들이다. 사랑의 시작은 감정의 끌림이지만, 사랑을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결단과 헌신이, 그리고 꾸준함과 신실함이 필요한 것이다. 

 

세상에 나가기를 두려워 하던 조제는, 츠네오가 찾아오자 보고싶었던 호랑이도 보고 물고기가 있는 수족관에도 찾아간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호랑이와 물고기. 호랑이는 조제가 두려워 한 세상, 혹은 세상의 시선일수도 있다. 그녀를 도와주고 지켜주는 츠네오의 존재는 이제 그녀가 세상에 나가 그 시선을 대면할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호랑이를 같이 보러갔지만, 물고기는 보지 못한다. 수족관은 닫혀 있고, 그녀와 함께 들어간 모텔에서 츠네오는 조제의 이야기를 듣다 잠이 들고 만다. 사실 그것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조제의 독백이었는데 말이다. 어쩌면 이미 헤어짐을 향해 가고 있는 츠네오는 조제의 솔직한 독백을 견디기 힘들어 애써 잠든 척 했을 지도 모른다. 

 

물고기는 조제 자신의 내면, 침묵과 외로움의 삶을 상징할 수도 있겠다. 츠네오는 그녀를 도와 줄 순 있었지만, 그녀의 내면을 이해하고, 그녀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지는 못했던 것일까?

 

자신의 관점으로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상대에게 부어주는 사랑은 어쩌면 쉬울 수 있다. 반면, 상대의 내면과 관점을 이해하고 존중해주며 그 사람과 같은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것은 훨씬 어려운 사랑이 아닌가 싶다. 이 부분은 역시 장애인과의 사랑을 다뤘던, 영화 ‘작은 신의 아이들’을 보고서도 많이 느꼈던 부분이기도 하다.

 

 

 

 

 

3. 혼자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의 먹먹함 

 

약간의 암시를 주긴 하지만, 사랑이 식어가는 과정을 자세히 그리지는 않는다. 둘은 쿨하게 헤어지고, 그녀에게서 도망쳐 나오는 츠네오는 예전 여자친구에게 돌아가 함께 길을 걷다가, 순간 조제에 대한 죄책감과 그리움이 얽힌 눈물을 흘리며 주저않는다. 하지만, 그녀에게 다시 돌아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 친구로서도 만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혼자 남겨진 조제는 이제 츠네오 없이 전동 휠체어를 타고 장을 보고, 혼자 음식을 해 먹으며 꿋꿋이 살아간다.  

 

함께 영화를 본 아내는, 예전에 할머니와 츠네오가 있을 때는 생선 한마리를 굽다가, 이제 조제가 작은 생선 조각 하나를 구워서 식사를 준비하는 마지막 장면이 홀로 남겨졌음을 잘 보여주는 상징으로 다가왔다고 한다.

(사족이지만, 일본의 사회복지제도가 간접적으로 나타나는데, 장애인이 존엄성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시스템이 우리나라 보다는 훨씬 잘 되어 있다는 인상도 들었다.)

 

모텔에서의 독백을 들어보면, 조제는 츠네오가 떠날 수 있다는걸 예견한 듯 싶다. 장애를 가지고 홀로 살아오고, 버림받고 이별하는 것에 익숙해져서일까? 하지만, 언제까지나 떠나지 않겠다고, 함께 하겠다고 했었는데... 조제가 다시 혼자 남겨질 것을 알면서도, 어떻게 그렇게 떠날 수 있었을까?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간 자리에 홀로 남겨진 조제의 삶은 다시 예전의 침묵과 고독의 바다이다. 물론 그녀는 꿋꿋하고 다시 담담히 자신의 삶을 살아가지만, 그 사랑이 떠난 빈 자리는 너무나 크다.

 

조제가 장애인이라는 것을 빼고 보면, 어떻게 보면 쿨한 한편의 연애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다. 감독도 연민이나 동정의 감정에 빠지지 않으려고 했던 것 같고. 그러나, 조제가 혼자서 많은 것을 할 수 없고, 밖을 나다닐 수도 없는 장애인이라는 설정은, 사랑이 찾아오기 전의 침묵과 고독, 그리고 사랑하던 순간의 친밀감과 따스함을 극명하게 대비시켜 주고, 다시 이별 후 혼자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의 먹먹한 의미를 더 부각시킨다. 

 

이제 두 사람에게 사랑의 순간은, 흐린 사진과 같은 아스라한 기억으로만 남는다…

 

 

 

 

사랑은 감정에 충실한 것이기도 하지만, 서로에 대한 약속을 지키는 것.

상대를 도우면서 느끼는 자기 만족도 있겠지만,

그 사람의 관점과 내면을 이해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

 

상대에게 내가 필요하다고 내가 생각하는 순간 뿐 아니라,

상대가 나를 필요로 하는 그 순간에 그 옆에 있어주는 것...

 

나와 아내가 아끼고 좋아했던 후배 커플이 있었는데, 힘든 시간을 함께 하며 7년을 사귀다가, 형편이 갑자기 좋아진 쪽이 상대를 떠났다. 많이 안타깝고 화도 나고 했는데, 사랑을 떠나서, '정'과 '의리'를 생각해서라도,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정말 마음이 안좋았다. 한때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 내가 떠난 후, 홀로 버림받고 적막과 어둠에서 눈물흘릴 걸 생각한다면. 조제가 말한대로 미아가 된 조개껍데기 처럼, 침묵의 바다속에서 살아있으나 살아있는 것 같지 않은 모습으로 떠다닐 것을 생각한다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영화에서 처럼, 상대를 버리고 떠나는 것 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는 사랑을 하면서, 순간순간 상대를 놓아 버리고, 홀로 있게 한다. 우리가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삶을 살면서, 상대를 잊어 버릴때, 그리고 상대에게 진실하지 못한 삶을 살면서, 상대에게서 도망치려고 할 때, 그 순간이 잠시 일지라도, 상대방은 홀로 남겨져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런 것 같다. '항상 기뻐하고 쉬지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지만,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에 신실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그분을 잊거나, 그분에게 진실하지 못한 삶을 살지 말라는 것이 아닐까? 순간순간 하나님을 잊고 내 중심적으로 살고, 그분이 싫어하시는 길을 따라 살며 그분에게서 도망치려고 하는 나의 모습이, 바로 사랑에 진실하지 못한 순간을 보여주는것 같다.

 

내가 나일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 충실하고 진실할 때, 그리고 사랑하는 내 아내에게 충실하고 진실 할때, 그리고 내 자신에게 충실하고 진실 할때이다. 그렇지 못하면, 나는 나를 잃어버리고, 삶에서 도피하고 죄책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영화를 보고, 순간순간, 나의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모습들이 떠올라, 아내에게 미안함을 많이 느꼈던 것 같다. 한순간 한순간 나의 사랑에 충실하고 진실하고 싶다.

 

“언젠간 그를 사랑하지 않는 날이 올 거야.” 베르나르는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겠지. 우린 또다시 고독해지고…

모든 게 다 그래. 그냥 흘러간 1년의 세월이 있을 뿐이지.”

“네, 알아요.” 조제가 말했다.

 

- 프랑소와즈 사강 <1년 뒤> 중에서

 

“츠네오가 언제 조제를 떠날 지 그녀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가 곁에 있는 동안 그녀는 행복하고, 또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조제가 행복을 생각할 때 그것은 그녀에게 죽음과 같은 말처럼 느껴진다.

완벽한 행복이란 죽음 그 자체와 같다.”

 

- 타나베 세이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중에서

 

 

4. 오래도록 기억남을 영화

 

몇편의 일본 멜로 영화를 보고서는, 약간 다 비슷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러브레터,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다만 널 사랑하고 있어, 무지개 여신' 등등, 아름답고 순수한 짝사랑의 추억, 한쪽이 죽거나 떠난 후에, 상대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게되고 감동하고, 그 사랑을 되새기며 살아간다는 식의 내용이, 거의 러브레터의 구조를 반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이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사랑을 지나치게 이상화하거나, 낭만적으로 보지 않으면서, 현실을 담담하게 보여준다는 차원에서, 기존의 영화들과 상당한 차별성이 있었던것 같다. 그만큼 마음에 울림도 컸고, 이 영화를 인상깊게 봤다는 사람들도 정말 많은것 같다.

 

주인공 조제를 연기한 여배우 이케와키 지즈루의 독특한 매력도 인상적이고 ‘금발의 초원’ 같은 이누도 잇신 감독의 다른 작품들도 볼만했다. 원작인 단편소설에서는 츠네오가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고 조제와 동거하는 것으로 끝난다고 한다. 

 

소문을 듣고 늦게 봤지만, 정말 오래도록 기억남을 영화중의 하나이다. 못 보신 분들에게 정말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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