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엽

유학생활 이야기1: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 - 무관심과 통제

 

이인엽

 

 

 

미국에서 석사과정을 했던 처음 2년간은, 내 인생에서 상당히 특별한 기간중 하나였다. 특히 타국에 나와서 혼자 유학생으로 생활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여러사람에게 도움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 전까지 한국에서 살면서는남한테 크게 아쉬울 일 없이 살다가, 서른이 넘어 미국 생활을 시작하면서, 모르는것도 많았고, 차도 없었고, 혼자 음식 해먹기도 쉽지 않았기에, 마치 다시 어린애가 되어서 주변의 도움 없이는 생존이 어렵고, 누군가에게 모든 걸 새로 배우고 도움을 청해야 하는 느낌이었다. 

그러다 보니, 고마운 기억도 참 많고, 동시에 안 좋은 기억도 꽤 있다.

 

 

유학와서 서러움 안겪고, 고생 안한 사람 어디 있겠냐 마는, 때로는 차가 없어 먼 길을 걸어 다니고, 음식도 제대로 잘 못챙겨 먹어서 소화불량이 생기고, 종종 서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불확실한 미래와 현실에 대한 답답함으로 괴로운 상황이라모든 면에서 스스로 민감하기도 했고, 남에게 손을 벌려야 하는 상황을 견디기가 더 힘들었던 것 같다그런 와중에, 철저하게 배운 것은, 누군가를 돕는다는게 상당히 어려운 일이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도움을 받는 처지에 선 사람의 마음이 어떤건지도 좀 배웠다.

 

1. 조작과 통제

 

특히 도움을 받으면서도 마음이 상하거나 분노가 느껴질 때도 있었다. 도와주는 사람이 너무 생색을 내거나 귀찮아 하며 자존심을 건드리거나,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을 강요하는 때였다. 도움을 받는 처지라면, 구체적인 선호가 있어도 굳이 얘기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 상대가, "도움 받는 처지에 뭐 그리 말이 많냐, 잘 알지도 못하면서 시키는 대로 해라", 뭐 이런식이라면 더욱 그렇다.

 

순수하지 못한 도움은 너무나 금방 티가 난다. 조건이 붙고, 자신의 방식을 강요하고, 상대에게 자꾸 영향을 미치려고 하고, 상대를 대상화 하여, 도움 받는 사람과 주는 사람 사이에 일종의 불평등한 권력관계가 나타나는 것특히 열등감이나 비교의식이 강하고,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일 수록 이런 경향이 더 강하다. 열심히 남을 돕는이들 중에서도, 상대의 만족이 아니라, 자기 만족과 우월감을 느끼려고 저러나 싶은 이도 있다. 

 

안타깝게도 이런 방식의 도움은 정말로 안하느니 못하다상대가 스스로 고마워 해야 하는데, 자기가 그걸 끌어내려다 보니, 이미 한것 마저 깎아 먹고도움은 주고 사람은 잃어버리는 결과가 흔하다. 물론, 이는 특별히 의도했다기 보다는, 그 사람의 인격적 한계와, 자기를 내세우고 상대방을 조정하려는 본능이 감출수 없이 드러난 것이다. 

미국에는 차 없이 다닐 수 없는 곳이 많고, 그럴 때는 누군가에게 라이드를 부탁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종종 라이드를 받고 나서, 차라리 ‘몇시간을 걸으면 걸었지, 이제 그 사람 차는 정말 다시는 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드는 사람이 있다. 반면에 라이드를 받으면서 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들고 더 친해지는 사람이 있었다. 같은 일을 해도, 그 사람의 태도에 따라 완전히 다른 기분을 느끼는 것이다

 

정말 오래도록 남는 고마운 기억들은, 상대가 굳이 도움을 준다고 생각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그리고 특별히 틀리지 않는 다면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도와줄 때, 무엇보다 자존심을 해치지 않고 도와줄 때 였다. 이런 도움은 정말 오래도록 고마움으로 남는다. 그 사람이 대가를 바라지 않았을 지라도, 도움 받은 사람은 절대 잊을 수 없고, 또 언젠가 꼭 보답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남는 것이다. 특별히, 내가 섬겼던 나들목 워싱턴 교회 형제 자매들에게는 이런 마음이 정말 많았다. 교회 공동체가 없었다면 그 시절을 어떻게 버텨냈을 까 싶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특히 크리스챤들도 때론 왜곡된 방식으로 사람을 도우면서 좋은 일 한다고 착각을 한다. 예전에 다니던 교회에서 정신박약아 시설에 방문한 적이 있었다. 같이 간 후배중에 얼굴이 좀 특이 하게 생긴(?) 친구가 있었는데, 다른 교회에서 온 사람들이 이 친구가 장애인인줄 알고 다가와서 말을 걸고 해서, 이 친구가 나중에 무척 괴로워(?) 했던 일이 있었다. 상당히 웃긴 에피소드이긴 하지만, 어쩌면 우리의 심리를 잘 보여주는 것 같다. , 내가 누군가를 도와주는건 할 수 있지만, 도움받는 상대와 '같게 되는 건' 싫다는 것이다. 그 사람을 위에서 내려다 보고 시혜적으로 도움을 베풀 순 있지만, 그 사람과 같은 처지가 되고 동등하게 되기는 싫은 것. 그러나 성경에서 예수님은 우리 곁에 내려와서 동등한 인간이 되셨고 우리의 친구가 되셨다. 우리가 겪는 아픔과 고통을 함께 하실 뿐 아니라, 우리의 죄의 대가까지 대신 지셨다. 자기가 가진 걸 약간 떼어 주며 생생내는 식의 도움이 아니라, 그 사람을 형제로 대우하고, 그 사람의 인간됨과 존엄성을 회복시켜 주는 것이 예수님 사역이었다는 것이다.

 

다른 예로 전도의 방식을 들 수 있다. 많은 크리스챤들이 몇가지 도움을 주면서 자꾸 사람을 전도하려고 한다. 복음주의 크리스챤으로 전도가 중요하다는 것은 충분히 공감하지만, 구제나 봉사를 전도의 지렛대로 사용하는 것은 옳지도 않고 효과적이지도 못하다. 앞에서 말한, 도움받는 입장에서, 자존심이 상하고 분노 했던 기억들을 떠올려 보면, 조금 도와주면서 교회 나오라고 하는 얘기가,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그 사람의 영혼을 생각하고 순수하게 복음을 전한다 할 지 모르지만, 도움을 주면서 조건을 내걸면, 그것은 이미 권력 관계요 사람을 조작하는 것으로 전락한다.

 

예전에 다일공동체 최일도 목사님의 설교에서 나온 이야기인데, 하루는 어느 교회에서 여자 집사님들이 봉사를 나와서 노숙자 분들에게 배식을 하는데, 그중에 어느 여집사님이 한 노숙자분에게, 이렇게 교회에서 음식도 주고 하는데, 꼭 예수 믿고 교회를 나오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자 노숙자가 화를 내며, 이거 조금 도와주면서 뭘 교회를 오라 마라 하냐고 시비가 붙었다. 그런데 최일도 목사님이 그 여자 집사님이 잘못하신 것 같다고 이야기 했다는 것이다. 진정한 섬김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이해가 간다.

 

유학생들에게는 초기 정착 (집구하고 차사고 운전면허 따고 등등)이 제일 도움이 많이 필요한 시기라, 많은 교회에서 정착을 돕는 사역을 한다. 이것은 참 귀한 일이고, 이런 도움을 통해 안 믿는 사람이 교회에 나오고 예수님을 알게 되는 일도 많다. 그런데정말 안좋은 모습은, 역시 이런 도움을 빌미로 사람을 교회에 나오라고 압박하는 일이다. 크리스챤이 아닌 한 친구는 이런 식으로 도움을 받았는데, 그 교회에서 자꾸 교회 나오라고 압박을 해서 완전 질렸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어떤 교회는 이런 식으로 처음에 도움을 주고는, 자기 교회를 안 나오거나, 나오다가 떠나면, 우리가 그렇게 도와줬는데 은혜를 모른다는 식으로 뒤에서 엄청 뒷담화를 해서, 안나올 수 없도록 하거나, 거의 그 지역에서 매장을 시켜서, 사람들이 무서워서 나온다는 말도 있다. 말이 좀 심한지 모르겠지만, 이게 도대체 무슨 미친 짓인가? 교회가 이런 역겨운 모습을 보인다는 것을 정말 견디기 힘들다. 대체 예수님을 따른다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사람을 조작하고 왜곡된 방법을 쓰는지.

 

일반화 하긴 어렵지만, 우리 개신교인들은 많은 경우 이렇게 조금 사람들을 도우면서 생색을 내고, 또 이걸 자꾸 전도를 위한 도구로 이용해서, 좋은 일을 하고서도 욕을 먹는 경우가 많다. 반면에 천주교는 일반적으로 조용하고 꾸준하게 섬김과 봉사를 많이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같은 성경을 읽는데 왜 이렇게 다른 모습이 나올까? 개신교인들안에 복음에 대한 왜곡된 이해가 있다. 예수믿고 구원받는 것이 곧 죽어서 가는 천국행 티켓을 얻는 것이라고 단순하게 이해하기 때문에, 인격의 변화, 성숙, 사랑과 섬김 자체를 경시하고, 모든 것을 개인 전도로, 천국가냐 지옥가냐는 문제로 환원시키고 단순화한다.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라는 것 자체가 예수님의 가르침인데, 자꾸 그것을 전도를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것을 보면 정말 안타깝다도울 때는 순수하게 도와야 한다. 나는 상대를 위해서 한다고 하지만, 상대가 그걸 조건이자 조작으로 느끼는 순간, 순수함은 사라진다.

 

 

다시 예수님의 삶을 생각해 보면 이런 식의 조작적 행동을 하는 것이 얼마나 비성경적인지 알게 된다. 예수님이 누굴 도우며 대가를 요구하거나, 그 사람을 조작하려고 하신 일이 있었던가? 전능하신 하나님도 우리를 강제로 움직이거나 압박하지 않으시는데, 왜 우리는 그 사람의 의사를 존중하지 않고 강압적인 방식을 쓰려고 할까? 진정한 복음 전도가 무력이나 강제에 의해 이루어 진 적이 역사상 한번이라도 있었는가?

예수님이 사람들과 대화하신 것을 보면, 가장 낮고 천한 사람들까지도 지극히 인격적으로 대우하시며, 많은 경우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보는 것'으로 대화를 시작하셨다. 38년된 병자가 원하는 것이 '병 고침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예수님은그 사람의 의사를 물어보시며, 그것을 통해 그 사람의 인간 존엄성과 삶에 믿음의 의지를 끌어내신 것이다. 또한 예수님은 사람마다 독특한 방식으로 접근하시고, 그 사람의 문제를 정확히 짚어 내어 다가가셨다. 영어로 쿠키커팅 하듯이 (같은 틀로 똑같은 모양의 쿠키를 찍어낸다는 표현) 사람을 대량생산하거나, 일이나 대상으로 본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을 독특한 인간으로 대우하시고, 존중하셨다. 많은 교회나 단체에서 기업과 같이 프로그램을 돌려 공장식으로 사람을 양육하는 일은, 예수님의 방법이 아닐 수 있고 부작용이 따른다. 또한 예수님이 병 고침과 기적을 한번이라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신 적  예를 들어, 적극적으로 홍보를 해서 사람을 모으는 등  이 있었나? 오히려 많은 경우 병 고침이 사람들에게 알려질 것을 꺼려하셨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도우는 것 자체가 목표셨지, 그걸 통해 무엇을 추구 하신 적이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대단하고 숭고한 목표일 지라도 말이다.

 

왜 크리스챤들은 이런 모습을 배우지 못할까? 예수쟁이가 되기 전에 먼저 인간이 되어야 하는데, 이런 예수님의 삶과 인격을 배우는 것과 성숙의 과정을 전면 무시하면서, 자신이 신앙인이라고 내세우는 모습들이 많아서, 기독교에 대한 혐오감을 자아내고, 예수님의 이름을 땅에 떨어뜨린다.

 

어쨌거나, 이렇게 도움 받는 사람의 위치에 서보지 않았더라면, 나도 그 심정을 이해하지 못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이제는 결혼하고 차도 사고, 많이 안정된 지금, 예전의 시간들을 생각하며, 같은 유학생들을 많이 섬기려고 하는데, 라이드를 주고, 이런 저런 도움을 주려고 할 때, 항상 내가 겪었던 일들을 생각해 보게 되고, 상대의 의사와 자존심을 존중해주려고 신경을 쓰게 된다. 어떻게 보면, 내가 자존심 상했던 일들이 나에게 어느 정도 교훈이 되었다. 

 

2. 무관심

 

이렇게 상대를 조작하고 통제하려는 안좋은 형태의 도움이 있는 반면, 지극한 무관심에 실망한 기억도 있는 것 같다. 아무래도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 되면, 주변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게 된다. 물리적인 거리가 마음의 거리와 늘 비례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어려움에 처하면 일단 주변을 둘러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물리적으로 아주 가까이 있는 사람이, 나에게 지나치게 무관심하다면? 내 어려운 상황을 바로 옆에서 볼 수 밖에 없는 사람이 그에 대해 관심조차 없다면실망이 더 크고그 사람이 평소에 말하는 사랑이나 이상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아무리 좋은 이상을 가지고 바른 생각을 가지고 산다고 해도, 그리고 내가 엄청나게 중요한 일로 무척 바쁘다고 해도 (소위 말해 세상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더라도), 내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이 아픈지, 배고픈지, 힘든지, 슬픈지, 외로운지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다면, 과연 내가 말하는 이상은 무엇이고, 내가 지금 몰두하는 중요한 일은 무슨 가치가 있을까? 예수님은 언제나 바쁘셨고, 압박과 핍박, 스트레스를 받으셨으며, 자신의 죽음을 통한 십자가라는 엄청난 일을 앞두셨을 때에도, 자기가 만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관심과 정성을 다 하셨다. 그분이 가진 비전은, 주변에 있는 한 사람을 무시한 어떤 막연하고 추상적인 비전이 아니었다. 나를 포함한 많은 크리스챤들이 오늘 내 주위의 한 사람을 무시한채, 세상을 변화시킬, 뭔가 대단한 일을 꿈꾸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런 경험을 하다 보니, 한편으론 내가 얼마나 사람에게 무관심한 인간이었는가를, 돌아 보게 되었다. 항상 내 생각에 빠져있고, 내가 옳다고 믿는 바를 위해 달려왔지만, 특별히 도움을 구하지 않았을 때, 주변 사람들에게 별로 신경쓰지 않고, 알아서 잘 하겠지 하고 살아온 내 모습. 누군가 도움을 청했다면 나는 물론 도와주었을 것 같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많은 사람에게는 도움을 청하는 것 조차 어려운 일이요, 관심을 별로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부탁하기는 더 어려운 일인 것이다. 내 주변의 사람들의 상황에 내가 조금만 민감하게 관심 갖고 물어보고 다가갔다면, 쉽게 알수 있는 상황들을, 민감하지 못함으로 알아채지 못하고 넘어간 일이 많았던 것이다.

 

그러면서 문득 생각이 난 것이, 예전에 학부때 하숙하던 경험이었다. 3학년 1학기 까지 생활이 잘 잡히지 않고 많은 문제속에 살다가, 여름에 갔던 태국 단기선교에서 큰 은혜를 경험하고, 생활을 바꾸기 위해서, 선교단체 선후배들이 모여 사는 하숙집에 들어갔었다. 그때 같은 선교단체 소속이었지만 개인적으로 잘 모르던 한 후배와 같이 방을 쓰게 되었었는데, 그 후배는 예전의 나처럼 이런저런 고민도 많고 밤낮이 바뀌어서, 거의 매일 낮 12시까지 자곤 했다. 나는 내 생활을 바꾸려고 무진 애를 쓰던 때였고, 그 친구 모습이 꼭 예전의 나 같아서, 오히려 그 후배에게 더 거리를 두고 별로 터치를 안했던 것 같다. 생각해 보면, 내가 그만큼 여력이 없었기도 하지만, 나중에 생각할 수록 그 후배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같이 방을 쓰면서도 자기에 대해 별 신경도 안쓰는 나에 대해 속으로 얼마나 섭섭하게 생각했을 것인가?

 

감사하게도 나중에 다시 만났을 때, 그 후배는 공동체에서 은혜를 경험하고 아주 성숙한 형제가 되어 있었다. 미안함과 함께, 그나마 너무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생각해 보면, 많은 경우, 상대를 나이스하게 존중한다는 것이, 사실은 상대의 삶에 개입하지 않고 방치하는 행위일 수 있고, 나의 무관심과 사랑없음에 대한 변명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도운다는 명목으로 상대를 조작, 통제하고 자기의 방식을 강요하는 것이 한 극단이라면,  존중이라는 이름으로 무관심하고 상대를 방치하는 것이 다른 극단인 것 같다. 혼자 유학생활 했던 2년이라는 시간 동안, 많은 결핍속에 여러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 밖에 없었던 순간들을 통해, 하나님은 나의 자아를 깨시고, 또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배우게 하셨고, 누군가를 돕고 섬기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조심스러운 일인가를 배우게 하셨던 것 같다.

 

외적인 도움보다도 중요한 것은, 동등한 관계속에 그 사람의 자존감과 존엄성을 세워주는 일이요, 그 사람과 같은 위치에 서서 그의 형제와 가족이 되는 것 같다.

예수님을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수님이 어떤 태도로 사람을 대하셨는가를 깊이 고민할 필요가 있다. 교회에서 이런 부분에 무지해서, 욕을 먹는다. 예수를 너무 잘 믿어서가 아니라, 사실은 예수를 모르고, 예수를 제대로 따르지 않아서 욕을 먹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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