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엽

그게 나였어 - 정직한 나, 필요한 내가 되고 싶었어 (2011)

 

이인엽

 

 

 


서문탁이 락커라서 그런지 창법이 조금 부담스럽긴 하지만, 아낌없이 힘을 다해 노래하는 모습이 보기 좋고, 초반에 노래에 대해 생각을 나눈 짧은 인터뷰도 좋다. 

그런데 노래 보다도 더 인상적인 것은, 노래 중간 중간에 비춰지는 사람들의 얼굴들이다. 특히 나이드신 남자 분들이 지긋이 눈을 감고 가슴에 손을 얹거나, 울음까지 참지 못하면서 이 노래를 듣는 모습을 보면, 이 노래가 어떤 성가곡 못지 않게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것 같다. 

인간의 존엄성은, 도덕적 완벽성이 아니라, 자신의 잘못과 실수를 성찰하고, 더 나은 인간이 되려는 몸짓에서 찾아지는게 아닐까? 

이 노래와 연관해서, 하덕규의 가시나무라는 노래에 나왔던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라는 가사도 떠오른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내 안에 분명히 진실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동시에 솟아나는 욕망과 유혹, 

그리고 내 자신과 내가 믿는 가치,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배신하는 순간들은, 
내가 누구인지, 진짜 나의 모습은 어떤 것인지, 회의가 들게 만든다. 

‘잃어버린 나’라고 할까? 왜 내가 여기까지 왔는지. 그리고 순수하고 진실했던 내 모습으로 돌아갈 수는 있는지… 

현대 교회의 단순화된 복음은, 너무 손쉽게 모든 인간안에 있는 선한 의지,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는 마음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고 (신학적으로 말하면 ‘일반은총’), 복음을 받아 들인 사람에게도 선한 삶을 위한 치열한 투쟁 보다는, 일종의 면죄부를 주고, 심지어 더 뻔뻔하게 만드는건 아닌가 싶을때도 있다. 

때로는 신앙이 없는 사람들 안에서, 치열하게 자신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종종 보고, 오히려 종교인들 보다 더 낫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어느 잡지에서 평생동안 남을 위해 희생적인 삶을 살아온 분의 인터뷰를 읽었다. 그분이 누구였는지 인터뷰의 다른 내용이 뭐였는지 전혀 기억이 안나지만, 하나 잊을 수 없는 대답이 있다. 혹시 살면서 안 좋은 유혹이 올 때는 없는지, 그리고 그럴 땐 어떻게 하는지 질문을 던지자, 그분은 그럴 때는 ‘사람을 생각한다’라고 대답했다. 자기를 믿어주고 사랑해주는 사람,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계속 생각하며 그런 유혹을 이겨 낸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자기에게 진실할 수 있는 힘을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정말 소중하다. 얼마전 개인적으로 영적인 부모님 같은 목사님 부부의 퇴임식을 위해 짧은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은 적이 있었다. 내 자신은 그때 별로 상태가 좋지 않았는데, 그 글을 쓰기 위해, 그분들께 받았던 귀한 사랑과, 함께 했던 소중한 순간들을 떠올리면서, 내 모습이 회복되는 것을 느꼈다. 

예전에 어떤 영화에서 본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한 남자와 사랑에 빠져 행복한 시간을 보내던 여자가 있었는데, 피치 못할 사정으로 그 남자는 여자를 떠나게 되고, 외로움과 슬픔속에 그녀는 자신을 내팽개친채, 방탕한 생활을 하며 여러 남자들을 전전한다. 그러자 순수했던 그 여자의 모습과 태도마저 바뀌어 버리고, 딴 사람이 되어 버린다. 그러던 어느날, 사랑했던 그 남자가 돌아와 재회하게 되는데, 닳고 닳은 것 처럼 보였던 그 여자는,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이야기를 하는 순간 만큼은,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는 것이었다. 영화긴 했지만 그 장면이 참 인상적으로 다가왔었다. 

예전에 정말 힘들었던 어떤 순간, 오랜만에 옛 친구를 만나 대화 하면서, 
그 친구의 ‘기억속에 존재하는 진실했던 나의 모습’을 발견 했던 신기한 경험이 있었다. 아, 내가 그런 사람이었지? 그리고 나를 그렇게 기억해 주는 친구가 있구나... 이 생각을 하며, 다시 한번 삶을 마주할 용기를 냈었다. 그래서 인격은 인격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말도 있는걸까? 나만 홀로 있는 곳에는 나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을 믿는 나지만, 계속되는 실패와 부끄러운 모습에, 때론 하나님이 나에게 질릴대로 질리셔서, 이제 꼴보기도 싫으신건 아니실까 하는 생각이 들때도 있다. 영영 나를 버리진 않으실까, 아니면 나의 한심한 모습들이 영영 바뀌지 않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

하나님은 나를, 우리를 어떻게 기억하실까? 그분은 우리의 모습을 모두 다 알고 계시지만, 특별히 가장 빛나던 모습, 가장 진실하고 충만하던 모습으로 우리를 기억하시고, 우리를 항상 참고 기대하고 기다리시는게 아닌가 생각 해본다. 하나님이 우리를 처음 가장 아름답게 창조하셨던 그 모습, 그리고 마지막날에 그분의 형상대로 온전케하실 그 미래의 모습으로 말이다. 

때로는 우리를 징계하던 무서운 아버지나, 선생님의 모습으로 하나님을 생각하기 쉽지만, 정직하고 진실하게 나아갔을 때,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는 엄격하지만, 나 자신에 대해서는 변함없는 신뢰와 용서로 다가오셨다. 그렇기에 그분을 만날 때 우리는 다시 용기를 얻고 새로운 소망을 얻는다. 
“아들아 사랑한다. 그것이 너를 향한 나의 믿음이라. 이 세상 홀로 있는 바로 그곳에서 너와 함께 거하리라...” 이런 찬양가사도 떠오른다. 

목회나 사역를 한다면, 세상 속에서 실패하고 좌절하는 사람들을 일으켜, 진실한 삶을 살 수 있는 끊임없는 용기를 주고, 세상의 메시지를 거슬러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서로를 북돋아 줄 수 있는 사랑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핵심이 아닐까? 

만일 누군가 정치를 한다면,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며 살 수 있는 사회, 양심을 팔고 서로 속이고 등쳐먹고, 남을 밟고 올라서지 않아도 되는, 그런 사회구조를 만드는게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영상에서 나오는 남자 분들의 눈물은, 오늘의 대한민국 사회가, 가사처럼 정직하고 남에게 필요한 사람으로 살고, 서로 나눠가며 살기에는 너무 혼탁하고 비인간적이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도 든다. 모든 선택은 개인의 책임과 사회적 책임이 함께 있는 것. 


우리 나라의 지도자들은 대부분 잘먹고 잘살게 해주겠다고 약속을 하고, 정의와 존엄성을 짓밟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일쑤였다. 가난을 극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직하고 인간적이며,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이 존중되는 사회가 너무나 절실한 요즘이다. 


이 시간 권력을 잡고 있는 자들에게서 그런 국민들의 고통에 대한 배려는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 이 나라의 비극이다. 내년에는 최소한 인간의 마음과 양심을 가진 지도자, 스스로도 양심과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할 뿐 아니라, 국민들의 존엄성을 지켜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그런 지도자가 뽑히길 소망해 본다. 

<그게 나였어>

 

“생각나니 별을 보던 너의 모습 생각
아름다운 마음이 오래 됐지만
그게 나였어 그게 나였어

어느날 부끄러웁겠지 그냥 살아온 인생
거짓과 위선속에 서로 속이며
정직한 나 필요한 내가 되고 싶었어
아름다운 날 만들기 위해

생각나니 지난 시절 잃어버린 사랑
나눠 갖던 마음이 오래 됐지만
그게 너였어 그게 너였어

어느날 부끄러웁겠지 그냥 살아온 인생
거짓과 위선속에 서로 속이며
정직한 나 필요한 내가 되고 싶었어
아름다운 날 만들기 위해

생각나니 지난 시절 잃어버린 사랑
나눠 갖던 마음이 오래됐지만
그게 나였어 그게 나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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