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엽

연애에 대한 단상11: 크리스챤과 연애, 두 번째 이야기

 

2007.08.22 이인엽 

 

 

 

 

오랫동안 생각해 오던 글을 이제야 쓰게 되었다.

이 글은 예전에 썼던 연애에 대한 단상5: 크리스챤과 연애에 짝을 이루는 글이다.

먼저 번 글에서 신앙의 이름으로 나타나는 왜곡된 형태에 대해 지적했다면,

이번 글에선 제대로 된 신앙과 주되심에 기초한 연애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다.

 

I. 배우자 선택에서 드러나는 그 사람의 진면목

 

크리스챤으로서 그 사람이 갖는 가치관과 우선순위는

그가 어떤 배우자를 선택하느냐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난다.

흔히 하는 얘기로, 하나님을 열심히 찾던 크리스챤의 상당수가

막상 결혼할 때 보면 남자는 여자의 외모를 보고,

여자는 남자의 능력을 보고 결정한다는 말을 한다.

물론 외모나 능력이 나쁜 것은 아니며, 연애와 결혼에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평소에 부르짖던 신앙적인 기준과 전혀 거리가 먼 사람을,

외적인 기준만으로 선택하는 경우가 많아서 문제라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이는 자신의 가치관을 배신하는 결정일 것이다.

 

만일 신앙과 비전이 그 사람에게 정말 중요한 부분이었다면,

그걸 공유하지 않는 사람과 인생을 함께 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결국 그 동안 해온 말과 달리, 실제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는 얘기.

 

교회에서는 비 기독인과 결혼하지 말라는 얘기를 많이 하고,

이 말은 언뜻 율법적으로 들리기도 한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를 어떤 법으로 얽매어서 통제하시는 분은 아니며,

그분의 섭리 또한 우리의 생각으로 제한 할 수 없다.

 

그러나 제대로 공동체를 섬겨보고, 한 사람을 전도하고 양육해 본 크리스챤이라면,

한 사람의 신앙과 가치관이 변화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 것이고,

그것이 공유되지 않는 사람과 결혼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 것이다.

그것은 비유하자면 두 사람이 줄로 연결된 채 언덕을 올라가는데,

한 사람은 위로 한 사람은 아래로 내려가는 형국일 것이다.

 

어떤 이들은 안 믿으면 전도하면 되지라고 쉽게 말 하지만,

한 사람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신앙인으로 자라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말 하는 사람은, 솔직히 한번도 제대로 전도를 안 해 본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또한 예수님을 믿고 안 믿고의 문제를 넘어서

그 사람이 예수님을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있느냐,

자기 인생의 우선순위와 목표가 하나님을 향하고 있느냐는, 또 다른 차원이다.

 

신앙생활은 종교를 갖는 문제도 아니며

인생의 중심을 자신에게서 하나님으로 재설정 하고,

인생의 방향과 우선순위를 재조정하는 문제인 것이다.

이러한 가치관과 재정 사용, 시간사용, 공동체를 섬기는 것 등등에서 합의가 없다면

결혼 생활 자체가 아주 힘들어 진다.

 

근본적으로는 이런 안타까운 선택을 보이는 것은,

크리스챤으로서 연애를 할 기본적 준비가

제대로 안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II. 언제 연애할 것인가?

 

대학생 때 활동하던 선교단체 내에서 이런 논의를 한 적이 있었다.

언제 이성교제를 할 것인가?

(대학생 선교단체에 있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는 상당히 중요한 이슈 중 하나이다)

여러 얘기가 오갔는데, 한 선배의 말이 참 기억에 남는다.

그 선배는 답은 이렇다.

 

크리스챤은, 그를 통해 한 영혼이 변화 될 때,

비로서 이성교제를 할 자격이 생긴다.’

 

그를 통해 한 영혼이 변화된 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먼저 그 사람 스스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며,

복음의 진리를 경험했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은혜와 복음이 그 사람에게만 머물러 있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서 열매를 맺는 다는 것을 말한다.

그가 한 사람을 사랑하되, 기분 내킬 때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요,

변화될 때까지 인내하면서 꾸준히 사랑하고 기다리는 것을 배웠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청년의 때에 목자의 삶과 열매를 경험해 보아야,

이성교제를 할 준비와 자격이 생긴다는 말이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1. 첫번째는, 신앙의 성장과 훈련에도 때가 있기 때문이다.

 

오해는 마시라, 중년이나 노년에 하나님을 만나 쓰임 받은 사람도 많다.

그러나 가치관과 인생의 길이 정해지는 청년의 때에 하나님을 깊이 만나느냐가,

그의 인생에 얼마나 중요한가는 더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주위를 보면, 이러한 과정을 경험하지 못하고,

바로 연애라는 두 사람만의 고립된 관계로 들어가

인격적, 신앙적 성숙을 경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준비되지 않은 연애는 성공하기도 힘들고,

청년기에 꼭 거쳐야 할 중요한 훈련의 시간을 앗아가게 할 수도 있다.

 

많은 청년들이 바쁘게 산다.

그러나 직장을 얻고 결혼을 하고 애 낳고 하면,

청년 때 보다 최소한 세배 이상 바빠진다고 보면 된다.

따라서 청년의 때에 거쳐야 할 성숙과 목자의 경험을 하지 못하면,

결혼 이후에는 언제 다시 그런 기회를 가질지 모른다.

연애는 참 좋은 것이지만, 모든 것에는 때가 있고

적절한 때가 아니면 독이 될 수도 있다.

 

2. 두번째는, 사랑하는 것에는 훈련과 준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은 처음 만나 스파크가 튀고 사랑에 빠지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사랑의 한 부분인 연애 감정이요, 그리 오래 지속되지도 않는다.

연애가 계속되면, 상대의 단점이 보이고, 서로의 인격과 모난 부분이 부딪혀가는

연애의 제2단계가 찾아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연애에 대한 단상8 : 달콤, 살벌한 연인]을 참고하시라)

이때가 되면, 사랑이 얼마나 어려운 것이며, 인내와 끈기가 필요한 지를 깨닫게 된다.

사랑의 감정에 빠지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한 사람을 이해하며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사랑하며 서로의 성장을 이뤄가는 것은,

참으로 에너지와 훈련이 필요한 일이다.

크리스챤에게는 예수님의 목자의 마음을 배우는 일이, 바로 이러한 훈련을 하는 과정이다.

이는 책이나 강의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강퍅한 한 사람을 붙들고 울며 기도해 보아야 알 수 있는 것이며,

자신의 한계와 빈 마음을 보고, 하나님 앞에 사랑을 구할 때 찾아나가는 것이다.

 

이런 훈련이 되어 있지 않으면, 연애의 어려운 순간이 찾아올 때에,

문제를 직면하지 않고 초기의 연애 감정에만 머무르려 하는 퇴행적 모습을 보이거나,

손쉽게 다른 사람을 만나는 무책임한 선택을 하기도 한다.

한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고 성숙되고 회복되어 가는 과정을 옆에서 돕고,

마침내 열매를 본 경험을 하는 사람은,

연애를 하면서도 힘들다고 포기하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신앙의 3대를 보고서야, 연애를 하겠다는 선언을 했다고 한다.

(즉 자신의 양이 양을 기르고 또 그 양이 열매를 맺을 때)

이런 귀한 믿음의 고백을 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어찌 인도하지 않으실까?

인생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그 어디서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

누군가를 진실하고 꾸준하게 사랑하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3. 세번째는, 연애 이전에 인간에 대한 이해가 선행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왜 나는 연애할 때 꼭 엉뚱한 사람을 찍어서 삽질만 할까라고 고민하는 남녀들이 꽤 있다.

이는 자기 자신을 모르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먼저 발견해야, 자신에 맞는 배우자를 찾을 수 있다.

자기 스스로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끼리 만나서,

상대를 이해하고, 인생을 설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신앙의 성숙은 하나님을 깊이 알아가는 것인 동시에

인간에 대한 이해가 고도로 깊어지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이 최고로 집중하신 문제도 결국 한 인간 내면에서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기 때문에,

목자의 삶을 살다 보면, 타인에 대한 이해력이 생기고,

인간의 심리, 성격, 의사소통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배우게 된다.

무엇보다 은혜를 제대로 받다 보면 자신의 상처와 자아가 보이고

그것이 하나님 안에서 치유/회복/성숙 되어 가는 과정을 경험하게 된다. 
자신이 어떤 사람이고 어떤 상처와 문제를 가지고 있으며,

어떤 장단점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필요를 가지고 있는지 이해하게 되며,

자신의 인생관과 비전이 생기게 된다.

 

이렇게 되면, 자기에게 어떤 사람이 맞고, 어떤 사람이 필요한지 상이 생기게 되며,

결국, 그 사람의 배우자 기도는 아주 구체화 될 수 밖에 없다.

평소에 이를 놓고 기도해 온 사람은, 새로운 사람이 나타났을 때 구별할 수 있다

배우자를 위해서 기도한 많은 크리스챤들이 

하나님께서 너무나 구체적으로 응답하셨다는 고백을 하곤 한다.

 

그러나 그런 기준이 없는 사람은 괜찮은 이성이 나타날 때마다 껄떡대고 찔러보고,

공동체의 분위기를 흐리기도 한다.

어리고 잘 몰라서 그러면 가르치고 타일러야겠지만,

공동체에서 오래 있었고 나이도 있는데 이렇게 행동하면, 정말 추해 보일 수 있다.

자신의 욕심에 따라 신앙공동체에서 분위기를 흐리는 것은

그 안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말해주며,

이런 행동은 공동체의 성장과 부흥을 가로막는다.

 

신앙적 성숙과, 목자의 삶을 겪고 나면, 배우자 상이 아주 구체화 되며,

이러한 크리스챤은 좀 괜찮은 이성이 나타난다고 해서

쉽게 요동하고 기웃거리지 않는다. 신중해 진다.

그리고, 자기에게 맞는 사람이 나타났을 때, 알아볼 가능성이 아주 높아진다.

 

연애를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자기에게 맞는 사람을 만나는 것도 중요하나,

더 중요한 것이 그런 사람을 만났을 때에 서로가 준비가 되어 있느냐이다.

자기 내면의 고민이 정리되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람은,

사람을 알아보지 못할 뿐 아니라, 만나도 제대로 사귀기 힘들다.

나이는 먹었어도, 가정과 성장과정에서 겪은 상처가 그대로 남아있고,

사람과 교제하고 배려하고 소통하는 법을 모르며,

무엇보다 하나님을 모르고 자기 자신을 모르는

인격적 유아기의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심지어는 이런 남자를 멋있게 생각하는 여자들도 꽤 있고,

이 경우 고생문이 활짝 열린다)

이 과정은 물론 한번에 끝나는 것은 아니지만,

청년의 시기에 어느 정도 정리 되어야 하는 임계량은 분명히 존재한다.

 

연애는 자기의 문제가 어느 정도 풀려나가는 두 사람이 만나

서로 동반자로 함께 걸어가는 것이지,

자신의 빈 내면을 채워주고, 자기를 구원해 줄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흡혈귀와 기생충의 연애를 해서는 안된다

 

  

III. 기다림의 문제

 

또 하나 중요한 것이 기다림의 문제이다.

자기에게 맞는 배우자를 언제 만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기다림이 길어지면 많은 청년들의 믿음이 흔들리고, 외로움과 불안함을 느낀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아시며 우리의 인생을 인도하시는 분이시고,

독신의 은사를 받지 않은 이상, 당연히 좋은 배우자가 있어야 함을 아신다.

언제인지 모르지만, 믿고 기도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좋은 만남을 주신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기다림의 시간을 주신다.

이 시간은 우리의 믿음에 대한 탁월한 훈련 효과를 가진다.

또한 사람에 대한 소중함을 배우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 기다림은 수동적인 것 만은 아니다.

앞에서 말했듯, 신앙적 인격적 성숙, 자신과 타인에 대한 이해, 자신의 비전을 찾아가는 과정,

그리고, 자신에게 맞는 배우자의 상을 구체화 하고, 이를 위해 기도하는 작업이 이루어져야한다.

그리고 연애 이전에 친구로, 선후배로, 동역자로 인간관계도 경험해 보아야 한다. 

이런 과정을 충실히 겪은 사람은,

자신에게 맞는 사람을 알아볼 가능성이 아주 높아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다림의 시간이 너무 길어진다면, 고민할 필요가 있다.

먼저는 연애에 있어 여러 가지 변수들이 있고,

자신의 기준을 고려해 봐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스스로 너무 고평가를 하고 있지는 않은가,

현실적인 기준을 너무 무시하고 있지는 않은가,

너무 모든 것이 완벽한 사람을 찾으려는 것은 아닌가 고민해 볼 필요도 있다.

아무리 배우자 기도를 해도 모든 제목이 100% 채워지기는 힘들다.

자신의 조건에서도, 절대 타협할 수 없는 것과 타협 가능한 부분을 나누어서 접근해야 한다.

이 구분에서 그 사람의 가치관이 다시 한번 드러나게 될 것이다.

 

또 하나, 현실적인 문제는, 크리스챤 중에 여성의 인구가 절대적으로 많다는 점이다.  

자매들에게 있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수적으로 볼 때, 꽤 많은 자매들은 불신자를 전도해서 결혼해야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결혼 전에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을 경험하도록 한 후에 결혼 하는 것이 중요하다.

교회 나오고 세례 받는 것은 외적인 형식이다. 이것이 내면의 변화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때로는 상대가 결혼을 위해 회심의 체험 없이, 형식만을 채우고 됐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믿는 배우자의 책임이다.

남들의 눈에 보이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상대가 진정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식자체가 없고, 분명한 신앙적 기준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믿는 배우자가 이러한 분명한 신앙의 기준이 없을 경우

불신자에게서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어렵고, 이 경우 결혼생활은 상당한 갈등의 지속이 될 수 있다.

 

인생은 계속되는 선택의 연속이다.

그러므로 괜찮은 사람이 나타났을 때, 선택할 것이냐 더 기다릴 것이냐는

아주 중요한 문제다.

꽤 많은 크리스챤들이, 선택에 확신이 있기 보다는,

더 기다릴 자신이 없거나, 지쳐서, 웬만한 사람과 결혼하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다. 

이 경우 자신이 얘기했던 비전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게 될 가능성이 크다.

 

최선의 최대 적은 차선이다라는 말이 있다. 

요즘은 결혼 적령기라는 것이 따로 없고, 열심히 살다 보면 몇 년 결혼이 늦어지는 것은 큰일이 아니다.

내 주변에도, 나이 먹고 주변에서 구박받던 노처녀 노총각이,

정말 자기에게 맞는 배우자를 만나 누구보다 행복하게 사는 것을 많이 보았다.

 

IV. 마치며

 

중요한 것은 역시 믿음이고, 하나님의 뜻을 늘 찾아나가는 것이다.

정말 인생을 하나님 앞에 드린 사람이라면,

배우자 선택이라는 일생일대의 결정을,

하나님의 분명한 인도를 경험하지 않고 내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물론 하나님은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시며,

그분의 뜻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확인되고 찾아나가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과 자기의 뜻을 혼동해서 벌어지는 해프닝은 지난번 글, [크리스챤과 연애1]에서 간단히 설명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분명하게 확인 되는 것은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구하는 자에게 그분의 뜻을 보여주시고 인도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성숙과 기다림의 과정을 거쳐,

하나님의 인도로 배우자를 만나는 경험은,

고된 인생에 있어서 흔치 않은 위로요, 보석 같은 순간이다.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돌아보시고, 인도하고 계심을

상대를 통해서 다시 한번 경험하고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신앙적, 인격적으로 준비되고, 하나님 안에서 만나,

한 비전을 따라가는 두 젊은이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나님 나라는 이런 헌신된 커플과 가정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런 이들이 있기에 오늘도 이 땅에 소망이 있고 

회복과 창조의 역사가 생겨나는 것 아닐까?

이런 이들을 정말로 많이 보고 싶고, 만나고 싶다.

 

함께 예수님을 따라가는 모든 형제자매들에게

이러한 축복이 임하기를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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