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엽


영화 '프리즈너스' (2013): 당신의 신앙은 고통과 복수심을 감당할 수 있는가?

2020년 5월 이인엽


예전부터 많이 들어본 영화라 감상할 영화 리스트에 있었는데, 드니 빌뇌브 감독의 영화라는 걸 나중에 알게 되어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퀘벡주 출신의 프랑스계 캐나다인인 빌뇌브 감독은, 그을린 사랑, 시카리오, 컨택트, 블레이드 러너2049 등의 성공으로, 최근에 가장 핫한 감독 중 한명이다. '시카리오'는 CIA가 벌이는 마약전쟁의 몸서리쳐지는 현실을 잘 그려낸 작품이고 (다른 감독이 맡은 후편은 전편의 수준에 미치지 못함), '컨택트'는 외계인과의 만남이라는 소재를 통해 소통과 운명에 대한 철학적인 주제들을 풀어놓았다. 리들리 스콧의 유명한 컬트 SF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속편을 제작하는 건 어떤 감독에게든 엄청난 부담이었을텐데, '블레이드 러너2049'는 전편 이상의 철학적 깊이와 완성도를 보여준 수작이었다. SF라는 장르와 인간과 운명, 폭력성 등의 주제를 드뇌브 감독 만큼 잘 빚어내는 감독이 드물다는 생각이다. 아직 보지 못했지만 역시 호평을 받은 '그을린 사랑'도 곧 감상할 예정이다. 보고 나서 곱씹으면 많은 상징과 질문들을 발견하게 하는 영화들을 좋아하는데, 빌뇌브 감독의 영화가 그렇다. 유명한 SF소설로 과거 데이비드 린치 감독에 의해 한번 영화화 되었으나 아쉬움을 남긴 괴작으로 기억되는 '듄'의 리메이크 감독을 맡게 되어, 또 하나의 수작이 나오지 않을지 기대된다.

다시 이 영화로 돌아가면, 2013년 작인 '프리즈너스'는 납치사건을 추척하는 다혈질의 아버지 켈러 도버(휴 잭맨)와 냉철한 로키 형사(제이크 질렌할)이 이야기를 다룬 반전 스릴러 영화로 알려져 있다. 미국판 '살인의 추억'이라는 평도 보았는데, 살인의 추억과 좀더 유사한 영화는 '조디악 (Zodiac, 2007)'이 아닐까 싶고, 이 영화는 반전이나 두뇌 게임 보다도, 종교적 상징성과 철학적, 신학적 질문들이 더 부각되는 영화여서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조금 주관적이면서도 긴 감상평을 정리해 보았다. 영화내용도 좀 길게 요약했는데, 보신 분들은 스킵하고 2번과 3번의 해석으로 넘어가셔도 좋다.


1. 간단한 줄거리 (스포일러 있음)

아내와 아들, 딸, 이렇게 네 가족이 살고 있는 주인공 켈러 도버(유명한 울버린의 배우 휴 잭맨)는 아들과 사슴 사냥을 다녀오고, 추수감사절날 절친인 흑인친구 프랭클린 버치의 집에서 두 가족이 파티를 하게 된다. 어린 딸은 아빠가 사준 호신용 빨간 호루라기를 잃어버렸다며 친구와 함께 집에가서 다시 찾아 보겠다고 나가는데, 이후 두 여자아이의 흔적은 찾을 수 없고, 경찰에 실종신고를 하게 된다. 사건을 맡은 로키 형사(제이크 질렌할)는 해결하지 못한 사건이 없는 유능한 인물이지만, 딸을 잃고 흥분하는 도버에게 좀 냉담한 느낌을 보이는데, 과거 소년원에 간 적도 있다는 언급이 나온다. 도버 가족의 동네에서 캠핑카를 몰고 있던 수상한 알렉스 존스(폴 다노)가 유력한 용의자로 발견된 후, 도주하려다 체포되지만, 로키 형사의 심문 결과 그는 10세 수준의 지능에, 별다른 증거물이나 혐의점이 나타나지 않는다. 알렉스는 뭔가 지쳐 보이는 숙모인 홀리 존스와 함께 살고 있고, 삼촌은 집을 나갔다고 한다. 형사는 그를 석방하려고 하고, 도버는 분노하며 10세 지능이 어떻게 캠핑카를 운전하냐고 캐 묻는데, 형사는 오히려 아버지가 감정 조절을 못하고 과도한 의심을 한다고 생각한다. (이 부분은 명백히 형사의 착각이고 아버지의 질문이 정당했는데, 결론적으로 로키 형사는 계속 단서와 용의자를 놓치고 미로에서 헤메는 모습을 보여준다).


알렉스가 석방되는 순간 도버는 기자들, 형사들이 보는 앞에서 그를 밀어붙여 딸의 행방을 대라고 다그치는데, 알렉스는 농락하듯이 도버만 들리도록 "내가 떠날때까지 그 애들은 울지 않았어요"라고 속삭인다. 형사에게 이 말을 해서 다시 심문 하지만, 알렉스는 그런 말을 한 적 없다고 잡아떼고, 형사는 또 다시 도버를 무시한다 (다시 황당한 장면). 도버는 결국 자신의 손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로 하고, 알렉스를 미행하다가 그가 혼자서 자기 딸이 부르던 노래를 흉내내고, 개를 거칠게 다루는 모습을 보면서 범인이라 확신하고, 그를 납치해 흉가가 되어버린 자기 아버지의 빈 집에서 그를 고문하기 시작한다. 고문을 받던 알렉스는 자기는 알렉스가 아니며, 아이들이 "미로(Maze)에 같혀있다"는 이상한 말을 한다.


로키 형사는 지역의 다른 성범죄 전력자들을 조사하는데, 술취에 널부러져 있는 한 늙은 신부의 집 지하실에서 미로 모양의 목걸이를 한 오래된 사체를 발견한다. 아마도 성범죄 전력이 있고 알콜중독자인 듯한 신부는, 죽은 사람이 "신과의 전쟁을 하고 있었다"는 황당한 말을 하는데 ("he was waging a war against God"), 죽은이가 자신이 과거 16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납치 살해 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아마도 고해성사에서 듣게 된 듯), 그를 감금하고 죽게 놔두었다고 말한다. 형사는 정보가 구체적이지 않다고 불평하고 신부의 말을 무시하며 자리를 떠난다 (또 다시 황당한 상황).


형사는 다른 성범죄 혐의자들을 탐문하던 중, 중고의류점에서 아동복을 사가는 이상한 남자(밥 테일러)에 대한 정보를 얻고 그를 추적하는데, 그는 실종된 두 소녀의 귀환을 기원하는 행사에도 나타났다가 형사와 눈이 마주치자 도주하기도 한다. 형사는 그의 집에 쳐들어가 반항하는 그를 체포하고 이상한 상자들을 발견하는데, 아이들의 피묻은 옷과 징그러운 뱀들이 들어있다. 체포된 그는 알수 없는 미로를 그리며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다가, 형사의 총을 빼앗아 자살한다. 그 옷가지들을 조사한 결과, 실종된 도버의 딸 양말이 있음을 알게 되는데, 결국 아이들이 죽었을 거라는 생각에 모두가 괴로워 한다. 그러나 밥 테일러가 갖고 있었던 옷에 묻은 피는 사람이 아닌 돼지 피였고, 그의 마당에서 발견된 것들은 어린이 마네킹으로, 진짜 살인을 한게 아니라 살인을 모방하는 행위를 했으며, 아이의 옷도 납치 사건이 벌어진 이후, 도버 가족의 집에 몰래 들어와 훔쳐갔던 것(그가 침입했다가 창문으로 도망친 주변에, 훔쳐가다 흘린 양말의 다른 짝이 떨어져 있었음)으로 그가 진범이 아니라는게 드러난다. 혼란에 빠진 로키 형사는 괴로워 하던 중, '미로(Maze)'라는 상징물이 모든 관련자들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사건이 미궁에 빠진 와중에 납치 되었던 두 여자 아이 중, 켈러 도버의 딸 친구인 흑인 여자아이가 탈출해서 돌아오는데, 도버를 보고 "우리가 납치된 곳에 당신도 있었어요"라고 말한다. 딸이 납치된 곳이 자신이 방문했던 곳임을 직감한 그는, 알렉스의 숙모가 범인임을 깨닫고 그녀의 집에 찾아가는데, 총으로 위협하는 그녀에 의해, 약물을 마시고, 중고차 밑의 구덩이에 같히게 된다. 그리고 그 안에서 딸에게 사주었던 빨간 호루라기를 발견한다. 즉, 딸은 친구와 집에 돌아와 잃어버린 호루라기를 찾았었고 이후 납치 되어 그곳에 같혀 있었던 것이다. 홀리 존스는 이제 납치한 딸을 약물을 주입해 죽이려고 하는데, 그제서야 도착한 형사는 그녀를 쏴 죽이고 아이를 구출한다. 사건이 모두 끝나고 아무도 켈러 존스가 구덩이 안에 있음을 모르는데, 형사가 다시 범행 현장을 살펴보던 중 켈러 도버의 희미한 호루라기 소리를 들으며 영화는 끝난다. 아마도 그 소리로 도버가 구출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볼 수 있다.

전체적으로 중반까지는 흡인력이 강한데, 기대보다는 반전도 충격적이지는 않고, 생각보다 퍼즐이 잘 맞춰지지는 않는다. 범인으로 오해받아 고문을 당한 알렉스 존스(폴 다노)는 알고보니 숙모라고 칭해졌던 홀리 존스에게 납치당해 키워진 피해자였는데, 왜 제대로 사실을 폭로하지 않고 몇 마디 단서만 흘리면서 오해를 받았을까? 납치범들에게 학대와 세뇌를 받았고 약물로 심신미약상태를 만들었을 수는 있는데 약간 설명은 아쉽다. 그가 캠핑카를 타고 도주하려다 잡혔을때, 경찰에서는 왜 그의 가짜 신분을 확인할 수 없었을까? 존스 부부가 그를 납치하고 어떻게 신분서류를 만들었는지 등은 잘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를 범인으로 확신하는 켈러는 그를 미행하는데, 영화는 밤에 개와 산책을 나가면서 말안듣는 개를 거칠게 다루는 모습이나 딸이 부르던 노래를 따라 부르는 것 등을 보여주며, 관객이 (살인범을 다룬 많은 영화의 흔한 설정처럼) 그를 정신지체아인 척 하는 사이코 패스로 추측하게 만든다. 이는 반전을 위한 장치이기도 하고, 관객이 알렉스를 범인이라 확신하고 고문을 시작하는 도버에게 어느 정도 공감하도록 만든다. (참고로 알렉스 역의 배우 폴 다노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 '옥자'에서는 동물해방전선의 리더로 조금 코믹한 이미지로 나오기도 했었다. 그러고 보면, 제이크 질렌할도 옥자에 출연했었음. 폴 다노는 폴 토마스 앤더슨의 영화 '데어윌비블러드'에서 석유시추업자 다니엘 데이 루이스와 동업을 하다가 나중에 볼링핀에 맞아죽는 기괴한 소년 목사로 출연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어린이 옷을 사고 상자에 뱀과 함께 넣어놓았다가 체포된 후 자살한 밥 테일러라는 인물도 설명이 좀 부족한데, 그도 존스 부부의 피해자로 추측할 수 있고, 남편 존스가 뱀을 기른 것을 모방했던 것으로 보이며, 자신의 트라우마로 인해, 납치사건을 재현하고 있다고 보인다. 그런데, 혼자 살고 있는 걸로 보아서, 과거 납치되었다가 탈출한 인물인건지, 그러면 왜 존스 부부를 신고하지 않았으며, 이번 납치사건에는 어떤 관련이 있는지 등이 잘 설명이 안되는 듯 하다. 역시 존스 부부에 의한 학대와 세뇌의 피해자라는 설명 정도가 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형사의 눈으로 그를 볼때는, 불안정하고 수상쩍은 모습에 아이 옷을 사가고 뱀을 기르는, 변태성욕자나 아동학대자로 의심하기 딱이라는 점이다. 결국 감독의 관심은 완벽한 퍼즐과 반전을 만드는 것 보다는, 이렇게 수상쩍은 혐의자들을 컬러 도버나 로키 형사가 다루는 방식, 그리고 인물들의 배경과 행동에서 나타나는 상징성과 철학적 질문에 집중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2. 영화에 나타난 종교적 상징들

존스 부부는 과거 캠핑카를 타고 다니며 전도를 다닐 정도로 독실한 신자였으나, 아들이 암으로 죽자 그에 대한 고통과 분노가, 이들의 신앙을 신에 대한 복수심으로 바꿔버린다. 신을 원망하다 못해 신과의 전쟁을 결심한 이들은, 다른 아이들을 납치해 부모에게 극도의 고통을 주고, 그들을 분노에 찬 악마로 바꿈으로서 신에게 복수 하려 한다. 자신들이 겪은 고통을 이런 정신병적인 방식으로 해소하려 들지만, 강렬하고 광기어린 악마라기 보다는, 흉물스럽고 지친 '복수귀'에 가까운 모습이다. 납치 행각을 계속하던 중, 남편은 그런 악행에 지치고 양심에 가책을 느꼈는지, 어느 순간 집을 떠나는데, 영화 중간에 나온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했다가 그에 의해 감금되어 굶어죽은 듯 하다. 남편은 뱀을 길렀던걸로 나오는데, 그래서 과거 이들에게 납치되었던 밥 테일러도 뱀을 기르고 아이들의 옷을 뱀과 함께 상자에 넣는다 (미국의 보수 기독교인중에 뱀에게 물려도 독의 해를 받지 않는 다는 성경구절을 따와서, 뱀을 가지고 믿음을 테스트 하는 기괴한 교회가 있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는데, 혹시 그와 연관된지 모르겠다). 남편이 떠난 후, 부인인 홀리 존스는 잠시 범행을 멈추었다가, 다시 시작해서 두 여아를 납치한다. 그녀는 마지막에 범행이 들통나자 죽음을 직감 한 듯, 총에 맞기 전 형사에게, 자신을 관에 넣어 묻기 보다 화장을 해 달라고 한다. 분노와 절망속에 납치를 지속 했지만 언젠가 이 미친 짓이 끝나고 죽을때가 오기를 기다려 온게 아닌가 싶은 대사였다.

납치당한 딸의 아버지 켈러 도버 역시, 아들과 함께 사냥할 때도 주기도문을 외우고 총을 쏠 정도로 신앙적인 인물이다. 그런데 막상 자신의 딸이 납치를 당하자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고, 형사가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자, 용의자인 알렉스를 납치해 손수 고문을 시작한다. 워낙 알렉스가 범인인 것처럼 영화가 몰아가기 때문에 영화를 보면서 아버지 켈러에게 감정 이입이 되긴 했는데, 영화는 그의 갈등과 가책도 보여준다. 고문을 하면서 자신이 괴로워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회개 기도도 하고, 딸의 위치를 알려주면 그만하겠다고 사정을 하기도 하지만, 고문을 멈추지는 않는다.


도버에게 수상함을 느낀 형사가 조사를 하는 가운데, 도버의 아버지는 감옥의 간수였다가 자살했다는 신문 기사가 나오는데, 감옥 측은 자살 사건에 대해 언급하기를 거부했다는 기사 내용을 보면, 아버지가 감옥에서 죄수를 고문했거나 가혹행위를 하다가 양심의 가책으로 자살한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볼 수 있다. 켈러 도버가 알렉스를 고문하는 곳이, 흉가처럼 변해버린 죽은 자기 아버지의 집이다. 켈러의 픽업 트럭에는 "Keller Dover Remodeling & Repairs"이라고 써 있는 걸로 봐서 그의 직업은 집 수리, 리모델링 전문가라는 걸 알 수 있는데, 아이러니 하게도 흉가처럼 변해버린 자기 아버지의 집은 수리도 안한 채 내버려 두고 그곳에서 알렉스를 고문한다. 영화 초반에 켈러 도버의 아들이 중고차를 사기위해 죽은 할아버지의 집을 세를 주자고 하자, 집 수리비가 너무 많이 들거라고 거절하는 대화가 나오는데, 심리학 적으로 그 집은, 죽은 아버지의 기억과 폭력성이 켈러의 잠재의식속에 남아있음을 상징하는 공간이 아닌가 추측해 본다. 나중에 그는 집안에 빛이 들어오지 않는 암실 같은걸 만들어 알렉스를 가두고, 보일러를 틀어 (아마도 매우 뜨거운 물이 쏟아지게 해서) 고통을 주는 고문실을 만드는데, 한 리뷰를 보니, 작은 구멍을 통해 그와 알렉스가 대화를 나누는 것이 고해성사의 장면 같다는 의견도 있었다. 알콜중독 신부가 홀리 존스의 남편의 고해성사를 듣고 그가 아동 납치살해범임을 알고, 그를 감금하고 굶어죽게 만들었다는 이야기와 비슷한 상징이 반복되고 있다. 로키 형사가 도버 아버지의 신문기사를 통해 알렉스를 감금한 집을 찾아갔을 때, 도버가 고문을 하다가 술취해 바닥에 쓰러진 것처럼 위장해 위기를 넘기는 장면도, 지하에 시체를 둔 채, 술에 절어 잠들어 있는 신부의 모습과 비슷한 구도였다.


고해성사는 자발적인 고백으로 소통과 용서, 구원을 지향하는 곳이지만, 고문실은 고통으로 상대를 굴복시키며, 정보를 실토하게 만드는 곳이다. 영화는 소통과 용서, 그리고 단절과 폭력 사이에서 우리가 어떤 선택을 내릴 것인가를 질문하는 듯 하다.




3. 영화가 던지는 신학적, 철학적 질문들

개인적으로 영화를 곱씹으면서, 신학적 질문들을 좀 더 깊게 생각해 보게 되었는데, 먼저 주요 인물들인 홀리 존스 부부나 켈러 도버가 모두 보수적인 기독교인이라는 점이 중요한 설정이다. 사랑과 용서, 신의 주권과 섭리, 구원을 말하는 기독교인인 이들은, 표면적으로는 자신의 신앙에 충실히 살아왔던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인생의 혼란속에 극단적인 고통이나 복수심이 찾아오자, 그들이 믿었던 신학적 가치들은 상황들을 해석해 내거나 극복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미로, 혹은 미궁(Maze)'은 영화속에서 반복되는 상징물인데, 미로의 끝에 아이들이 숨겨져 있다는 알렉스의 말과 달리, 실제 미로라고 볼 만한 구조물은 나타나지 않는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미로는 설명되지 않는 인생의 혼란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영화는 보수 기독교가 보이는 삶에 대한 고민의 부족, 단순하고 피상적이며 조악한 신학과 인간관, 인생관이, 현실의 문제에 얼마나 무력할 수 있는지 생각하게 만든다.

열심히 전도를 하는 등 신앙적인 삶을 살아온 존스 부부는, 사랑하는 아들이 왜 암으로 걸려 죽어야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자 신에 대한 사랑이 증오와 복수심으로 바뀌어, 납치를 통해 다른 부모들도 자식을 잃어버리는 고통을 겪고 악마처럼 변하게 만듦으로서, 신에게 복수를 하려 한다. 어쩌면 이것은 악마처럼 변한 자신들을 정당화 하기 위한 행동일 수도 있는데, 그런 고통을 당하면 누구나 분노에 사로잡혀 악마가 될 수 밖에 없다고 전제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결국 신이 존재한다면 그런 일은 자신들에게 일어나서는 안되는 것이었고, 흑화된 자신들의 모습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이는 신정론을 포함하여 매우 거대한 철학적, 신학적 질문이며, 많은 종교와 철학들이 이에 답을 주려고 시도해 왔다. 이는 성경의 욥기에서 이미 수천년전에 고통스럽게 제기했던 질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많은 경우 보수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신의 주권과 섭리는, 자신을 향한 신의 계획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식의, 잠깐의 고난이 있어도 궁극적으로는 신이 나에게 언제나 최선의 결과를 가져다 줄 것이라는 단순한 믿음과 기복신앙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아니면 인과응보식의 관념으로, 무언가 죄를 지었기에 징벌을 받는다고 상대를 정죄하는 폭력이 되기도 싶다. 결국 존스 부부의 예에서 볼 수 있듯, 자기 중심적인 신앙, 고통에 대한 성찰의 부재, 타인의 고통에 대한 무지에 기반한 신앙은, 자식의 죽음이라는, 자신들이 감당할 수 있는 고통의 최고치를 넘어가는 절망 앞에서, 완전히 무너져 내린다.


물론 그런 극심한 고통을 겪는 이들에게 그것을 왜 극복하지 못하냐고 정죄할 수는 없다. 문제는, 많은 신학자, 목회자, 교회들이, 지극히 나 중심적이고 조악하고 단순한 신학을 가지고 약을 팔고 있으며, 그런 신학안에 인생의 복잡성, 설명되지 않는 고통과 비극, 강자의 폭력과 약자의 고통, 권력과 착취 등의 문제에 대한 고민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매우 무감각하고 무책임한 행태이다. 이런 엉터리 신학을 파는 것은 쉽게 말해 그것이 값싸고 인기있으며 장사가 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라는 기독교의 핵심 조차도, 나의 속죄와 구원을 위한 희생으로 소비 될 뿐, 외아들을 잃은 절대자의 고통과 섭리, 그리고 이 땅의 수많은 억울한 죽음들과, 자식을 잃은 부모의 고통에 대한 공감, 희생자의 부활과 정의의 회복이라는 가치로 확대되지 못한다.

더 나아가, 자신의 고통과 분노를 절대화 한 존스 부부는, 공감과 연대의 확대가 아닌, 고통과 죽음을 세상에 증식시키는 복수귀로 전락한다. 같은 고통을 겪어도 사람의 반응은 다른 것인데, 이기적이고 조악한 신앙이 세상에 얼마나 해악을 끼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트럼프와 코로나 시대를 지나면서, 결국 보수 기독교가 만들어낸 미국 사회의 모습에 몸서리 치게 되는 요즘, 이런 절망감이 더욱 엄습해 온다.



켈러 도버는 자상한 아버지이자 남편이고, 독실한 신앙인이며, 그의 절친인 흑인 가족과도 사이좋게 지낸다. 하지만 자신의 딸이 납치되자, 딸을 살린다는 명분으로 모든 것을 합리화 하며, 용의자인 알렉스를 납치해 무자비하게 고문한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영화의 첫 장면은, 켈러 도버가 아들과 함께 주기도문을 외우고 사슴을 사냥해 오는 걸로 시작하며,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 그리고 픽업 트럭에 놓인 총에 맞아 피흘리는 사슴의 사체를 비춘다. 마치 신앙과 살생의 모순을 보여주기라도 하는 것 처럼 말이다. 추수감사절이 되자 도버 가족은 흑인 친구집에 놀러가면서 사냥한 사슴 고기를 가져 간다. 친구의 딸은 도버의 아들에게 사슴을 사냥하면 죄책감이 들지 않냐고 묻자, 아들은 사슴 개체수가 많으면 어차피 굶어죽기 때문에 사냥을 하는 일이 좋은 일이라 합리화 한다.


미국의 역사를 생각하면, 원죄와도 같이 인디언에 대한 무자비한 학살, 흑인 노예제와 차별, 인종 차별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일종의 클리셰라 볼 수도 있지만, 사슴을 사냥해 추수감사절에 고기를 먹는 장면은, 미국의 이민자들이 아메리카 원주민들(인디언들)을 인간의 문명이 아닌 야생 자연의 일부로 보고, 종족 말살에 가까운 정책으로 몰아내고 그들의 땅과 자원을 빼앗은 사실을 떠올리게 한다. 도버의 아버지가 간수로 일하다 자살한 과거가 언급되는데, 노예제의 철폐이후 흑인들에 대한 대규모 수감정책을 통해 새로운 종류의 노예제를 유지해 왔다는 연구들이 최근 주목을 받고 있다. 노예제의 폐지로 강제노역이 불법화 되었음에도, 그것이 가능했던 곳이 바로 감옥이다. 백인 지배층은 부랑자 법 등을 제정해 가난한 흑인들을 무고하게 체포해 감옥에 수감하고 강제노역을 통해 이들을 착취했는데, 산업의 기계화 이전에 여기서 뽑아낸 이익이 상당했으며, 적어도 자신의 자산으로 흑인들을 관리했던 것과 달리, 이런 감옥의 노예노동은 흑인들을 얼마든지 더 잡아들일 수 있기에, 노예제보다도 더 참혹하고 잔인했다고 한다. (참고 자료: Rethinking Incarceration: Advocating for Justice That Restores; Slavery by Another Name: The Re-Enslavement of Black Americans from the Civil War to World War II). 지금도 법집행과 수감율 등에 있어 인종차별이 극심하게 지속되고 있는 현실을 떠올리게 된다.


이러한 폭력과 차별의 역사속에 세워진 단란한 가정으로 상징되는 미국 사회는, 자신들의 안정에 대한 어떠한 위협이 발생하면, 민주주의와 인권, 기독교 정신 같은 가치는 바로 타협해 버리고 무자비한 대응에 나선다. 영화는 의도적으로 알렉스 존스와 밥 테일러를 진범처럼 보이게 제시하는데, 그들을 가혹하게 대하는 켈러 도버와 로키 형사에 감정이입하는 관객들 스스로가, 손쉬운 복수심과 폭력성을 반추하도록 만든다. 용의자로 몰린 알렉스나 밥테일러는, 오늘 우리 시대에 타자와 위협으로 규정되는 모든 이들을 떠올리게 한다. 빨갱이, 테러리스트, 무슬림, 이민자, 이제는 중국인까지.


냉전에서의 승리를 위해 제3세계에서 벌인 수많은 악행들, 9/11이후 관계도 없는 이라크를 침공하고 중동에서 끊임없는 전쟁을 수행해 온 것 등. 도버가 알렉스를 고문하는 장면이나, 밥 테일러가 조사를 받다가 자살하는 것은, 아부그레이브나 관타나모 기지에서 테러 용의자를 고문하는 미군과 CIA의 초법적 행위를 연상케 한다. 트럼프 시대에 와서 이민자들을 악마화 하고 희생양으로 삼는 현상, 코로나 사태가 터지자 중국과 아시안들에 대한 적대감을 부추기는 것에서도 이러한 현상을 볼 수 있다. 소위 기독교 국가에서 말하는 용서나 사랑과 같은 가치는, 나와 비슷한 배경을 가진 이웃들 간의 따듯한 개인적 관계에서만 적용될 뿐, 나와 다르며, 의심스럽고 위협이 되는 존재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또한 나와 내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는 것도 가능하다. 내적인 갈등이 있을 망정, 아버지는 손에 피를 묻히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유명한 '대부' 3부작이나,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크로넨버그의 '폭력의 역사(2005)' 그리고 '베오울프(2007)' 같은 영화들은 미국의 역사를 폭력의 악순환으로 설명하는 하나의 은유라고 생각하는데, 이 영화도 그런 이미지가 많이 중첩된다. 아버지들의 죄, 그리고 폭력의 역사...

아이러니 한 것은, 딸의 안전을 위해 사준 빨간 호루라기를 찾으러 갔다가 딸이 납치되었다는 사실이다. 딸이 같혔던 구덩이에서 그는 호루라기를 발견한다. 알렉스를 고문실에 가두었던 그는 이제 홀리 존스에 의해 구덩이에 감금되는데, 영화 마지막에 그는 호루라기를 불어 구조를 요청한다. 이미 너무 큰 악행을 자행한 그는, 과연 구원 받을 수 있을까?



4. 마치며

영화의 제목을 왜 프리즈너스(Prisoners), 죄수들이라 정했을까? 알렉스는 사실 존스 부부의 피해자였으나, 그들의 세뇌로 인해 정상인의 삶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캠핑카에서 살고 있고, 납치범으로 의심 받은 후에는 간수였던 도버 아버지의 흉가에서 고문실에 같힌다. 밥 테일러는 탈출한 것처럼 보이지만, 자신이 경험한 납치를 마네킹과 아동복 가짜 피와 뱀 등을 통해 모방, 재현하고, 아이들의 옷가지에 피를 뭍혀 뱀과 함께 상자에 넣고 잠그는 등, 트라우마의 감옥속에 살고 있다. 켈러 도버 역시 아버지의 기억이 잠재의식속에 남아있으며, 알렉스를 고문실에 감금하지만, 나중에는 홀리 존스에 의해 구덩이에 감금된다. 홀리 존스의 남편은 알콜중독자 신부에게 감금되어 죽음을 맞고, 홀리 존스는 아이들을 납치해 감금하지만, 결국 자신의 복수심의 노예로 감금된 인생을 살아왔다. 영화의 제목은 이런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를 폭력과 복수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각자의 감옥에 유폐된 죄수들(Prisoners)로 묘사하고 있다.

결국 홀리 존스나 켈러 도버나 모두 보수적인 기독교인이지만, 자신들에게 고통이 왔을때는 잔혹한 복수귀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이 영화의 냉정한 시선이 아닌가 한다. 미궁과 같이 이해할 수 없는 고통과 불합리가 일어나는 인생과 세상 속에서 혼란과 불안을 느끼면, 손쉽게 상대를 악마화 하고, 또 자신이 악마가 되어 가는 비극이다. 성찰과 고민이 부재한 나 중심적 신학의 한계에 대한 답답함, 용서와 화해의 신학이 부재한 기독교가 얼마나 손쉽게 폭력과 복수에 타협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듯 해서, 고통스럽기도 하고 많은 생각을 하게 한 영화였다.


'고해성사'를 통한 소통과 구원의 길은 좁고 험하며, 너무나 쉽게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고문실'로 대체된다. 우리에게 희망과 구원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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