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엽

화이트 타이거 (White Tiger, 2021): 인도판 '기생충'이라 할 만한 수작

​2021년 4월 26일 이인엽


여기저기서 좋은 평을 들었던 영화인데, 기대한 만큼 몰입해서 본 흥미로운 영화였다. 소설 원작이라 스토리도 탄탄하고, 이번 93회 아카데미에 각색상 후보로 오르기도 했다. 카스트 제도, 빈부격차, 부패한 정치 등, 인도의 사회상을 매우 실감나게 보여주고 날카롭게 비판해서 인도판 '기생충'이라 할 수 있겠다. 주인공의 나레이션으로 진행되는 직설적인 화법과, 다소 폭력적인 결말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을 듯.

주인공 발람은 카스트의 하층민 출신으로 할머니를 중심으로 한 대가족의 일원이다. 어렸을 때 총명해서 선생님이 장학금을 주선해 대도시로 유학을 보내주겠다고 할 정도였지만, 아버지가 빚을 지고 폐렴에 걸려 돌아가시고, 찻집에서 잡일을 하는 신세가 된다. 하지만, 한 세대에 한번만 태어난다는 화이트 타이거(백호) 처럼, 너는 특별하다라고 해 준 선생님의 말은 발람의 마음속에 남는다.
주인공 가족은 할머니를 중심으로 한 모계사회인데, 특이하게도 할머니가 결혼 등 집안의 대소사를 결정하고, 아버지나 형도 할머니의 그늘 알에 일만 하며 착취당한다. 또한 지역의 땅을 소유한 '황새'라는 별명의 지주와 그의 악독한 첫째 아들 '몽구스'에게 매달 납부해야 할 돈 때문에, 지역 주민들은 가난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 위에는 황새에게 상납을 받는 거물 정치인들이 있다.

영화는 인도 사회를 '닭장'으로 비유하는 발람의 나레이션으로 시작되는데, 닭장 속의 닭들이 순서대로 도살 당하는 것을 보면서도 닭장에서 도망가지 않는 것을 인도의 하층민의 현실로 설명한다. 인도 사회의 하인들은 주인에게 고분고분 하며 무조건 복종하는데, 나중에 나오지만, 주인들은 하인의 가족들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고, 주인을 배신하면 일가 친척을 다 몰살시켜 버리기에, 감히 속이거나 배신 할 생각을 못하는 것이다.


찻집에서 일하던 발람은, 손님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정보를 얻는 취미가 생기는데, 어느날 황새의 둘째 아들 아쇽이 미국에서 돌아왔고 그를 위해 운전사가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된다. 운전사가 되면 월급을 바치겠다는 말로 할머니를 졸라 운전강습을 받고, 그는 황새의 대저택을 찾아가 운전사로 취직하게 된다. 발람은 낮은 월급과 노예같은 대우에도, 하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만족을 느끼며, 자신의 주인을 가족이라고 생각하고 아쇽을 선망의 대상으로 생각한다.

아쇽은 미국에 유학을 갔다가 아내인 핑키를 만나 인도로 돌아왔는데, 핑키는 어렸을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미국 사회에 익숙한 여성이고, 아쇽은 미국 사회에 적응하려 하지만 결국 자신을 인도인으로 본다는 사실에 실망하고 인도로 돌아왔다.
계급사회를 대표해 발람을 노예 취급하는 악독한 황새와 몽구스와 달리, 두 사람은 그래도 발람을 인간적으로 대우한다. 하인으로서의 정체성과 노예근성에 충실한 발람에게, 핑키는 하인의 처지에서 벗어나 자신이 원하는 삶을 찾으라고 충고를 하기 까지 한다. 핑키는 인도의 신분제나 아쇽 가족의 생활 방식에 불만을 갖고 미국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발람은 어느날, 어린 시절 부터 선거 포스터로만 봐 왔던 인도의 진보적인 여자 정치인(일명 '위대한 사회주의자')이 황새의 집에 찾아온 것을 보고 놀라게 된다. 그런데 가난한 국민들을 위한다는 그녀가 그동안 황새의 탈세를 봐 준 덕에 황새는 부유해 진 거였고, 황새는 그녀에게 거액의 정치자금을 바쳐 온 것이었다. 더 큰 돈을 요구를 하는 그녀에게 반발해, 황새는 연줄을 갈아타려 하고, 아쇽 부부를 수도인 델리로 보내 경쟁 정당인 국민당에 뇌물을 주어 연줄을 만들려고 한다. 이들을 차로 운전해서 델리에 간 발람. 그런데 핑키의 생일을 맞아 아쇽 부부는 클럽에서 놀고 와서, 핑키가 술이 취한 채 자신이 운전을 하겠다고 하다 갑자기 도로로 뛰어나온 아이를 치어 죽이게 된다. 발람은 목격자가 없을거라 생각하고 도주를 하자고 한다.


그런데 황새와 몽구스는 만일을 대비해, 변호사를 불러와 발람에게 자신이 사고를 냈다는 서약서에 도장을 찍으라고 한다. 발람의 가족들과 합의도 끝났다고 하면서. 아쇽은 발람을 희생양으로 만드는게 부당하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 발람은 현실에 눈을 뜬다. 자신은 가족도 아니었고 그저 소모품이었다는 걸. 이 와중에 아쇽의 가족에게 질린 핑키는 아쇽 몰래 미국으로 돌아가 버리고 아내에게 버림받은 아쇽은 술에 절어 폐인 처럼 지내게 된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아쇽과 핑키 부부의 모습이다. 이들은 어느 정도 미국화, 서구화 되었고, 인도 계급사회의 착취구조나 발람을 노예처럼 다루는 것에 불편함을 느끼지만, 결국 그것은 약간의 개인적인 친절함에 그칠 뿐, 결국 자신들이 교통사고를 내자, 그것을 발람에게 떠넘기는 것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는다.

아쇽은 미국물을 먹고 돌아왔지만, 미국 사회에서도 주류가 되지 못했고, 인도로 돌아왔다. 인도사회를 개선하는 일이나 인도의 실리콘 밸리인 뱅갈루루 같은 곳에 가서 스타트업 같은걸 시작해 보겠다고 말만 번지르르 하게 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아버지를 위해 정치인에게 뇌물 먹이는 일이나 하고 있다. 결국 문화적으로 미국화 되었을 지언정, 자신들의 사회적, 경제적 계급을 벗어나지는 않는 것이다.

이런 구도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과 상당히 유사하다. 기택(송강호)이 박사장(이선균)의 운전기사라는 설정 부터 그렇다. 기택은 "그래도 아내를 사랑하시죠" 등 사적인 질문도 하고, 박사장과 인간적인 유대가 생겼다고 여기지만, 박사장은 선을 넘어 오지 않고 거리를 지키는 것을 강조한다. 박사장과 아내 연교(조여정)이 극악한 인물들이 아니라는 것이 중요하다. 연교는 약간 맹하고 순진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의 계급에 충실하고, 계급이 낮은 기택의 가족이나 문광을 자신과 동등한 인간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기택은 테이블 아래에서 자신들의 냄새를 이야기 하는 박사장 부부의 대화를 듣고, 모멸감을 느끼고, 기정이 죽어가는데 자신의 아들을 살리려고 키를 달라고 다그치는 박사장을 향해 기택의 분노는 폭발한다.

아쇽과 핑키도 극악한 인물들은 전혀 아니지만 그들은 결국 약간의 친절함과 문화적인 차이를 보일 뿐, 자신의 계급에 충실하며 그것을 벗어나지 않는다. 결국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정의한다는 맑스의 유명한 말 처럼, 그들을 규정하는 것은 자신들이 떠드는 멋진 말이 아닌, 자신이 속한 계급이다.

발람은 뺑소니 사고의 책임을 뒤집어 써, 감옥에 갈 위기였지만, 목격자가 없어 고발을 당하지 않게 되는데, 그는 이제 아쇽을 선망의 대상이 아닌 애증의 관계로 느끼고, 이 와중에 아쇽이 이제는 자신을 대체할 새로운 운전기사를 찾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심한 배신감을 느낀다. 자신도 결국, 언젠가 도살될 것을 기다리는 닭장속의 닭이라는 현실에 눈을 뜨고, 화이트 타이거로 살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이후 중요 스포일러 있음)

 


'위대한 사회주의자' 여자 정치인이 선거에서 압승하자, 결국 아쇽의 가족은 다시 그녀에게 선을 대기로 하고, 아쇽은 엄청난 액수의 뇌물을 준비한다. 기회를 보던 발람은 결국 중간에 아쇽을 살해하고, 그 돈을 가로채서 자기와 함께 있었던 조카만을 데리고 인도의 실리콘 밸리인 뱅갈루루로 떠난다. 그는 경찰들을 매수해 택시 사업을 시작하고 아쇽의 이름으로 살게 된다. 거창한 계획만 이야기 하던 진짜 아쇽은 죽고, 뱅갈루루로 간 발람이 아쇽이 되어 스타트업을 시작한 것이다. 얼마 후, 발람은 자신의 일가족 17명이 모두 살해되었다는 신문기사를 보게 된다. 황새가 아들의 복수를 한 것이다. 이제 어리숙한 하인에서 약간의 광기와 카리스마가 있는 모습으로 변한 발람은, 이제 자신의 택시운전사들을 거느리고 사업가가 되는데, 그는 운전사가 사고를 내면, 자신이 책임을 지고 배상을 하며 주인과 하인의 관계가 아닌,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로 사업을 운영한다. 기생충에서 기택은 충동적으로 박사장을 찌르지만 범죄자가 되어 평생 숨어살게 되고, 어떠한 혁명적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하층 계급끼리 이악스럽게 서로 물고 뜯을 뿐. 화이트 타이거에서는 범죄와 살인에 의해서지만 발람은 주인인 아쇽을 대체하고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것으로 나온다.

이 영화는 인도 사회의 모든 모순들을 직설적으로 비판하고, 닭장속의 닭 처럼 도살될 날을 기다리며 소모품처럼 살아가는 인도의 하층민들에게 언제까지 그렇게 살거냐고 질문하는 느낌이었다. 이런 직설적인 화법이 조금 불편하거나 가벼워 보일 수는 있지만, 영화의 에너지와 흡인력이 강력하다.

주인을 살해하고 닭장을 벗어난 발람은, 아쇽의 이름을 가지고 일종의 광기와 카리스마를 가진 사업가가 된다


인도는 매우 다양한 얼굴을 가진 나라이다. 간디와 비폭력운동으로 대표되는 위대한 정치와 역사, 첨단 IT 산업이 존재하며, 수천년의 문화유산과, 깊은 종교심과 영성을 자랑하는 동시에, 전근대적인 신분제와 차별이 존재하고, 온갖 미신과 빈곤에 찌들어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예전에 일부 기독교의 내세중심적 신학은, 현실의 모순과 부정의에 맞서 개혁과 혁명을 시도하지 못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고 설명하면서, 힌두교의 윤회설과 계급사상은 그보다 한 술 더 떠서, 현실의 정치적 경제적 신분적 위계질서를 정당화 하고, 민중이 그것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여 혁명이나 사회변화를 완전히 막아버린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한때 인도 베낭여행이 유행했던 적이 있는데, 일부 종교심이 많은 이들은, 인도 여행을 가면서 뭔가 자신의 삶에세 느끼는 무의미와 좌절을 극복할 '대오 각성(?)'이라도 할 듯이 기대하는 것을 보고 흥미롭다는 생각을 했었다.

영성에 대한 추구야 숭고한 일이지만, 자신이 그렇게 살라고 하면 절대 하지 않을 빈곤과 미신의 삶을(예를 들어 화장하다 남은 시체가 떠다니는 갠지스 강에서 목욕을 하고, 가족을 먹일 돈도 없는 이들이 동물신을 섬기는 사원에 음식과 꽃을 사다 바치는 등), 마치 그들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고, 무슨 특별한 종교적 가치가 있는 듯 경외감을 가지고 바라보는 것도, 일부 외부자들이 가진 편견과 오리엔탈리즘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같은 인간으로서 객관적으로 보이는 빈곤과 비참함을 보면서 고통하지 않고, 자신은 결코 선택하지 않을 극단적인 삶의 모습을, 외부인이자 여행자인 자신의 필요를 위해 관찰하면서 어떤 영감을 받아내려는 태도도, 인도 사회를 자신의 필요를 위해 '소비'하는 것은 아닌가 싶은 것이다. 물론 존중 받아야 할 인도 사회의 유산과 가치를 무시하고, 외부의 기준으로 부정적인 것 만을 집중해 싸잡아서 폄하하는 것도 다른 방향의 오리엔탈리즘이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 영화는 인도의 시각으로 스스로를 날카롭게 비판한 영화를 만난 것 같아서 매우 인상적이었다. 관심있는 분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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