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엽

다큐영화 "헤로니모," 그리고 전후석 감독의 강의

: 한인 디아스포라 역사에 남을 수작

 

2020년 7월 5일 이인엽

 

쿠바 혁명에 참여해 쿠바 정부의 고위직에 오른 '헤로니모 임'이라는 한인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가 있다고 해서 관심을 가졌었는데, 최근에 영화를 만든 전후석 감독의 강의를 듣게 되었고, 내친 김에 아내와 같이 영화도 관람했다.

아내는 너무 감동적이라 마음이 멍해졌다고 소감을 이야기 한다. 아마도 향후 한인 디아스포라라는 주제에 있어서 기념비적인 작품이 되지 않을까 싶은 인상 깊은 영화였고, 민족의식과 인간의 정체성이라는 주제에 대해서도 의미심장한 질문들을 던지는 좋은 작품이었다. 이미 한국에는 영화 개봉과 전후석 감독의 인터뷰 및 강의들로 내용이 많이 알려진 것 같지만, 꼭 기억할 만한 영화라 내용과 소감을 정리해 본다.

영화 헤로니모 예고편: youtu.be/zS3z3pzSE34

 

 

1. 헤로니모의 이야기

 

 
 
 

영화는 구한말 가난과 일제의 압제에 허덕이다 1905년 멕시코의 애니깽(용설란) 농장으로 떠나는 1033명의 한인들의 이야기로 부터 시작한다. 그들 중 한명이 헤로니모의 아버지 임천택이었다. 풍요를 약속한 구인광고와 달리 멕시코의 삶은 거의 노예노동에 가까웠는데, 한인들은 1910년 한일합방의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고, 없는 살림에도 독립자금을 보냈고, 임천택은 한인 학교를 운영하고 우리 문화를 알리려 노력한다. (임천택이 한인들과 독립운동을 후원한 것은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1985년 작고 후 꿈에도 그리던 조국의 국립묘지에 안장되었고 1997년 국민훈장 동백장에 추서된다.)

멕시코에서의 계약기간이 끝나고 임천택을 비롯한 288명의 한인들은 보다 나은 기회를 찾아 1921년 쿠바로 옮겨 간다. 1926년, 쿠바 마탄사스의 애니깽 농장에서 이 다큐의 주인공인 '헤로니모 임(Jeronimo Lim Kim, 한국명 : 임은조, 1926 ~ 2006)'이 독립운동가 임천택의 장남이자 쿠바 한인 2세대로 태어난다. 한국이 해방, 분단, 전쟁을 겪고 두 개의 나라가 되어버리자, 쿠바 한인들은 동족상잔과 분단으로 귀결된 조국의 모습에 실망을 느끼고 한인회도 소멸 되어 버린다. 어린시절부터 총명하고 카리스마가 있었던 헤로니모는 한인이기 보다는 쿠바인으로 자라나는데, 1946년 아바나 법대에 진학하여 나중에 쿠바혁명을 이끌 카스트로와 같이 공부하고, 쿠바의 엄혹한 정치현실에 눈을 뜨게 된다.

 

 

 

다큐에서 자세히 다루지 않는 쿠바의 역사적 배경을 약간 소개하면, 쿠바는 스페인제국의 식민지배를 받다가 미국이 미서전쟁에서 승리한 후 독립은 했지만 미국의 준식민지 상태였다. 군부 쿠테타로 집권한 바티스타 정권은 미국의 지지를 업고, 미국의 마피아들과 결탁해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반발하는 민중을 비밀경찰을 통해 잔혹하게 억압한다. 영화 대부 시리즈의 2편에서 돈꼴리오네가 마피아들과 회합을 갖는 곳이 쿠바의 수도 하바나인데, 이 당시 빈부격차가 극심하고 미국의 부자들이 휴양을 보내는 환락의 도시가 되어 있었고, 꼴리오네는 바티스타 정권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한다. 나중에 피그만 침공에 쿠바 난민, CIA와 더불어 마피아가 깊이 개입해 있었다는 설도 쿠바 혁명으로 잃어버린 자산을 되찾기 위해서라는 주장이 있고, 심지어 케네디가 후에 암살된 것이 쿠바 미사일 위기 시 전면 침공을 거부한 것에 대한 마피아의 복수라는 설도 음모론의 흔한 소재이다.

카스트로가 게릴라 투쟁을 시작하자, 헤로니모는 도시에서 혁명을 지원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마침내 혁명이 성공하자 그는 경찰공무원과 산업부 차관을 지내며, 쿠바의 한인으로 최고위직에 오르는데, 그가 산업부 차관일 때 장관은 너무나 잘 알려진 체 게바라로 4년동안 함께 일했다고 한다. 그리고 정확한 정보는 없지만 쿠바의 첩보활동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많은 훈장을 받기도 했으며 1988년 퇴직한다. 카스트로 혁명 이후 쿠바는 결국 공산주의국가가 되었기 때문에, 이런 헤로니모의 행적에 일단 거부감을 갖는 이들이 있겠지만, 카스트로와 체게바라등이 이끈 소수의 지도자들이 혁명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앞에서 언급했듯 당시 친미 꼭두각시이자 부패한 바티스타 정권에 대한 민중의 불만이 극에 달했고, 다른 선택이 없는 상황이었음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다큐에서도 언급되지만, 카스트로는 처음부터 공산주의를 내세운것도 아니었고 미국을 방문해서 외교관계를 모색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토지개혁과 마피아를 포함한 미국기업들의 자산을 국유화하자 미국과의 관계가 급속히 틀어졌고, 미국이 쿠바에 봉쇄를 진행한 후 쿠바가 결국 소련과 손을 잡으면서 미국과 수십년간의 대립이 시작되었다.

독립운동을 지원했던 아버지 임천택과 달리, 헤로니모는 쿠바사회에 동화되어 중추적인 역할을 했는데, 그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은 것은 1995년이다. 김영삼 정권 당시 광복 50주년 세계한민족축전에 초청돼 한국 땅을 밟은 그는, 발전된 조국의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고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고민한다. 민족종교인 천도교도였던 아버지를 아는 분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고 한국어를 배우지 않은 것을 후회하면서, 쿠바의 한인으로서 아버지의 유산을 이어가기로 결심을 한다. 흥미롭게도 북한과 쿠바는 매우 밀접한 사회주의 형제국이었는데도, 북한은 헤로니모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정권에 대한 홍보물을 전달하는 것 외에 한인들에 대한 특별한 지원이 없었던 것으로 나온다.

이후의 내용은 그와 함께 일했던 선교사분들의 증언으로 이어지는데, 재미한인선교사였던 양원건, 정경석, 그리고 캐나다의 한인 선교사인 이일성 같은 분들은 쿠바의 한인사회를 지원하기로 하고, 지도자인 헤로니모에게 어떤 부분에 도움이 필요하냐고 물었다고 한다. 헤로니모는 세가지를 말하는데, 1) 쿠바에 처음 정착한 한인들의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쿠바의 한인들’이라는 역사책을 발간하는 것. 2) 조국 소식을 듣고, 쿠바 내에 한국의 문화와 역사, 언어를 배울 수 있는 학교를 운영하는 것. 3) 쿠바 내 한인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해 ‘쿠바 내 한인회 설립’하는 것이었다. 이후 한인 역사책이 발간되었고, 이일성 선교사는 직접 쿠바에 들어가 한글학교를 운영하고, 헤로니모는 한인회 설립을 위해서 모든 한인들의 신분증 원본이 필요하다는 정부의 요구에, 직접 중고차를 타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900여명의 한인을 접촉해 한인회 설립을 신청한다. 그러나 두개의 한국이 존재하는 현실과 정치적 문제로 한인회 설립 신청은 거부된다.

소련과 동구권이 몰락하고 냉전이 끝나며, 쿠바가 경제적으로 쇠락하면서, 혁명과 사회주의에 대한 그의 신념도 도전을 맞는다. 미국과 남한의 풍요를 보면서 그는 고민을 시작하고, 또한 선교사들과 함께 일하면서 신의 존재에 대해서도 고민을 하게 되는데, 철저한 혁명가였고 사회주의를 신앙으로 갖고 있던 그가, 말년에 어떤 정체성을 찾아갔는지에 대해서는 증언이 엇갈린다. 평생 그와 함께 하며 신념에 투철한 혁명가로서의 남편을 기억하는 그의 아내는, 그가 절대 변했을리 없다고 말하는 반면, 그의 아들과 손자는 말년에 그가 신앙을 갖게 된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이일성 선교사는, 헤로니모는 특정 이념과 종교의 틀로 쉽게 재단할 수 없는 큰 사람이었고, 진리를 향해 가는 길은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 듯 보인다고 증언했다.

헤로니모는 쿠바 한인 이주 80주년인 2001년에 한인들이 첫발을 들였던 마나티에, 여러 한인들과 함께 한복을 입고 찾아가, 손수 디자인한 한인 기념비를 세우는 제막식을 가졌는데, 기념비는 조국을 그리는 마음에 서쪽방향을 향하고 있다고 한다. 한인으로서 제2의 인생을 불사르던 그는 2006년 별세한다.

 

 

 

 

2. 한인 디아스포라의 이야기

민족의식은 나라 밖에 있는 사람에게 더 절실한 문제라는 말을 들은적이 있다. 조국에 있으면 주변 모두가 한국인이지만, 외국에서 다른 문화와 인종들 사이에 있으면, 자신의 정체성을 계속 고민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조선의 쇠퇴와 한일합방, 고통스런 식민지배, 해방과 분단, 끔찍한 동족상잔을 겪으면서 많은 한인들은 조국을 떠나게 되었고, 멕시코에서, 쿠바에서, 하와이에서, 만주, 소련, 일본 등등 전세계에 흩어져 고된 삶을 살아왔다. 역사의 질곡에 휘말려 어려운 선택들을 내리며 생존과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분투해 온 그들의 삶은, 잊혀지기도 오해 받기도 했다. 과거 냉전시대에 우리는 이들에게 남이냐 북이냐는 선택을 강요하기도 했고, 한국인이냐 그 나라 사람이냐, 심지어 한국과 그 나라가 축구하면 어디를 응원할 것이냐 등의, 유치하고 무례한 질문을 들이밀기도 했다. 이 다큐멘터리가 인상깊은 것은 헤로니모의 삶에 쉬운 판단을 내리지 않고 그의 발자취를 잠잠히 따라간다는 것이다. 우리는 소수자로서 어려운 선택과 생존의 위기를 직면하고 살아왔던 한인 디아스포라의 삶을 쉽게 재단하려 하지 말고, 한국인의 정체성을 지켜낸 것 만으로도 존경과 존중을 보여야 한다고 믿는다.

언젠가는 분단된 조국이 궁극적으로 화해와 평화, 교류와 통일, 통합의 길을 갈 것으로 믿는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한국인의 정체성을 재발견, 재구성하는 과정이 필수적일 것이다. 반세기를 넘어선 냉전의 정치경제체제까지도 초월해서 말이다. 그런 면에서 주변부에 자리하던 한인 디아스포라 분들의 삶과 이야기는, 식민지배와 분단, 전쟁 이전의 민족의식의 뿌리와 원형을 탐색하고, 한국인을 묶어줄 공감대를 발견하며, 또한 그 지경을 넓히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슬픈 것은 제대로된 민족주의가 이 나라의 주도세력이 되지 못했다는 점, 매판 친일, 친미, 수구반동 세력이 보수를 참칭해 온 것이다. 동시에 일부 진보세력은 쉽게 민족주의를 파쇼나 과거의 산물로 폄하하는 경우도 있다. 과거 운동권내에서 NL의 득세는 제대로 된 민족주의가 없었던 현실 속에 대한 반작용이었다는 평가도 있고, 북한의 민족주의가 김씨 집안의 독재로 공고화 된 것도 역사의 비극이다.

그러나 제대로 된 민족주의도 설립하지 못한 나라에서, 손쉽게 민족의식을 폄하하고 외면하는 것은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의 부족이 아닌가 한다. 자신의 뿌리를 찾고 정체성을 찾는것은 인간의 본능이요, 자신의 존엄성과 가치를 발견하는데 피할 수 없는 과제이다. 물론 민족주의의 다양한 성격에 대해서도 많은 고민이 필요하며 배타적 민족주의, 국수주의가 아닌 열린 민족주의가 되어야 할 것이다. 혼혈 한인이 기대감을 갖고 조국을 방문했는데, 아무도 자신을 한인으로 봐주지 않아 실망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인종주의적 관점도 극복할 필요가 있다. 인간으로서 신앙인으로서, 궁극적으로는 민족의 한계도 극복하고 세계인, 인류애, 평화주의로 나아가야 함을 믿지만,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고민 없는 이가 타인의 정체성과 문화를 이해하고 대화하고 차이를 극복해 가기는 힘들 것이다.

결국 역사라는 큰 물줄기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로 구성되는데, 헤로니모가 2세대 한인으로서 쿠바 사회에 동화되고 쿠바라는 사회의 당면과제에 참여해 삶을 불태운 과정, 그리고 은퇴 후 조국을 방문하고, 쿠바 사회속의 한인 정체성을 자리매김하기 위해 분투하는 제2의 인생은, 디아스포라의 정체성이라는 주제에 중요한 내러티브를 제공해 주는 것 같다.

한가지 조심스러웠던 것은, 감독이 디아스포라라는 단어가 배태된 유대인의 역사를 인용하는 부분인데, 수천년간 흩어져 차별에 시달리면서 종교와 문화를 지켜간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이야기가 분명히 중요한 영감을 주지만, 국가 수립 후 현실의 유대인 국가 이스라엘이 보이는 국수주의적, 인종주의적 성격과, 팔레스타인 인들에게 보이는 억압적인 식민주의적 정책에 대해서 충분한 성찰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헤로니모의 쿠바한인회 활동을 지원한 세분의 선교사님들의 역할인데, 헤로니모에게 무엇을 도와주면 좋겠는가라고 묻고 그가 말한 세가지 활동을 조건 없이 지원했다는 이야기가 큰 감동이었다. 전형적으로 선교사들이라고 하면, 빨리 개종자를 얻고 교회를 세워 가시적인 성과를 내는데 집중하는 경우가 많은데, 선교지 현지인들의 필요를 조건없이 순수하게 지원하는 모습이 진실한 선교의 한 모델을 본 것 같아 기억에 남는다. 이분들에 대해서도 더 알고 싶어서 검색을 해 보았는데, 자료가 별로 없어서 아쉽다. 인터넷에서 찾은 몇가지 정보이다.

"이일성씨는 국립부산수산대학을 졸업하고 우리 나라의 원양어업개척기에 참치어선의 船長이나 基地長으로 스페인의 라스팔마스, 일본, 캐나다, 베네주엘라 등지에서 25년여를 세계의 대양을 주름잡으며 살았고 영어, 일어, 스페인어에 능통하다 최근에는 딸2명과 함께 캐나다에 거주했는데 그의 딸 한 명이 쿠바居住韓人後裔들을 위한 한글교사 겸 선교사로 지원했었는데 해외에서 익힌 그의 딸의 한국말이 부족하다고 느낀 아버지가 그 임무를 자청하여 부부가 함께 쿠바에서 한인農奴의 후예들에게 뿌리를 찾아주는 일에 여생을 바치고 있다"

"베네수엘라에서 20여년 동안 ‘자비량 선교사’(전문인 선교사)로 사역하고 있는 정경석(쿠마나 동부대학교 은퇴교수·66) 박사. 미국 텍사스주립대에서 해양수산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그가 베네수엘라를 찾은 때는 1977년. 석유산유국으로 한국보다 경제적 여건이 좋은 베네수엘라의 해양연구소 연구원으로 초빙됐기 때문이다. “원래 2년만 있을 계획이었어요. 그러다가 미국 남침례교 선교사를 도와 쿠마나 제일침례교회를 설립하게 되면서 눌러앉게 됐어요. 베네수엘라가 제2의 고향이 된 셈이죠. 특히 그 선교사가 1982년에 철수하면서 원주민 목회자를 초빙하고 2년 뒤에는 제가 아예 전적으로 맡아서 사역하게 됐습니다.” 그는 베네수엘라 해양연구소가 모체인 동부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미 남침례교단 한인남침례교회협의회 선교사로 파송 받았다. 교회 사역을 통해 ‘교회의 사명은 곧 선교’라는 결론에 도달,교회 개척에 힘썼다. 1988년에 제일침례교회 리더십을 현지인 목회자에게 이양한 뒤 라몬타니타에 가나안교회를 개척했다. 이어 중앙교회 라야나다교회 트레스비코스 교회 등 2∼3년마다 교회를 세워나갔다. 1983년 석좌교수가 된 데 이어 2000년 교수직에서 은퇴한 뒤 또 다른 변신을 시도했다. 인구 60만명인 쿠마나에는 개신교회가 100여 곳에 달하지만 정규 신학대학원 교육을 받은 목회자가 없는 현실을 직시한 것이다. 현지에 신학교를 설립하겠다는 비전을 품고 미남침례교 산하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골든게이트신학대학교에서 목회학 석사학위까지 받았다. 이어 지난 9월 쿠마나에 ‘카리브복음주의대학원대학교’를 설립했다. 이 학교는 미국 메릴랜드칼리지와 공동학위 프로그램으로 진행된다. 신학교 설립자금으로 그의 퇴직금이 고스란히 투입됐다. 현재 학부 및 목회학 석사학위 과정에 27명이 입학,미래의 목회자로 담금질되고 있다. [...] 쿠바를 처음 방문한지 32년, 그리고 22년 째 섬기고 있다."

 

 

 

 

3. 전후석 감독의 강의

강의를 통해 접한 전후석 감독의 이야기와 디아스포라를 보는 그의 시선에도 깊은 인상을 받았다. 개인적으로는 박사과정 지도 교수님 사모님의 조카라는 것을 알게 되어 반갑기도 했고, 의식있는 집안의 영향도 있었겠구나 추측해 보았다. 미국에서 살면서도, 연변과기대를 비롯해서 세계 각지를 다니면서 한인 디아스포라 분들과 교류하면서 정체성을 고민했었다고 한다. 그는 오바마 정부의 정책으로 미국과 쿠바관계의 긴장이 완화된 시점인 2015년 쿠바를 여행했는데, 안내를 나온 사람이 쿠바 사람처럼 생기지 않은 헤로니모의 딸 페트리시아여서 놀랐고, 가족들을 통해 헤로니모의 이야기를 알게 되면서 그를 세상에 소개하는 역할을 해보고자 마음 먹는다. 이후 변호사 활동을 중단하고, 약 3년간 4개국 17개의 도시를 돌며 쿠바 한인, 선교사, 역사학자 등 70여 명을 만나 헤로니모의 이야기를 기록해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고 하는데, 그의 수고로 헤로니모라는 한 거인의 삶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 정말 값진 작업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강의를 들으며, 신앙인이면서도 전형적인 기독인들의 한계를 잘 인식하고 극복하려는 모습이라 반갑기도 했다. 강의 후 Q&A를 하는데, 한 참가자가 어렵게 변호사가 되어 좋은 환경에서 일하다가,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일에 어떻게 뛰어들게 되었냐고, 어떤 신앙적 결단(?)같은 거라도 있었냐고 묻자, 감독은 웃으며 자기에게는 그런 어려운 결단은 아니었고 그냥 의미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물론 3년이라는 시간과 엄청난 노력이 들어갈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에 한것도 있지만...) 그 대화를 듣는데, 뭐랄까 한국에서 교육받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가 느껴지기도 했다. 어떤 일을 하든지 그 일의 가치보다는 남들의 인정과 사회적 위치, 재정적 보상에 민감할 수 밖에 없는 한국 사회의 구조와, 그 안에서 자라나서 언제나 몸을 사릴 수 밖에 없는 한국인 청년들의 현실이 안타깝기도 하다. 또한 신앙인으로서도 자신이 좋아하고 의미가 느껴지는 일을 하면 되는데, 소명을 지나치게 어떤 희생과 헌신으로 비장한 결단으로 무겁게 생각하는 기독인들의 태도도 돌아보게 되는 것 같다.

직접 만나뵙지는 못했고 이미 작고하셨지만, 이 다큐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헤로니모 임, 임은조 선생님의 삶을 접하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불꽃처럼 살아간 그분의 인생 앞에 옷깃을 여미우게 된다. 또한 쿠바라는 멀고 낯선 환경 속에서긴 하지만, 그의 삶에 나타난 매우 진중하고 강직하며 진실하고 끈기어린 성품이 참으로 '한국인스럽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리워 하는 가족들의 모습, 그와의 만남으로 한국인의 정체성을 찾게 되고 한인 기념비를 세우는 날, 처음으로 스스로가 중요한 사람이라고 느꼈다는 한 쿠바 한인 여성의 고백 등을 보면서, 사람을 사랑하고 진실하게 살아간 한 인생이 주는 무게감이 느껴졌다. 한일 합방도 되기전 조국을 떠난 그의 아버지 임천택에서 온전한 쿠바인으로 살아온 헤로니모의 인생으로 이어진 한국인의 성품이,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한 본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다. 이런 한 사람 한사람의 삶의 물방울들이 모여, 새로운 한국인, New Koreans 라는 아름답고 숭고한 정체성의 새로운 물줄기를 만들어갈 날을 꿈꾸어 본다.

마지막으로 헤로니모가 자녀들에게 쓴 편지를 옮겨 적는다.

조국

조국은 순수하게 나라를 지킨 조상들의 유산이자 순교자들의 제물이다.

조국은 더 나은 내일과 미래의 동포애를 꿈꾸는 모든 이들의 영감이다.

조국이라는 개념은 지리적 경계를 넘어선다.

한 나라에서 태어난 사람에게만 해당되거나 이기적인 민족주의를 따르지 않는다.

애국심은, 더 나은 세상을 열망하는 착취받고 고통받는 이들의 희망과 눈물과 합쳐져야 한다.

조국은 그것을 가질 자격이 있는 사람들의 존엄이자 명예다.

쿠바의 한인들은 쿠바 사회에 온전히 동화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들과 하나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뿌리는 영원합니다. 부정할 수 없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할 것입니다.

 

 
 

P.S. 아래에 전후석 감독의 강의를 링크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AbLR0AVPjk&feature=emb_lo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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