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엽

존경하는 윌리엄 윌버포스의 일생이 영국에서 영화로 제작되었다. 영화를 본 소감, 그리고 윌버포스와 클래팜 공동체에 대한 생각을 정리한 글로, 나들목 교회의 월간 큐티&소식지인 '도시樂' 5월호에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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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어메이징 그레이스, 그리고 윌리엄 윌버포스>

 

                                                                                                                 2007.05.16 이인엽 

 

  영국에서 노예무역폐지 운동을 이끈 윌리엄 윌버포스의 생애가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라는 제목으로 영화화 되어, 지난 2 23일 영국과 미국 등지에서 개봉했다. 워싱턴 나들목 공동체 식구들은 김경수 목사님의 강력한 추천에 따라 지난주 가정교회 모임을 영화감상 및 토론 모임으로 가졌다.

  영화는 당시 분위기를 잘 살려내었고,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했는데, 윌버포스의 전 생애를 담아내다 보니, 등장인물도 많고 스토리도 길고 복잡해, 아쉽게도 좀 지루한 감이 있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아쉬운 점은, 정치가로서의 면모와 업적에 집중하다 보니, 신앙적인 면에서 중요한 부분들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한 점이었다. 예전에 읽었던 윌버포스의 전기 등을 바탕으로 영화가 담지 못한 부분들을 소개하고 우리가 고민할 점들을 나눠보고 싶다.


 


 

1. 배경: 당시 노예무역의 현황

 

  윌버포스가 활동을 시작하던 18세기 말, 제국주의 팽창과 함께 노예는 인간이 아닌 재산으로 인정되었고, 수십만의 노예들이 서아프리카로부터 서인도제도로 끌려와 플랜테이션 농지 등에서 강제노동을 했으며, 영국의 선박소유자들과 노예무역 종사자들은 막대한 이익을 누리고 있었다. 예를 들어 (Zong)’이라는 이름의 노예선에서 일어난 사건을 보면, 배가 항로를 잃고 전염병이 돌고 식수가 떨어지자 선장은 노예들이 낮은 가격에 팔릴 것을 우려해 132명의 노예를 물속에 던져버렸는데, 이에 대한 재판이 윤리적인 문제가 아닌 단지 보험금 차원에서만 처리 된 점에서 당시 상황을 짐작하게 한다. 영화에서도 윌버포스가 서아프리카에서 600명의 노예가 출발을 하면 혹독한 환경으로 인해 도착할 쯤에는 200명 정도만 살아남는 정도라고 노예무역의 참혹성을 고발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노예무역에 따른 기득권 집단을 대표하는 국회의원들은 도살업이 호감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거기서 나온 양고기는 맛 좋은 것이듯이, 노예무역이 호감을 주는 사업은 아니지만 거기서 나오는 이익은 영국에 이롭다 라고 말했고, 당장 노예무역을 폐지하면 금융위기가 닥칠지 모른다고 반대할 정도로 그 이익과 규모가 막대했다. 오늘날로 말하면 부동산 투기를 억제하는 것 이상으로 노예무역의 폐지는 어려운 일이었다는 것이다.

 

2. 윌버포스의 회심과 소명

 

  영화에서는 윌버포스가 회심하는 장면을 다루지는 않았으나, 그가 노예무역 폐지에 헌신한 것은 회심사건과 뗄 수 없는 상관관계를 가진다. 1759년 요크셔의 부유한 가문 출신에서 태어나 캠브리지 대학에서 공부한 그는, 장래가 촉망받는 정치가였다. 형식적인 신자였던 그는 1784년과 1785년에 아이작 밀너라는 목사님과 함께 두 번에 걸쳐 유럽 여행을 했는데, 이 과정에서 복음에 대해 깊이 고민하기 시작하고 결국 신앙의 조언을 구하기 위해 존 뉴턴 목사님을 찾아가게 된다. 영화의 제목인 찬송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의 작시자인 존 뉴턴은, 노예 무역선의 선장으로 '죄인 중의 죄인'이었으나, 죽음을 눈 앞에 둔 폭풍 속에서 하나님을 만난 후 회심하여, 당시 영국 국교회 목사가 되어 사역하고 있었다. 뉴턴과의 만남으로 윌버포스는 확고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며, 자신이 가졌던 정치적 야심이나 성공적 인생을 내려 놓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결국 정치계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정치가로서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자신의 소명임을 발견한 그는, 1787년 일기에 이렇게 썼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에게 두 가지 사명을 놓아두셨는데, 그것은 <노예무역의 폐지> <관습의 개혁>이다.

  영화는 평생에 걸친 그의 싸움을 잘 묘사했지만 그 동기에 대해서는 명확히 설명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순한 휴머니즘이 아닌, 확고한 회심에 따른 신앙의 결단이었고, 하나님이 주신 소명의식이었다. 윌버포스의 이야기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신분의 변화뿐 아니라 가치관과 인생 목적의 변화를 동반하는 것임을 잘 보여준다. 나는 하나님을 만난 후 삶의 우선순위와 목적이 바뀌었는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소명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찾아가고 있는가?

 

3. 당시의 영적 부흥과 사회 개혁의 연관성

 

  윌버포스의 운동에는 앞서 말한 존 뉴턴의 영향력이 컸다. 그는 윌버포스에게 “주님께서 교회를 위해, 그리고 민족을 위해 당신을 세우셨다고 믿고 소망 한다”라고 편지를 보내는 등, 영적 멘토이자 소명을 일깨우는 격려자로서 윌버포스를 도왔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소명을 발견하고 세상을 바꿔나가는데 있어 목회자들의 영향력은 얼마나 중요한가? 결국 그리스도인들의 의식 수준은 목회자의 수준을 넘어서기 어렵다. (그가 윌버포스에게 정치계를 떠나 신학교에 입학하라고 조언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매주 듣는 설교에 따라, 세상에 무관심하며 불의에 눈감는 순한 양들을 길러낼 수도 있고, 반대로 하나님의 정의에 불타는 사자들을 길러낼 수도 있는 것이다. 당시 지도자들은 하나님이 정의를 갈망하시는 분이시며, 하나님 나라가 전도와 선교뿐 아니라 사회의 개혁을 통해 이루어 져야 한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고, 하나님이 혹사당하며 죽어가는 노예들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는 분이심을, 예수님께서 구원자 이실 뿐 아니라 해방자 이심을 잘 알고 있었다. (우리도 풍성한 삶의 기초 10강에서 분명히 배운 바 있다).

  존 뉴턴 뿐 아니라, ‘18세기 대각성 운동의 주역들인 요한 웨슬레나 찰스 시므온과 같은 지도자들도 노예제도를 강력하게 비판 하였을 뿐 아니라 지속적으로 윌버포스와 교제하고 연락하면서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는 노예무역 폐지가 단순한 사회운동이 아닌, 당시 일어난 영적 부흥의 결과물이었음 말해준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그의 책 부흥에서, 진정한 부흥은 교회의 갱신, 불신자들의 급격한 회심 및 선교의 증가뿐 아니라, 사회의 개혁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하비 콕스는 그의 책 영성, 음악, 여성에서, 1903년 미국 애주사 스트리트에서 일어난 성령운동이 방언이나 치유 같은 은사 측면 뿐 아니라, 흑인 목회자와 여성의 지도력이 드러나며, 인종차별, 성차별, 빈부격차를 뛰어넘게 되는 해방적 함의를 가지고 있었다고 지적한다(마틴 루터 킹의 시민권운동이 60년대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 현상이 얼마나 시대를 앞서간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운동이 주류 기독교로 편입되면서 해방적 함의를 잃고 은사에만 초점을 맞추는 형태로 변질되었다고 말한다. 대천덕 신부님은 20세기의 비극이, 영적 부흥을 통해 전도와 선교에 헌신한 이들과, 사회 개혁을 추구하는 이들이 갈라져 연합하지 못했던 것이라고 말했고, 이로 인해 다른 복음인 공산주의가 수많은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만일 다음 세기에 영적 각성과 사회 개혁이 함께 일어나고, 그리스도인들이 연합한다면 하나님의 영광이 크게 나타날 것이라 말했다. 윌버포스의 운동은 진정한 부흥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동시에 진정한 사회 개혁은 그에 앞선 의식개혁과 영적 부흥이 있어야 가능하다. 실제로 최종적인 노예제 폐지를 위해서는, 노예 소유주들에 대한 보상으로 영국납세자들이 2천만 파운드를 부담 했는데, 이는 윌버포스의 노력과 더불어 대각성운동이 영국의 대중에게 미친 의식의 변화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예를 들면, 우리도 분단극복이나 통일 후 통합과 재건을 위한 비용, 그리고 북한 토지 소유권 문제들이 해결되기 위해서는 이런 의식 개혁이 전제 되지 않고는 어렵다 생각된다. 프란시스 쉐퍼는 그의 책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왜 영국에서는 프랑스와 같은 유혈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는지 질문하며, 영국에서는 대각성운동이 대중에게 미친 영향으로 노예제도 폐지와 같은 개혁이 이루어 졌고, 사회적 타협이 이루어져 큰 희생 없이 입헌군주제의 도입과 점진적 개혁이 가능 했다고 말한다.

  윌버포스는 정의를 갈망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좋은 모델을 제공한다. 이 시대에 부흥과 개혁이 일어나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다면, 우리 삶을 던질 만한 일 아닌가? 이 시대의 노예들, 이 시대의 모순은 무엇인가? 비 정규직, 외국인 노동자들, 압제에 시달리고 타국을 떠도는 동포들, 강대국의 횡포와 불의한 전쟁, 분단의 모순과 경제적 불의를 비롯한 시대의 문제들을 향해, 주님의 마음으로 준비하며 싸우는 이들은 어디에 있는가?

 

 

 

4. 클래팜 공동체의 중요성

 

  영화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은, 윌버포스의 사역에서 너무나 중요한 부분인 클래팜 공동체가 제대로 언급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영화에서 노예무역 폐지를 위해 윌버포스와 의회에서 회의를 하고 정보를 수집하는 동료들은, 정치적 성향에서만 모인 이들이 아니었다. 이들은 철저한 그리스도인들로서 하나님께 받은 비전을 공유하고 있었고, 클래팜이라는 지역에서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신앙생활을 했으며 자녀를 공동으로 양육했고, 노예무역 페지와 관련해 자신이 가진 갖가지 경험과 전문성을 가지고 운동에 기여했다. 이 공동체의 지도자이자 투쟁의 전면에 나선 사람이 윌버포스였는데, 결국 클래팜 공동체가 있었기에 윌버포스가 있었고, 노예해방이 가능했다고 하겠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이는 일종의 가정교회, 좀 더 나아가 다윗의 아둘람 굴 같은 생활공동체, 신앙공동체, 그리고 사명공동체였던 것이다.

  이들은 노예무역 폐지를 위해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흑인 노예 못지않게 고생을 많이 했다고 ‘윌버포스의 백인 노예들’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다. 영화에서도 등장하는 토마스 클락슨은, 목사의 아들로 엄청난 열심으로 운동에 참여했는데, 예를 들어 중요한 증거를 가지고 있었던 어느 선장을 찾기 위해, 영국의 모든 항구와 배들을 찾아 다녔고, 317번째 배에서 증거를 확보했다고 한다. 윌버포스 부부를 서로 소개하기도 한 헨리 소론튼은 은행가로서, 결혼 전에는 수입의 6/7을 운동에 사용하였고, 이후에는 2/3를 사용하였다. 윌리암 쿠퍼의 시와 죠시아 웨지우드의 도자기등도 이 운동에 사용되었는데, 웨지우드는 자신이 만드는 머그잔에 흑인이 무릎을 꿇고 울고 있는 모습을 그려 넣고, 그 아래에다 나는 인간도, 형제도 아닙니까?”라고 써 넣었다. 이 잔으로 영국 사람들은 차를 마실 때마다 양심의 가책을 받았고 이는 노예무역 폐지 여론형성에 영향을 주었다(현재도 웨지우드 상표는 본차이나 중 가장 좋은 것으로 꼽힌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싸움을 위해 다양한 사람들을 미리 준비하신 것이다. 이들 중 몇 명은 가난하게 죽었고 자기 수입과 재산의 상당액을 노예무역 폐지에 투자하였다. 또한 그 뿐 아니라 관습 개혁을 위해서도 노력을 기울였고, 신앙서적 집필, 성경보급 및 선교를 위해서도 헌신하였다.

  하나님은 공동체를 사용하신다는 사실! 씨앗 속의 사과를 보듯 서로의 재능과 비전을 일깨워주며 격려 하는 일, 쓰러지지 않도록 서로 붙들어 주며 깨어 있게 하는 일은 공동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5. 소명을 위한 희생과 인내

 

  윌버포스는 탁월한 웅변가였고, 얼마나 영감에 차서 노예무역 폐지를 외쳤는지, 한 정치가는 그의 연설을 듣고, “처음 연설을 시작했을 때 그는 새우처럼 보였으나, 연설을 마칠 때 쯤엔 고래처럼 커 보였다.”라고 말했다. 그는 배경과 능력으로 따지면 영국의 수상 감이었던 인물이었으나, 이런 정치적 성공을 포기하고, 평생을 반대와 오해에 시달리게 했던 노예무역 폐지운동에 뛰어들었다. 재산을 운동과 자선을 위해 사용하여 말년에는 거의 파산 직전에 이르렀고 고질병과 늘 싸워야 했다. 운동이 시작된 후, 20년간의 끊임없는 연구, 여행, 대화 그리고 조직을 통해, 마침내 1807년 영국에서 노예무역이 금지되었고, 1833년 의회가 2천만 파운드를 사용하여 기존의 노예 소유자에게 보상해주고, 마침내 노예제도 자체를 끝장내기까지, 무려 26년이 더 걸렸다. 이를 통해 영국 식민지 전체에서 노예해방 완수되었는데, 이날이 바로 윌버포스 사망 3일전이었다고 한다.

  영화가 좀 지루했다는 이야기를 나누다, 윌버포스의 길고 지루한 투쟁을 표현하기 위한 감독의 의도가 아니었을까라고 농담을 주고받기도 했다. 실제로 우리의 인생과 비전을 이루는 과정은 그리 드라마틱하지는 않은 것 같다. 비전을 받고 뛰어 들 때는 전율과 감격이 있지만, 우리가 접하는 것은 지루한 일상이며 그 속에는 두려움과 결핍과 갈등이 있다. 이 과정은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교제와 공동체를 통한 격려와 공급이 없다면 이겨 낼 수 없을 것이다. 내게 주신 소명을 이루기 위해 나의 삶은 어떻게 달라져야 하며, 어떤 노력과 희생을 치러야 할까? 오늘 나의 하루는 주님이 주신 소명과 어떻게 닿아있을까?

 

6. 마치며

 

  개인적으로 윌버포스의 이야기가 마음 깊이 남아 있는 것은 미국에 오기 전에 섬겼던 예수마을 교회의 이승장 목사님께서 늘 부르짖으시던 이야기이기 때문인 것 같다. 영국에서 신학을 공부하신 목사님은 특히 윌버포스를 존경하셨는데, 학원복음화협의회나 코스타 집회 등에서 윌버포스를 많이 소개하셨었고, 청년들에게 그런 인물이 되고, 클래팜 공동체 같은 공동체를 이룰 것을 이야기 하셨었다. 이후 두란노에서 번역된 영국의 양심이라는 전기를 통해 더 구체적으로 윌버포스의 삶을 접할 수 있었는데 관심 있는 분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윌버포스의 이야기가 감동을 주면서도, 때로 멀게 느껴지는 것은 너무나 위대한 동시에 이상적이기 때문일 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윌버포스의 투쟁은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적 책임과 하나님 나라를 향한 헌신, 진정한 부흥의 이해에 있어, 중요한 모범이자 자극이 된다고 믿는다. 시대의 모순을 향해 평생을 바쳐 싸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 그들. 나와 우리 공동체가 함께 그런 꿈을 꾸고 하나님께 쓰임 받게 되기를 기도해본다.

 

※ 참고자료

- 관련서적: 가트 린, 『 영국의 양심 』, 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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