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엽

김회권 목사님의 미시간 방문과 설교 

산상수훈, 주기도문 (2015년 2월)

 

이인엽

 

'청년설교' 등의 설교집과, 성서한국, 코스타 등의 집회에서 강의로 잘 알려져있으신 김회권 목사님이 지난주 우리가 사는 미시간 주에 잠시 방문해서 설교와 강의를 하고 돌아가셨다. 김회권 목사님은, 성경과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우리 시대를 향한 선지자적인 메시지를 전하시는 한국교회의 몇 안되는 설교자시라 존경하는 분이기도 하고, 개인적으로는 김회권 목사님이 사역하셨던 교회에서 부모님이 신앙생활을 해 오셨기에 각별 하게 느껴지도 한다. 

 

김회권 목사님은 '한국교회의 선지자적 목소리의 상실'이라는 주제로 미시간 대학의 한국학 센터에서 강연을 하셨고, 앤아버 지역 교회들의 연합집회에서 '산상수훈'과 '주기도문'을 주제로 두번 설교를 하셨는데, 바쁜 학기중이었지만 두번 다 참석해서 도전도 받고, 또 좋은 분들도 많이 만났다. 

 

이번 메시지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산상수훈의 내용이 개인 적인 신앙에서 공적신앙으로, 즉, 심령 - 평화 - 화해 - 정의 - 박해 등의 순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개인 신앙'과 '공적 신앙'이 분리될 수 없으며, 평화와 정의의 실천이 산상수훈의 핵심이고, 그 실천은 핍박을 가져올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내용이었다. 개인적으로도 오늘의 기독교가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 보다는, 지나치게 바울 서신서들 중심이고, 그 조차도 매우 교리화, 탈맥락화 해서, 4영리식의 이신칭의만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 왔는데, 그런 점에서, 보다 예수님 중심으로, 그리고 산상수훈이 요약하는 그분의 가르침과 명령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해 왔었다. 오늘날의 교회가 맨날 예수님 타령하면서도 정작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과 별 관련이 없는 것은 깊이 고민해 볼 문제가 아닌가 한다.

 

김회권 목사님에 따르면, 이신칭의에 집중한 루터파 등은 산상수훈을 지키기가 불가능한 명령으로 보았고, 우리의 윤리적 절망을 유도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의존하게 하는 도구로 해석했는데,  목사님은 그 해석이 예수님이 지킬수 없는 명령을 내려준 것으로 만드는 모순이 있고, 마태복음 28장의 "내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말씀과도 충돌된다는 것을 지적하시며, 산상수훈은 지킬 수 있고 지켜야 하는 명령이라고 강조하셨다. 그리고 주기도문을 달달 외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기도에 나타난 신앙의 모델과 삶의 태도를 체질화 시키라는 명령이고, 그럴때에 불가능해 보이는 산상수훈을 실천할 수 있게 된다고 강조하셨다. 모세가 70장로들과 시내산 율법을 받은 것은, 시온산 율법이라 할 수 있는 예수님의 산상수훈과 그것을 받고 실천한 12제자, 70제자 등으로 대응되는데, 산상수훈은 구약에서 아버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가장 정확한 해석이자 완성이라는 것이 목사님의 요점이었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정의와 평화, 화해의 실천이라는게 구체적으로 무엇이냐는 질문이 따라와야 할텐데, 아쉽게도 거기까지 가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던 것 같다. 정의와 평화의 문제, 정치와 외교의 문제를 전공으로하는 나로서는, 현실주의적 부국강병의 논리, 민족이기주의, 애국주의는 결국 국가주의, 패권주의, 군사주의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고, 국내적으로는 강자의 이기심과 욕망을 위해 약자의 희생을 강요하며, 국제적으로는 폭력과 힘의논리, 흑백논리를 강제해서, 정의화 평화를 무너뜨리는 요인이 된다는 것을 절감해 왔다. 

 

미국과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자유를 누리는 우리는 핍박이 없고, 북한의 지하교인들이나 이슬람권의 기독교인들이 받는 핍박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문제들은 당연히 우리가 기도해할 일들이지만, 우리에게 핍박이 없는 것은 우리가 우리 시대의 정의와 평화의 문제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 아닌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쉬운 예로, 용산참사, 강정과 밀양, 세월호 문제를 이야기 해보자. 이런 최소한의 정의나 국민의 기본권과 관련된 문제를 이야기 하더라도 우리는 불순분자가 되는 것을 감내해야 한다. 북한과의 화해와 평화를 이야기 하면 바로 종북좌파가 되는 것이 현실은 아닌가? 미국에서 '평화(Peace)'라는 개념은 거의 비기독교 언어로 통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미국 기독교가 우파정치와 손잡고 애국주의, 군사주의의 첨병이 되면서, 평화라는 단어는 자동적으로 기독교가 아닌 좌파, 자유주의자, 히피, 환경주의자들과 연계된다. 놀랍지 않은가? 예수를 믿으나 평화와 무관한 기독교의 모습 말이다. 

얼마전 동맹국들은 물론이고 자국민들까지 광범위하게 도감청을 해온 미정보국의 행태를 폭로한 에드워드 스노든의 인터뷰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사실 이 사람은 대단한 좌파도 아니고, 리버태리안(Libertarian)에 가까운 사상을 가지고 CIA에서 일하던 사람이다. 그런데 CIA의 행태가 자기가 믿던 '미국의 자유'의 개념에 위반된다고 느낄때, 평생 국가의 적이되고 도망자 신세가 될 것을 감수하고 현실을 폭로했다. 자신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 그리고 자신의 폭로에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을 두려워 하는, 평범한 고뇌하는 청년이었다. 이 사람은 지금 미국을 종교로 믿는 수많은 보수주의자들에게 반역자라고 욕을 먹고 있고 미국의 공적이 되어 추적을 받고 있는데, 그의 방법이 옳은지를 떠나서, 원칙을 가지고 체제의 모순을 지적한 사람에게, 오늘날에도 핍박은 더 교묘하고 무섭게 다가올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문제는 우리가 정의, 화해, 평화의 문제에 관심이 있느냐는 것이다. 

 

산상수훈으로 대표되는 예수님의 명령은 근본적으로 평화와 정의를 강조하며, 이런 점에서 국가, 기득권과의 긴장관계를 동반하는데, 콘스탄틴 타협 이후에 국가주의화, 기득권화 된 기독교가 이를 무력화 시키면서, 산상수훈의 내용을 내면의 문제로 축소하거나, 아예 무시해 버렸다는 것이 오늘 기독교의 비극이 아닌가 싶다. 결국 이런 점에서, 하나님나라와 그분의 주권에서 세상에 대한 참여를 강조해야 하는데 (주로 장로교적 전통에서), 자칫하면 이 역시도 세상에 대한 '기독교 패권주의'나, 참여를 가장한 '고지론'으로 빠지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가져왔다. 결국, 개인적으로는 이런 현실에 실망하게 되면서, 아예 세상의 권력, 체제와 하나님 나라가 근본적으로 충돌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전제하고, 산상수훈에 나타난 정의, 화해, 평화 자체를 복음의 '핵심'으로 정의한 '재세례파 전통'에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김회권 목사님은 재세례파 전통 자체를 언급하지는 않으셨지만, 산상수훈을 강조하는 점에서 결국 같은 고민과 흐름에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콘스탄틴 이전의 기독교를 강조한 로핑크의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와 산상수훈의 윤리를 강조한 글렌 스타센의 “하나님의 통치와 예수 따름의 윤리”등의 책을 추천하셨다. 글렌 스타센은 풀러에서 가르치시다가 안타깝게도 작년에 작고하셨는데, 지난번 LA에 갔을때 풀러에서 직접 그분의 강의를 들었던 염혜정 전도사님과 개인적으로 절친하셨던 클라라 자매님을 통해 말씀도 듣고 책도 추천 받기도 해서 반가웠다. 

 

두번째 날은 이민자 공동체들을 위한 특별한 격려의 메시지도 있었는데, 이스라엘의 포로기 이후 1차 포로 귀환의 성과가 지지부진 했을때, 에스라, 느헤미야 등의 이민 2세, 3세들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가를 강조하셨다. 이들이 지도자로 부상하던 시기, 페르시아 제국 내에서 유대인들이 경제적으로도 매우 성공을 했고, 왕의 측근이 되었던 느헤미야를 비롯해 검증된 실력으로 지도자급에 올라간 인물들이, 제국의 관점과 소수자의 입장 양쪽에서 시대를 바라보면서, 주변부에서 중심으로, 다시 중심에서 주변부로 치고 나가면서 새로운 역사의 추동력을 일으켰고, 이스라엘 현지에서 리더들이 없고 재건사업이 지지부진할때, 엄청난 지도력과 자원을 공급했다는 말씀이셨다. 그러면서, 개인적으로 지나치게 경쟁과 물질주의에 물들어있고, 오히려 더 미국화된 한국의 청년들보다도, 미국에 있는 1.5세, 2세들이 일종의 청정지역처럼 순수함을 가지고 있고, 이들안에서 조국의 변화를 위한 새로운 리더쉽이 배출 될 수도 있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무척 인상적이었다.  

 

나도 비슷한 생각을 했었는데, 사소한 이야기지만, 한글학교에서 교사로 봉사했던 아내가, 부모의 방문학자, 교환교수 등으로 한국에서 온 아이들과, 미국서 자라난 아이들을 비교할 때, 후자들은 순딩이 들인데 비해, 한국에서 온 아이들은 매우 영악하고 기가 쎄서, 애 답지가 않고 물을 흐려놓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이건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구조 자체가 가정과 교육에 반영된 거라고 봐야 할텐데, 신기하게도 미국이 아주 큰 나라이기 때문에, 모두 하나의 흐름을 따라가는 한국보다, 세상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는 일종의 '자율공간'이 존재하고, 어떤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날 가능성이 더 크지 않은가 생각도 했었다. 물론 같이 대화하던 교수님이 지적하신대로, 한국도 아니고 미국도 아닌, 역사적 컨텍스트나 공동체적 신앙이 부재한 일종의 '맥락없는 신앙'이 되기 쉬운점도 사실이다. 그리고 일종의 거대 제국에서 소수자로 사는 상황이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패배주의와 소수자의 피해 의식에 젖어 있거나, 반대로 제국의 중심에 진입해 성공하고 그 일원이 되고 싶은 기회주의적이고 비판의식 없는 고지론에 물든 양 극단을 보기 쉬운 듯 하다.   

 

개인적으로는 작년말 뉴저지에서 열렸던 킹덤 컨퍼런스에 갔을때도 약간의 소망을 보았고, 메노나이트 대학인 고셴컬리지에서 10여명의 한국 학생들을 만났을때도, 기대감을 가졌는데, 오히려 한국의 학생들보다 덜 이기적이고 순수하면서도 바른 관점으로 역사와 신앙을 고민하는 청년들 같다는 인상 때문이었다. 

 

모세라는 인물을 다양한 관점에서 보면서 점점 더 경탄을 하게 되는데, 제국의 주변부와 중심부를 오가면서 양쪽을 모두 경험했고, 제국의 최하층에서 출생했지만, 특별한 섭리로 제국의 학문과 관점을 모두 섭렵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몰입되어 제국의 엘리트로 편입된 것이 아니라, 다시 주변인으로서, 피압박자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결국에는, 출애굽과 가나안 정착이라는 대업을 이뤄냈기 때문이다. 폭압적인 제국의 문명이나, 타락한 가나안의 토착문명이 아닌, 정의와 공평, 인애와 자비에 기반한 제3의 문명을 발생시켰다는 점에서 모세의 역할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세가 우리 신앙의 조상이라는 잘 알려진 사실을 넘어, 어떻게 한 사람을 통해,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포괄하는 하나의 새로운 문명이 배태될 수 있었는가는 두고두고 미스테리로 남는다. 많은 기독인들이 생각하듯, “다 하나님이 하셨다”라고 생각할 수 있겠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시로 주어진 것이지만, 하나님의 계시도 그것을 받을 만한 이해력과 통찰이 있는 사람이 있어야 주어진다. 시대와 역사를 모르고 독서를 안하는 사람은 40일 기도를 백번 해봐도, 단순무식한 꼴통보수 기독인으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이번학기에 기독교와 정치 수업을 하면서, 제임스 데이비슨 헌터의 “기독교는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To change the world)”라는 책을 읽어가고 있는데, 여기서 제시하는 내용도 비슷한 고민이라고 할 수 있다. 엘리트 주의는 경계해야 겠지만, 새로운 문명과 역사의 흐름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윤리적, 지적으로 탁월한 지도자들의 '네트워크'가 부상하고 그들이 새로운 사상과 문화를 출산해 내야 한다는 것. 물론 그는 “탁월함을 추구하고,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영향력과 특권의 위치에 있으면서, 엘리트주의의 덫에 걸리지 않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던지는데, 결국 중심부와 주변부의 양 극단에 매몰되지 않고, 중심부를 이해하고 섭렵하면서도 철저한 주변부의 관점과 정체성으로 무장한 이들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오늘 우리 시대는 한국 교회의 모습, 한국 정치의 현실, 그리고 크게는 미국 주도의 세계 정치경제체제 모두 한계에 봉착한 일종의 '설국열차'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그 외부에 무엇이 있는지, 어떤 대안이 있는지 아무도 알 수 없기에, 불만은 있으나 아무도 어쩌지 못하고 그 안에서 갈등하고 있지 않나 싶다. 궁극적으로는 이집트 제국주의 피라미드의 꼭대기에서 세계의 흐름을 보고, 동시에 그 최하단에서 철저한 착취와 억압속에 있는 히브리 인들의 현실과 자신을 온전히 동일시한 모세와 그의 동지들이, 전쟁과 살륙없이 하나님의 권능으로 이집트를 탈출해서 새 세상을 만든 일이, 일종의 설국열차의 문을 열어젖히고, 새로운 제 3의 길을 만든 걸로 느껴지고, 오늘도 누군가 그런 역할을 해 주었으면 하는 소망을 갖게 한다. 예수님이 일으키신 초기 기독교의 하나님 나라 운동도, 로마의 제국주의와 유대민족주의의 치열한 각축장 속에서, 유대인과 헬라인, 남자나 여자, 가난한 자와 부자의 경계를 초월하고, 제국의 폭력을 비폭력으로 대항해, 그들의 폭압성과 팍스로마나의 허구성을 폭로하며, 그 시대에 '새로운 희망의 공간'을 열어젖힌 운동이라는 생각도 든다. 

 

오랫만에 김회권 목사님의 열정적인 설교를 접하면서, 반가움과 도전속에 이런저런 생각들이 떠올랐다. 하나님 나라를 고민하고, 우리  시대의 불의와 모순에 대해 분노하며, 약자의 고통에 공감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고, 참으로 답답한 오늘의 현실속에서도, 새로운 소망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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