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엽

연애에 대한 단상7 : 두려움 없는 사랑

 

2004.10.18 이인엽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습니다."
요한일서 4장 18절

예전에 '두려움 없는 사랑'이라는 제목의 드라마가 있었다. 
보진 않아서 내용은 모르지만, 아마 위의 성경구절에서 따온 제목이 아닐까 추측해 보았다. 

사랑의 반대말은 무관심이라는 말이 있다. 
위 구절에서는 사랑의 반대는 두려움이라고 말한다. 
마치 빛과 어둠의 관계처럼, 사랑이 없는 곳은 두려움이 지배하고, 
사랑이 찾아들면 두려움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심리학적으로 인간을 통제하는 방법이 여러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두려움을 이용하는 것이요, 
또 하나가 사랑받고자 하는 욕구를 이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두가지는 상호 연관되는것 같다. 

매사에 아주 성실하고 열심인데, 뭔가 부자연스러운 사람들을 가끔 본다. 
정말 열심히 하긴 하는데, 
그것이 좋아서거나, 자신이 바라는 더 큰 무언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마치 무엇에 쫓기듯, 늘 불안에 떨면서 자신을 몰아치는 스타일의 사람들...
이들에게 만족이나 쉼이란 없다. 끝없는 경주만이 있을뿐. 
내가 다녔던 학교의 특성상 그런 사람들을 더 많이 봤던것 같기도 한데, 
어쨌거나, 나는 이러한 사람들의 특성이, 
상당부분 가정에서의 부모의 교육방식에서 나왔다고 생각한다. 

엄격하고 요구 기준이 높은 부모는, 
자식에게 자기가 요구하는 무엇무엇을 이야기 하고, 
그것에 도달하지 못하면 안된다는 조건을 제시한다. 
다시말해, 그 기준에 맞추면 너는 내 딸/내 아들이고, 
그렇지 못하면 내 자식으로 인정 못하겠다는 것이다. 

기준은 여러가지다. 몇등안에 들지 못하면, 어느 학교에 가지 못하면, 
어느어느 식의 기준을 넘지못하면... 
물론 이런 방식의 교육을 하는 부모중에 자식 망하라고 하는 부모 없다. 
다 자식 잘 되라고 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중에 심리학적 조건화가 형성되는데, 
자식의 잠재 의식에는, 부모의 기준에 맞추면 부모가 자신을 용납해줄것이지만, 
그렇지 못하면, 부모가 자신을 용납해 주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감이 생긴다. 

이는 기준에 맞추지 못했을때 오는 부모님의 '냉담함'이나 '제재'에서 강화되고, 
심지어, 성공적으로 기준에 맞추어 보상을 받을 때도, 
보상물에 기뻐하지만, 동시에 반대의 결과를 상상해보면서 불안감을 체득하게 한다. 

성공했느냐 실패했느냐 보다도, 
그러한 조건화 속에 들어가 있는 상황 자체가 
자녀의 인성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이런 교육을 받고 자란 아이들은 늘 자신도 모르는 불안속에 빠지고, 
완벽할것에 대한, 혹은 어떤 기준 이상을 맞출 것에 대한 강박관념에 빠져, 
스스로를 채찍질 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여기서 잠깐! 
연애에 대한 단상인데, 왜 갑자기 심리학과 가정문제가 나올까? 
장황해도 잠시만 이해하시라. 결국은 다 만나게 된다. 

사실 사람마다 위와 같은 경험의 강도에 차이가 있을뿐, 
인생을 살면서 경험하는 것은 
극히 제한된 경우를 빼고는, 대부분 조건화된 상황이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어린시절이 행복했다고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것은, 
적어도 어린시절에는 이러한 조건화 없이, 
부모님이 자식의 존재 자체를 기뻐하며 일방적인 사랑과 관심을 베풀어 주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러나 앞의 예에서 얘기했듯이, 그러한 일방적인 사랑의 시기는 곧 막을 내린다. 
부모의 경향에 따라 차이가 크지만, 
학교에 가게 되고 세상에 발을 들이면서, 
이제는 조건화 된 보상과 제재의 시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또한 자식이 잘되기 바라시는 부모님은 
이제 그러한 조건화를 누구보다 앞서서 집행하고 요구한다. 

장난치고 땡깡부려도 귀엽게 봐주던 사람은 하나하나 사라지고, 

'사랑지수', 즉 '내가 아는 사람분의, 나를 사랑하는 사람' 과
'관심지수', 즉 '내가 아는 사람분의, 내게 관심갖는 사람' 은
점점 낮아져만 가며, 세상이 각박한 곧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사춘기, 오춘기 뭐 그런게 지나간다. 
세상에 대한 불평, 자신의 존재에 대한 고민이 넘쳐 흐른다. 
그래도 머리 싸매고 공부하거나, 죽어라고 돈을 벌거나, 
생존을 위해 조건화의 기준에 맞추려고 노력해 본다. 
.
.
.
그러던 차에, 
인생에 다시한번 찬란한 빛이 찾아온다. 

바로 그녀/그남을 만나는 것이다 ! ! ! 

(이제 본격적으로 연애 얘기이다)

이 각박한 세상에서, 
나만을 독점적으로 그리고 무조건적으로 사랑해 줄 것 같은 사람의 등장!
이는 인생에 있어 가히 혁명적인 사건이라 아니할 수 없다. 

여기서 모든 유행가의 가사가 생겨난다. 

"널 만나기 위해, 이모든 시간을 견뎌온거야..
넌 나의 전부, 넌 나의 천사, 
너 없인 못살아, 널 위해 뭐든지 할 수 있어 " 

괜히 더위 먹어서 이러는게 아니다. 
인간에게 있어 사랑받고자 하는 욕구, 자기 존재 그대로 용납받고자 하는 욕구는, 
가장 원초적이면서도 고차원적이며, 
돈, 섹스, 권력 에 대한 욕망보다도 어쩌면 강할 수 있는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주로 단순한 남자들의 경우, 
돈, 섹스, 권력에 몰두하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사실은 사랑받고 싶은 욕구인데, 
그게 뭔지 몰라서 (말 그대로 정말 모른다!) 
딴데다 삽질하는 것이라 해석해 볼 수도 있겠다. 

다시 돌아가서, 
사랑에 빠진 청춘 남녀는, 먼 어린시절에 경험했던, 
조건 없는 사랑을 꿈꾸며, 상대에게 빠져든다. 

연애하면 애교가 는다. 목석같은 남자도, 덤덤한 여자도, 
연애를 하면 나름 귀여운 구석이 생겨나고 되지 않는 애교도 부려본다. 
나의 잃어버렸던 모습, "귀/여/움/"이 
약 10년에서 20여년 만에 부활하는 것이다.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좋아해 줄 사람 앞에서, 
사회에선 비웃음을 사다 못해 처절하게 응징을 당할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마구 표출 되는 것이다. 

그/러/나, 행복하던 연애의 허니문은 지나가고, 
또 다시 문제가 발생한다. 

이럴수가! 
나를 일방적으로 사랑해 줄 줄 알았던, 
그녀/그남 역시도 나를 조건화 하려고 드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는 사랑을 빌미로 나를 조종하고 울궈내려고 까지 한다. 
~~해 주면, ~~정도 되면, 이런 발언을 날리며. . . 

그러나 가만히 살펴보면 상대에겐 무조건적 사랑을 기대하나, 
본인도 그에 못지않게 요구하고 조건화를 하고 있음을 깨닫게된다. 

이렇게 되면, 서로간의 합의 - 무조건적인 관계는 금이 가고 
서로에 대한 조건화로, 바야흐로 애정의 줄타기가 시작된다. 
물론 잘되는 경우도 많지만, 
이런 상황속에 많은 이들이 큰 기대만큼이나 큰 실망과 상처를 경험한다. 

중년을 넘긴 많은 많은 어른들이, '결국 인생은 혼자다'라는 
좌절스런 말을 하신다.

죽고 못살 것 같은 연인도 남남 혹은 원수가 되기도 한다. 
연쇄살인범 유영철이 범행에 들어선 동기는 바로 사귀던 여자의 변심이었다. 
애인이 안마사인가 그랬는데, 거기에 앙심을 품고 안마사들을 불러 죽였다는 진술을 들었다. 
기다가 큰 만큼 그에 대한 실망과 분노는 무시무시 하다. 

과연 조건 없는 사랑은 세상에 존재할까? 

그래도 숭고한 것이 부모님의 사랑이다. 
앞에서 좀 부정적인 예를 들었지만, 
이성간의 사랑보다 좀 덜 조건화 된 것이 부모님의 내리사랑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도 완전하지는 않다. 

2차대전이 끝난후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전쟁에 나간 아들이 고향에 돌아오기 전 어머니에게 전화를 해서 
부상을 당해 눈 멀고 팔다리가 잘린 오갈데 없는 전우가 있는데, 
집에 데리고 가서 같이 살아도 되냐고 물어봤다고 한다. 
어머니는 한참을 망설이더니, 안데려오는게 좋겠다고, 
네가 처음엔 동정심에 그 친구를 돌봐주겠지만,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지쳐서 데려온 것을 후회할 것이라고 말했다.
알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은 아들이 
얼마 후 투신자살한 사체로 발견되었다. 
눈멀고 팔다리가 잘린 사람은 아들 자신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것은 예화일 뿐 일반화 할 수는 없고, 
실제 그 아들이 돌아왔을때 그 어머니가 사랑으로 돌보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어머니의 말 처럼, 인간에게는 한계가 있다. 
그 누구도, 온전히 자신을 희생하고 남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할 수는 없는 것이다. 

과연 조건 없는 사랑은 세상에 존재할까? 

사랑은 신기하다. 사랑은 에너지와 같다. 
'사랑 받은' 사람이, 사랑할 수 있다. 

무에서 유가 나오지 않는다. 
다쓴 치약을 짜내듯 사랑을 짜내어 보지만, 
우리의 사랑은 곧 바닥이 나버린다. 
인간은 받은 사랑을 다시 쏟아 낼 수는 있지만, 
없는 사랑을 창조해 낼 수는 없는 것 같다. 

또한 사랑은 부익부 빈익빈이다. 
사랑받은 사람이 또 사랑을 하고, 그래서 또 사랑받는다. 
반면, 사랑받지 못한 이들 중 다수는, 
성격이 우울하고 괴팍해 지고, 
성격이 더러우니 주변에 사람이 없어 더 외롭고 
혼자 울다가 술과 쾌락으로 마음을 달래다가, 원망속에 세상을 뜬다. 

과연 조건 없는 사랑은 세상에 존재할까? 
.
.
.
내가 아는 절대적인 사랑, 조건없는 사랑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자신을 거부한 인간을 구하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낮아져 그들의 삶과 슬픔을 함께 하다가, 
궁극적인 문제의 해결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고 
십자가에서 목숨까지 내어준 그 사랑.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이나, 
하나님의 높으심과, 그분의 처참한 죽음은 
대조를 이루며 사랑의 신비를 발한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구분되는 중요한 특징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은 믿는 자 한사람 한사람과, 
개인적으로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를 맺는 다는 것이다. 
그래서 믿는 사람은 하나님을 절대자, 창조자, 왕 이 아닌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다. 

여친을 사귀게 된 한 친구가 예전에 물었었다. 
여친을 사귀면서 느끼는 설렘과 떨림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느낄수 있을까 라고. 
그렇다라고 대답했다. 실제로 나는 그런 경험을 했으니까. 

개인적으로 하나님과의 첫사랑의 순간을 생각해 보면, 
그분은 마치 세상에 나 혼자 존재하는 양, 
독점적이고 특별한 사랑을 베풀어 주셨던 기억이 생생하다. 

나를 만나주신 그분은, 
나의 이름을 아시고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셨고, 
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아실 뿐 아니라, 
과거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현재의 어려움을 이기도록 힘을 주시며, 
내가 가야할 미래를 보여주시기 까지 했던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 놀라운 변화를 가져 왔었다. 
그분의 사랑을 받자, 쭈그러졌던 영혼이 펴지고, 
자존감이 돌아오고, 심지어 표정과 인상까지 달라졌다. 
자신이 특별한 사랑을 받은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삶의 가치와 목적을 깨닫게 된 것이다. 
심지어 한 1년동안 주위사람들에게 뭔가 달라졌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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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받은 사람이 사랑할 수 있다 했다. 
불공평하게도, 건전한 가정에서 사랑받으며 자란 아이들이, 
성격이 좋아 사람과 관계도 잘 맺고 행복하게 산다. 
불우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그만큼 메마르고 우울하다. 

그렇다면 사랑받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해야하나? 
그들은 평생, 다 짜버린 치약처럼 메마른 삶을 살아야 하나? 
조건화된 사랑, 이기적인 사랑만이 존재하는 이 세상에서, 
그들에게 소망은 없는가? 그렇다면 너무 불공평한것 아닌가? 

여기에 좋은 소식이 있다. 
축복받지 못한 것 같은 사람에게 오는 특별한 축복이 있다. 
세상은 그들에게 멀리 있을 지라도, 
오히려 하나님은 그들에게 매우 가깝게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온세상을 사랑하시되, 
또한 약하고 천하고 억눌리고 무능하고 가난한 자들을 '편애' 하신다. 
이를 하나님의 당파성이라고 한다. 
외롭고 슬프고 고난받은 이들이 하나님을 구할 때, 
그분은 그들에게 우선적으로 찾아와 주신다. 
그들에게는 하나님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이것이 불행속에 있는 축복이고, 신앙의 아이러니이다. 

성경에 나타난 그분의 성품은 
고아와 과부 - 소외되고 의지할데 없이 외로운 자들을 특별히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오래전에 나온 송명희 시인의 '나'라는 찬양곡이 있다. 
뇌성마비 환자의 입에서도, 남이 받지 못한 사랑을 받았노라고, 
공평하신 하나님이라는 고백이 나오게 하시는 분...

그분은 
고아에게 아버지가 되시고, 과부에게 남편이 되시며, 
나그네에게 벗이 되어 주시며, 피난민에게 쉼터가 되시고, 
실향민을 영원한 고향으로 초대하시어, 
그들의 모든 눈물을 씻어주시는 분이시다. 

그분의 사랑이 부어질때, 각박한 세상에 하늘의 문이 열리고, 
정말, 말 그대로, 인생에 빛이 임한다. 그 누구도 줄 수 없었던... 

그러나 인간과 세상에게 실망하여, 참된 사랑을 갈구하는 당신이여. 
인생의 문제에 대한 해답은 사랑이요,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신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을 경험 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그분이 살아계신지 진지하게 찾아 보시기를 적극 권유해 보는 바이다. 

얘기가 길어졌다. 
하나님 자랑도 끝이 없겠지만, 연애에 대한 얘기가 본론이므로 다시 돌아가 보자.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는 기독교인은, 
부모의 사랑, 이성의 사랑은 무가치하다고 폄하하는것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사랑을 성숙시키고 완성시킨다. 

 

 


어떤 사람과 연애를 할 것인가? 
나는 이런 답을 말해보고 싶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경험해 본 사람과 연애하라 !  

누가 연애할 자격이 있는가? 
사랑에 굶주려 목말라 죽어가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을 줄 준비가 된 사람이 연애할 자격이 있다. 

이 차이는 엄청나다. 
자신의 내면이 메마르고 누군가 사랑해주기만 바라는 사람은, 
연애하면서 늘 달라 달라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면 상대에게 금방 실망하고, 상대의 반응에 전전긍긍하며, 
상대를 괴롭히거나 반대로 상대에게 종속되기 쉽다. 
기본적으로 자신의 내면이 비어있기에 상대가 채워주기를, 
쉽게 말하면, 자신을 구/원/해/ 주기를 강요하는 것이다. 
이런 두 사람이 만나면 연애는 고통으로 변한다. 
이는 흡혈귀와 기생충의 만남일 수 있다. 

자신의 내면이 사랑으로 채워져 있고, 
그 사랑을 주고 싶은 마음이 있는 사람. 
이런 두 사람이 만나면, 내가 더 주었느니 네가 더 주었느니 
재고 따지고 할 일이 별로 없고, 결과적으로 싸울일도 별로 없어진다. 

'밀고 당기기'가 중요하다는 말을 한다. 
그게 없으면 사귀는 재미가 없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밀고 당기기는, 상대를 온전히 신뢰하지 못함에서 오며,
상대에게서 무언가 끌어내야겠다는 동기에서 온다. 

기본적으로 딴짓 할 마인드가 있는 사람이, 밀고당기기 한다고 한사람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할 수 있나? 
밀고 당기기 한다고 없는 희생이 나오나? 
결국 그것도 다 쓴 치약 쥐어 짜기에 불과하다. 
그렇게 되면 연애 자체가 아주 피곤해 지고, 
기쁨이 아닌 두뇌싸움(?)이 되어 버린다. 
이긴들 무엇하리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인간의 사랑이 온전해 질 수 있다. 
절대적인 사랑을 받은자가 절대적인 희생을 보일 수 있다. 
조건적인 사랑이 아닌, 어떤 결과물이 아닌, 
그 사람의 존재 그 자체를 기뻐하는 사랑. 

이런 사랑을 받은 자는 자유를 경험한다. 
이런 사랑을 받은 자는 두려움이 아닌 기쁨으로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사랑을 쟁취해 내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것이 아닌, 
이미 얻은 용납위에서 풍성함을 누리는 삶. 

누군가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런 용납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부모가 되든 부부가 되든, 사랑을 해도, 상대방을 묶어놓고 조종하려고 든다. 
그 동인은 두려움이다. 

그러나 두려움은 사랑을 만들어 낼 수 없고 또 다른 두려움만을 심어준다. 
두려움이라는 진공은 사랑으로서만 채워질 수 있다. 
.
.
.
사랑의 빛이여, 비취라!
온세상을 환하게 비취어 모든 두려움을 내어 쫓으라!

가정마다 거리마다, 
부모님의 사랑과, 형제자매의 사랑과, 친구간의 우정과, 
무엇보다, 청춘 남녀의 아름다운 사랑이 온세상을 뒤덮으라!

외로운 인생길에 
가정의 따스함과, 우정의 유쾌함과, 연인의 달콤함으로, 
위로와 기쁨을 보게 하라. 

그러나 너희 모두는 알라! 

사랑은 우리안에 남아있는 '그분의 형상'이며, 
그분의 사랑만 우리의 사랑을 완성시킨다는 것을!
.
.
.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다 하나님에게서 났고, 하나님을 압니다. 

사랑은 여기에 있으니,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주시고, 
우리의 죄를 속하여 주시려고, 속죄제물이 되게 해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고, 
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가운데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신약성경, 요한1서 4장에서 


2004년 10월 19일

두려움 없는 사랑, 축복된 1주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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