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엽

연애에 대한 단상5 : 크리스챤과 연애

 

2003.10.28 

이인엽 



 


 

오늘은 크리스챤과 연애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보자.

'신실한' 크리스챤들이 연애함에 있어 나타나는
몇가지 문제들이 있다.
오늘은 여기에 대해 생각해 보자.

단 이 내용은 '신실한' 크리스챤에게 해당하는 거지,
전체적으로 일반화 할수는 없다.


1.
첫번째 운명론적 사고이다.

신실한 크리스챤들은 자신에게 딱 맞는 한사람, 혹은 정해진 배필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짝지워 주신 베필을 위해 기도하고,
관심있는 사람이 생기면 '이 사람이 맞습니까 Yes or No?'를 질문한다.

그러다가 혼자서 Yes라는 확신을 얻으면(자의적인 해석에 의존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그것을 기정사실화 하여 상대방에게 접근한다.
소위 '당신에 대해 기도 응답 받았다'식의 황당한 접근법이다.
이럴 경우 상대는 부담을 느끼고 자연스럽게 관계가 진행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는 '예정' 혹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잘못 이해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미래를 아시지만 그것을 결정해 놓으셨다기 보다는 예지하신다는 것에 가깝다고 본다.

성경을 보면, 역사는 하나님의 뜻, 궁극적인 목표의 성취이지만,
그 과정에서 인간은 분명한 자유 의지를 가지고 행동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놀라운 정도로 존중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럼에도 그분의 궁극적인 뜻은 이루어진다.

그래서 오히려 기독교는 운명론이 아닌,
하나님의 뜻 안에서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꽤 많은 경우
크리스챤들도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를 누리기 보다,
기계적인 운명론에 의지하고자 하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이 특별히 응답을 주시거나 배우자를 알려주시는 경우도 많다.
그럼에도 그러한 응답도, 인격적 만남과 사랑의 감정이 동반되고 확인되어야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나,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처리 하시는 부분이 있고, 또 우리가 스스로 해야 할 부분이 있다.

그러나
인격적인 만남에 존재하는 불확실성과 거절감이 두렵기 때문에,
때로 우리는 관계를 필연적인 만남으로 규정하려고 노력한다.

만남의 과정에 있었던 신기한 우연들, 여러 정황들 등등,
긍정적인 정보를 조합하여,
하나님의 뜻일 가능성이 높다고 스스로 판단한다.

그리고 기대가 깨어지면, 하나님께 항의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잘못된 방식으로 의존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쉽게 말해 우리가 해야 할 자유와 선택의 문제까지도
일종의 '신탁(oracle)'에 의지해서 그저 따라가가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유아기적 신앙에 머무르는 것일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딱 정해진 배우자가있다는 접근은 위험한 생각일 수 있다.
물론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정해주신 베필이 있을 수 있다. 결혼하고 나중에 돌아보면 말이다. 
그러나 내가 미리 그것을 섣불리 확신하고 단정지을 수 없다는 말이다.

그것을 찾아가는 과정 - 인격적인 만남과 서로를 알아감 - 은,
어떤 '응답'을 통해 '점프'해 갈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답을 아시지만, 웬만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신다. ^^

그것은 우리가 운명의 순응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우리의 인격을 성숙시켜 나가고,
인간을, 삶을, 그리고 자기 자신을 이해해 나가기 원하시기 때문이리라. . .


2.
비전이나 목표가, 사랑(관계)을 압도하는 경우가 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야 하고,
우리 사람의 모든 영역과 부분이,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배우자 문제에 있어도, 비전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어 서로의 비전을 공유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관계라면, 함께 살아가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비전만을 위해 이성관계를 생각하는 것도
참으로 부자연스럽고 비인간적인 일이다.

예를 들어, 신학생들은 자신의 배우자로서 보다는, 이상적인 사모감을 찾는 말이 있다.
신학교에서는 유아교육과를 농담반 진담반으로 '사모학과'라고 부른다는 말이 있는데,
신학생이 교회를 개척하면 사모는 교회 부설 유치원을 운영햐는 경우가 많아서라고 한다.

장로님이나 목사님 딸, 3대이상 신앙을 가진 집 딸 등을 조건으로 생각한다는 말도 들어본것 같다.

물론 다 좋은얘기이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이 아닌 '기능'을 보고 배우자를 찾는것이 아니냐 하는 점이다.
비전이라는 이름으로 사람이 일종의 '상품화' 될수 있다는 말이다.

연애와 결혼은 인간과 인간이 사랑하는 일이다.
어떤 목표만을 위해 두사람이 함께 하는 건, 꼭 결혼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이다.

때로는 앞에서 말한 '두려움'이 이러한 현상의 원인이기 되기도 한다.
자기 자신에 대해 자신이 없을 경우, 무언가 거창한 비전을 이야기 하면서,
관계를 규정하려 하는 경우가 있다.

이성적인 매력에 끌리는 것을, 비전을 위해서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반대로 매력이나 사랑의 감정이 없는데 비전을 위해서 관계를 선택하기도 한다.

위험한 일이다.


이성 문제를 영적 권위로 해결하려는 일도 있다고 한다.
영적 권위자가 당사자들의 동의 없이 결혼 상대자를 정해주거나,
심지어 리더가 멤버에게 자신이 상대에게 맞는 배우자라고 강요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참으로 황당한 일이다.

기독교는 인간성을 초월하는 것이지,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간성을 무시하게 되면, 참 우습고도 슬픈 일들이 벌어진다.


3.
크리스챤 중에 특히 신실한 사람중에
지성과 인격에서 오히려 매력이 떨어지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이런 농담을 한다.
권사님들이나 집사님들이 신앙 좋은 자매라고 하면서 소개시켜 주시면,
절대로 만나지 말라는. ^^

자매들이 주로 많이 하는 얘기는
크리스챤 형제들 중에 자신감과 카리스마가 있는 사람이 적다는 것이다.

실제로 크리스챤들은 겸손과 회개를 미덕으로 삼고 있는데,
이런 점이 약간 왜곡되어, 자신감 없음과 유약함으로 나타지 않는가 생각해 본다.
 
성숙한 신앙으로 자기 인생과 미래의 배우자에게 책임감 있게 행동할 사람이어야 하는데, 
신앙을 갖다 대며 자신을 합리화 하고 책임지지 않고 변명만 하는 무책임하고 미성숙한 이들도 많다. 

반대로 신앙좋고 열심이 있는데
자기 고집으로 똘똘 뭉친, 상대에 대한 배려가 부재한,
'불도저형'의 형제들도 있다.

각 집단마다 이상적으로 제사한는 인간형의 척도가 있는데,
교회에서는 그것이 교회활동에 대한 헌신과 열심이고,
여기에서 인정을 받으면 다른데서는 면죄부를 받는 것이다.

그래서 일은 열심히 하는데, 인격적 성숙은 전혀 안되고
자아가 전혀 깨어지지 않는데도, 인정은 받고,
다른 사람들 무지하게 상처주면서, 공동체의 중심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형제들이 있는 것이다.

이런 형제와 교제하고 결혼하는 자매는 참 불행하다 하겠다.


형제들도 신실한 크리스챤 자매에게서 별 매력을 못느낀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다 그렇지는 않지만, '신실한 크리스챤 자매'의 이미지를 생각해 보면,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 떠오른다.

평면적 사고... 윤리적 억압... 바른생활적 태도...
홀리한 분위기... 몰개성...
선함과 바름만을 추구하며, 은혜스러워요~를 반복하는
약간 부자연스럽고 부담되는 분위기.
 
이것은 어쩌면 교회 교육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근본적으로 기독교는 윤리를 초월하는 것인데,
오히려 윤리로 사람을 통제하고 양육하기도 하는 것이다.

복음의 능력으로 사람을 자유케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능력의 공백을 윤리적 억압으로 메꾸어 가는 것이다.

그런 환경속에서 자라난 크리스챤은
두려움과 부자연스럼을 체화하게된다.

관계를 맺을때도 자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지 못하고
계속해서 좋은 모습을 보이기 위해 노력하면서 부자연스러움을 양산한다.

순종과 이타심 만을 보이기를 요구받았기에,
늘 동일한 정답만을 제시하고,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에 솔직하지 못하고, 반대로 원하지 않는 것을 원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늘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에, 문제점을 볼 수 있는 능력은 극히 약하고,
좋다좋다하고 넘어가고 은혜로 넘어가는 것이 습관화 되어 있다.

이런 경우 지적인 발전이 거의 없어서,
독립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는 지적 유아상태로 남아있게 된다.
늘 동일한 정답이 있기 때문에, 스스로 판단할 필요를 못느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유케 하시고 처음 창조하셨던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회복시켜 가시는 분이다.
그러나 이를 담고 있는 현실 교회의 왜곡된 면들은
이러한 회복과 성장의 과정을 방해하기도 한다.

물론 부정적인 경우를 지나치게 유형화 시킨 감이 있긴 하지만,
기독인들 내에 분명히 존재하는 문제점이 아닌가 싶다.


4.
연애 얘기를 하다가 진정한 기독교에 대한 논의로 빠졌다.
빠진 김에 이제까지의 세가지 얘기를 정리해 보자.

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다.
그러나 그 자유를 누리기 위해선 두려움을 직면해야 하고,
또한 자유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한다.

이.
하나님은 인간됨과 인간성을 정죄하거나 무시하지 않으시고 존중하시는 분이시다.
기독교는 인간성을 초월하는 것이지,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간성을 무시하게되면, 참 우습고도 슬픈 일들이 벌어진다.

삼.
대부분의 종교는 윤리와 죄의식으로 인간을 통제하고 착취한다.
기독교는 그러한 종교권력을 파괴하며, 복음안에서 인간을 자유케 한다.
죄와의 단절을 가능케 하며, 죄를 이길 힘을 부여 하며,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 세계에서 마음껏 뛰놀도록 만드는 것이다.


단 ! ! !
앞에서도 말했지만,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크리스챤이 지나치게(?) 신실해질때 일어날 수 있는 오류이다.
기본적인 주되심이 없는 크리스챤이라면,
자유를 이야기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여 그에 순종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또한 비전으로 인한 문제를 이야기 하기전에,
먼저 자신의 인생을 드리며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을 찾아야 한다.

크리스챤으로서 신앙있는 사람과 결혼할 뿐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비젼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야 함은 말할 필요도 없다.
노파심이지만, 나는 이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왜곡되어 나타날 가능성을 우려하는 것이다.

세상을 이길 힘이 없다면, 먼저 세상과 구별되는 훈련을 할 필요도 있다.

거룩에 대한 훈련을 우습게 보거나, 어설프게 자유를 이야기 하는 것은,
이제까지 이야기한 문제들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


5.
이것저것 떠오르고,
약간 너무 글이 어렵게 흐른것 같다.

다시 연얘 얘기로 돌아가, 마무리를 하자.
단, 이제까지의 우려들을 넘어, 연애의 아름다운 측면을 살펴보자. ^^
부정적인 측면에 대한 묘사는 결국 이상적인 측면을 부각시키기 위해서이다.


연애는 하나님이 주신 모험이다. 두려움을 직면하는 믿음과 용기가 필요하다.

결혼은 평생 '믿음' 안에서 '꿈(비전)'과 '사랑'을 함께 하고자 하는 두 사람의 약속이다.
꿈은 사랑안에 힘을 얻고, 사랑은 꿈을 향해 빛을 발한다.

연애는 잃어버린 또 하나의 자신을 발견하는 과정이며,
상대의 인격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해가는 과정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 중에 가장 아름 다운 것이 배우자이다.

많은 이들이 전도서의 핵심구절을
12장1절 "너는 청년의 때에....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라고 말하지만,

나는 9장9절이 이에 못지 않은 중심 메시지라고 믿는다.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이는 네가 일평생에 해 아래서 수고하고 얻은 분복이니라"
-전도서 9장9절-

여기에 한구절을 더하자면,
잠언 5장 18,19절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그는 사랑스러운 암사슴 같고
아름다운 암노루 같으니
너는 그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며
그 사랑을 항상 연모하라"

나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아름다운 구절을 집에 걸어놓지 않는지 궁금하다.
(문맥상의 오류가 있는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보다 훨 좋지 않은가?)
이 말씀이야 말로 하나님이 허락하신 자유와 사랑의 기쁨을 잘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 . .

이 말씀들에서 금욕주의적 요소는 찾아보기 어렵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이 창조하신 풍성함을 온전히 누리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다.

죄악은,

그것이 더 좋지만, 억지로 참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더 좋은 것을 파괴하고 누리지 못하도록 만드는,
거짓이자 독소인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움을 기뻐하는 것이야 말로,
죄와 더러움을 이길 힘이다.

Negative 전략이 아닌 Positive 전략.

또한, 반대로 죄와 더러움에서 떠나는 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아름다움과 충만한 기뿜을 누리는 길이기도 하다.

잠언 5장에서 18,19절을 둘러싼 나머지 말씀들이 그것을 말하고 있다.
.
.
.
밤은 깊고,
졸음은 찾아오고,
글은 길어졌다.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와 사랑의 기쁨이,
나와 우리를 채우고,
이 세상의 더러움을 씻어 넘쳐 흐르기를 소망해 본다.

아름답게 연얘하고
믿음안에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것 자체만으로도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첫 걸음이자,
인생에서 가장 가치있는 부분이라 하겠다.

부디 이러한 축복이 나와 우리안에 가득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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