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엽

서평: 제임스 헌터, <기독교는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가>

 

2015년 7월 이인엽 

 

제임스 헌터의 <기독교는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가>를 지난 학기 가르친 ‘Christianity and Politics’ 수업에서 교재로 사용했었는데, 청어람 매거진과 연락이 되어 서평을 기고 했습니다. 학생들과 수업을 진행하며 자세하게 읽고 토론을 한지라, 서평이라 하기에 조금 긴 요약과 분석이 되었고, 서평을 빌미로 설익은 생각들을 늘어놓기도 했네요. 책이 나온지는 몇년 되었는데, 사 놓고 못 읽은 분들도 꽤 많은거 같더군요.^^ 책을 이해하고 토론을 하는데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글이 올라온걸 보니 생각나는 분들이 많네요. 쓰다보니 글이 A20페이지가 될 정도로 늘어지고 마감도 무한연장되었는데, 미국 출장후 바쁘신 중에도 글을 편집해 준 오수경 간사님께 감사드리고, 초고를 읽고 의견을 주신 LA허현 목사님과, 칼빈의 송요한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항상 좋은 글 써주시는 김요한 목사님이 수고하시는 새물결출판사에서 나온 책인데, 이미 많이 팔렸겠지만, 이 서평으로 책이 읽히는데 조금이나마 힘이 되면 좋겠네요. 예전에 나온 이주일 연구원님의 발표와 홍순주 간사님의 간단한 서평도 참고를 했습니다. 1부에서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반성 부분에서는 복상에 올랐던 김용주 님의 글과, 김기현 목사님의 글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2부에서 미국은 우파의 기독교 국가론에 대해서는 손태환 목사님의 글을 소개했구요. 3부에서 소개한 저의 생각들에 영감을 주신 김회권 목사님, 고셴에서 좋은 교제 나눈 김성한 간사님, 몇년전 아틀란타 평화 컨퍼런스에서 만나뵌 조헌정 목사님과 장병기 목사님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3부에서 정리한 생각들에서 중요한 부분 하나는, 메노나이트 운동 관심자로서 지지와 관심을 표현하는 것도 있는데, 한국과 미국에서 개척자로 활동하시는 분들에게 힘이 될 수 있다면 좋겠네요.

 

- 1부: 기독교와 세계변혁 http://ichungeoram.com/9130 

 

 

<기독교는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가>에 대한 긴 이야기를 시작하며

최근 이 주제로 나온 서적들 중 가장 주목할 만하다는 평가를 받는 <기독교는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가>는 지난 학기 가르친 ‘Christianity and Politics’ 수업에서 교재로 사용했었는데, 청어람 매거진과 연락이 되어 서평까지 써 보게 되었다. 이미 출간된 지 몇 년이 지난지라 읽은 분들도 많고, 책 나눔이나 세미나도 꽤 있었다고 하는데, 아직 읽지 못한 분들에게 책을 소개하고, 읽은 분들과는 의견을 나누는 차원에서 글을 써 본다. 학생들과 수업을 진행하며 꽤 자세하게 읽고 토론을 한지라, 서평이라 하기에 조금 긴 요약과 분석이 되었고, 설익은 생각들을 늘어놓는 글이 될 수도 있겠다. 필자가 신학자가 아닌지라 신학적인 이해나 지식이 부족할 수 있다는 점도 미리 양해 부탁드린다.

 

이 책에 기존의 서평으로는, 2014년 8월 25일 현대기독교연구원의 공개토론회에서 최경환, 이주일 연구원이 발제한 내용을 요약한 다음의 두 기사들을 참고하면 도움이 된다. ※기독교는 과연 세상을 변화시키는가(개혁정론) ※美기독교가 대중문화 영향력 상실 이유 '그들'이 없었기 때문(기독일보) 짧지만 책의 핵심을 잘 요약하고 있는 IVF 홍순주 간사의 글도 참고할만하다. 기독교와-세상을-변화시킬-잠재력을-가진-책(홍순주) 

 

책의 저자인 제임스 데이비슨 헌터는 버지니아대 사회학과 교수로 종교와 문화 사회학 분야에서 잘 알려진 학자인데, 주로 복음주의와 문화의 변화에 대해 연구해 왔다. 그는 1991에 출판한 자신의 책 <Culture Wars: The Struggle to Define America>(Basic Books, 1995)를 통해 미국에서 ‘문화전쟁(Culture War)’이라는 개념을 대중화시키기도 했다. 이 책은 매우 야심찬 기획이라 할 수 있는데 기독교의 문화 변혁과 사회참여에 대한 기존의 전략들을 분석, 비판한 후 ‘신실한 현존’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아직 읽지 않은 분들이 있다면 이 분야를 오랫동안 연구해온 학자의 거시적인 시각과 통찰을 접하고 세상에 대한 기독교의 접근을 고민할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추천하고 싶다. 하지만 많은 번역서들이 그러하듯 이 책도 철저하게 미국적인 맥락에서 쓰였다는 것을 알아두면 좋겠고, 한국의 상황에 정확히 맞아떨어지거나 우리에게 완벽한 대안을 줄 수는 없다는 것도 의식할 필요가 있다. 미국 기독교의 역사나 신학적, 정치적 입장 등에 대한 선 이해를 전제하고 쓰인 책이고, 추상적, 철학적, 신학적 논의도 많이 있기에 읽기가 아주 쉬운 책은 아니라는 점도 언급해둔다.

 

기독교와 세계변혁

 

헌터는 1부의 2장과 3장에서 찰스 콜슨, 빌 브라이트, 빌리 그래함, 오스 기니스, 짐 월리스 등 잘 알려진 기독교 지도자들의 이름을 열거하며 세상에 접근하는 기독교의 전략에는 개인의 “마음과 생각이 바뀌면” 세상이 바뀔 것이라는 단순하고 순진한 전제가 깔려있는데, 그것이 심각한 오류라고 지적한다1). 기독교 세계관적 접근이 이원론을 거부하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으나, 개인의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바뀐다는 전제 자체가 개인주의적 ‘관념론’이기 때문에 결국은 이원론을 강화하고 개인주의, 소비주의적 접근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저자의 연구에 따르면, 문화는 사회적 실제들과 구조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역사의 무게가 실렸으며, 몇몇 중요한 개인들이 아닌 그들의 네트워크가 지탱하고 있다. 그는 4장에서 문화를 바꾸는 것은 “네트워크의 힘과 그것이 만드는 새로운 제도,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공동체들”이라고 설명하고, 많은 경우 개인의 생각이 문화를 움직이기보다 문화가 개인의 삶을 지도하며 마음과 정신을 형성한다고 말한다. 이어서 5장에서는 로마의 기독교화, 수도원 운동, 르네상스와 계몽주의, 대각성 운동, 윌버포스와 노예제 폐지 운동 등 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문화 변혁의 예를 제시하며 ‘문화 형성의 핵심부에서 활동하는 엘리트 네트워크’가 중요하다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6장에서는 미국 기독교의 문화적 행태를 분석하며 반지성주의적 경향이 있고, 고급문화가 부재하고, 문화자본 축적이나 지성인, 예술가, 사회 혁신가 등에 대한 지원이 빈약하고, 신자들의 내적 필요에 맞추어 ‘대중화’ 되었다고 평가한다. 결국 기독교는 문화 생산의 핵심으로부터 주변화되었고, 문화생산의 핵심부에서 공통된 의제를 가지고 강력한 사회적 네트워크로 활동하는 기독교인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7장에서는 논지가 다소 엘리트주의로 흐를 수 있다는 것을 의식했는지, 탁월성을 포기하는 기독교의 포퓰리즘(Populism, 대중영합주의)을 비판하는 동시에 엘리트주의의 오만과 권력지향성, 착취적 특성을 인정하며 “탁월함을 추구하고,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영향력과 특권의 위치에 있으면서, 엘리트주의의 덫에 걸리지 않는 것이 가능한가?”라고 질문한다. 저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결국 ‘권력장악’이 아닌 ‘신실한 현존’인데, 이는 기독교가 권력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 라는 질문으로 연결되고, 2부에서 본격적으로 다룬다.

 

로잔 언약, 세계관 운동, 그리고 복음주의에 대한 반성적 회고

 

1부 내용에서 한국적인 상황에 적용하고 논의해 볼 점들이 꽤 있다. 복음주의 운동 전반을 보면, 1974년 로잔 언약 등에 기초해 개인구원과 사회참여의 균형을 맞추려는 노력이 존재했지만, 결국 ‘한 사람을 바꿔야 세상이 바뀐다’는 전제로 인해(이는 어떤 면에서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전도와 제자훈련에 초점을 맞추며 이와 밀접한 기독론, 구원론 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한 것은 복음주의의 강점이자 한계로 작용했다는 생각이 든다.

 

사회참여와 총체적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하지만 결국 실제 에너지와 역량은 단기적 목표라고 할 수 있는, 전도와 제자훈련, 즉 재생산과 성장에 전폭적으로 맞춰져 있었다. 그 결과 헌신되고 훈련된 개개인들을 배출했지만, 사회 문화에 맞닥뜨렸을 때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 했다. 전도와 구원이 복음주의의 핵심인 것은 맞지만 구원론, 기독론이라는 제한된 틀로 성경을 보고, 전도 환원주의적 행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 실천적인 면에서 하나님 나라의 활동은 언제나 제한적일 수밖에 없고, 전도를 위한 변증이나 부수 활동을 넘어설 수 없다. 예를 들어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과학을 연구하거나 문화 활동을 하는 것도 창조를 증명하거나 기독교 문화를 전파하는 목표에 종속되고, 이웃을 사랑하고 약자를 돕는 일 조차도 전도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물론 이는 신학적, 혹은 철학적인 전제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운동의 기본 단위인 교회, 선교단체 등의 조직경영이나 성장 논리와도 밀접하게 연결된다. 

 

도식화된 명제로서의 세계관이 성경의 내러티브를 제한하고 왜곡한다는 비판은 이미 많이 제기되었다. ‘창조 · 타락 · 구속’이라는 틀과, 속죄와 구원이라는 개인적 변화에 대한 믿음이, 세상의 악에 대한 도전과 변혁이라는 차원에서도 그대로 작동할 거라 순진하게 기대했고, 시대를 지배하는 욕망의 힘과 구조적 악에 대한 이해의 부족도 컸다.

 

이러한 지적은 80년대의 세계관 운동에도 유사하게 적용해 볼 수 있다. 한국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미국의 논의를 거의 그대로 흡수했기에 기독교 세계관적 접근에 대한 저자의 비판은 한국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2). 필자도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수혜자라 할 수 있고, 이원론을 극복하고 세상에 대한 고민과 사회참여의 성경적 근거들을 제시해준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고 본다. 하지만 저자의 지적처럼 생각이 바뀌면 행동과 세상이 바뀔 것이라는 전제가 너무 안이한 생각이었다는 반성도 하게 되고, 시대적으로 이원론적 근본주의에 대한 불편함과 마르크시즘, 자유주의, 해방신학 등에 대한 거부감이나 열등감을 가지던 복음주의 기독인들에게는 ‘우리도 세상에 할 말은 있다’라는 식의 자기만족도 컸다. 생각을 바꿔야 세상이 바뀌기에 지식인 중심의 세미나에서 벗어나지 못했는데 민주화 운동, 노동운동, 통일 운동 등이 분출하고 사회가 격변하는 과정에서, 시대적인 실천이나 현장에서 보인 희생은 없이, 복음주의 내부의 소비에 그친 것은 아닌가 하는 아쉬움도 있다.

 

도식화된 명제로서의 세계관이 성경의 내러티브를 제한하고 왜곡한다는 비판은 이미 많이 제기되었다. ‘창조 · 타락 · 구속’이라는 틀과, 속죄와 구원이라는 개인적 변화에 대한 믿음이, 세상의 악에 대한 도전과 변혁이라는 차원에서도 그대로 작동할 거라 순진하게 기대했고, 시대를 지배하는 욕망의 힘과 구조적 악에 대한 이해의 부족도 컸다. 상대적으로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풍요를 누린 서구 선진국의 신학(예를 들어 화란 개혁주의)은 아무래도 세상의 악과 고통에 대한 고민의 깊이가 얕다는 특징이 있다. 이를 받아들인 한국의 세계관 운동도 마찬가지다.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이해하는데 취약했으며, 약자의 고통에 대한 공감은 부족했으며, 예언자적 통찰과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했으며, 엘리트주의적이며 고지론을 추구하는 한계가 있었다. 진보 보수 기독교의 분열이 뚜렷했던 상황의 한계도 있지만, 중남미에서 태동한 해방신학이나, 한국의 민주화, 노동운동 등에서 태동한 민중신학에 대해서는 도외시하는 면도 있었다. 복음주의자들이 이런 진보 신학에 동의하기 어려운 면이 있었더라도, 보다 건설적인 대화나 신학적으로 종합하는 과정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다.

 

결과적으로 평신도 중심, 대학가 중심의 엘리트주의적 지성 운동에 그쳤고, 그 성과물조차 신학교나 목회자, 지역 교회로 흘러가거나 뿌리내리지 못해 기독교계 전반에 대한 파급력에 한계가 있었다. 시간이 지난 지금, 한국교회 전반에 대한 불신과 회의의 목소리가 많다. 세상의 변화는 고사하고 종교로서의 최소한의 도덕성이나 자정능력이 의심받고 있고, 기독교인 대중 전반은 기초적인 기독교 지성과 민주시민의 소양조차 갖추지 못한 상태로 사회의 건전한 변화와 발전에 걸림돌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닌가 우려되기도 한다.

 

물론 기독교 세계관 운동에 이 모든 책임을 돌리거나, 무용론을 말하기는 어려우며, 미미하게나마 한국의 복음주의권이라고 말할 수 있는 네트워크가 형성되는데 있어 기초를 제공했다는 의미는 크다. 몇몇 선교단체나 기독인 운동의 흥망을 보면서도, 최소한의 기독교 세계관과 지성적 기반을 가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절감하기도 한다. 기독교 대중은 과거 세계관 운동 수준의 정보나 고민도 접하지 못한 채 이원론과 반지성주의, 근본주의적 경향이 심화되는 상황이기도 하다. 이미 2000년대가 오면서 이미 기독교 세계관 운동에 대한 많은 반성과 검토가 이루어졌는데, 쉽게 세계관 운동을 폐기하기보다, 새로운 신학적 연구 성과를 통합하고, 시대와 상황에 맞춰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하겠고, 이 책의 주제들도 그런 고민과 연결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저자가 말하는 문화 형성의 핵심부에서 작동하는 네트워크 공동체는 한국적 상황에서 가능한가? 그리고 사회와 권력을 이해하고 그에 접근하는 기독인의 관점과 접근법은 어떠해야 하는가? 이 질문은 2부와 3부를 거치면서 조금 더 다뤄진다. [2부에 계속]  

 

주ㅡ 1) 역자가 “이런 주장이 거의 전적으로 남용되고 있다.”라고 번역한 원문은 “This account is almost wholly mistaken” 으로 보다 신랄한 뉘앙스를 담고 있다. 2)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반성과 관련해서는 2002년과 2007년 경, 잡지 복음과 상황에서 진행된 토론을 참고하시길; 2009년 5월에서 9월까지 복음과 상황에 연재된 김용주의 “기독교 세계관 운동에 대한 소고(1~5)”도 참고; 청어람 온라인강좌 ARMC에서 진행한 대담 “그들이 말하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기독교 세계관 (2014/01/31)”도 관련 논의를 잘 정리하고 있다.

 

- 2부: 권력에 대해 다시 생각하기 http://ichungeoram.com/9148 

 

기독교 우파와 좌파, 그리고 신-재세례파

 

저자는 미국 기독교에서 관찰되는 권력을 세 가지 범주-기독교 우파, 기독교 좌파, 신-재세례파로 분류하고 각각의 특징과 행태를 분석하는데 그 자체로 독립된 연구라고 해도 손색이 없고 많은 시사점을 준다.

 

먼저 기독교 우파(3장)는 미국이 유대-기독교 문명에 기반을 둬 기독교 국가로 건국되었다는 믿음에 기초하는데, 이들은 미국이 세속화와 탈 기독교화를 겪으며 신앙에서 떠나고 있다고 경고한다. 문화전쟁으로 대표되는 낙태, 동성애, 약물, 안락사 등의 합법화와 공립학교 기도 금지, 진화론 교육 등을 우려하며 세속적 자유주의자들이 사법부, 교육, 정부를 장악해 공공영역에서 기독교적 요소들을 추방하고 반기독교적 편견을 강화하여 미래세대를 지배하려 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이들은 기독교가 잃어버린 영향력과 미국의 가치를 찾아와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에 대한 지배적인 전략은 대법원에 보수적 판사 임명하고 기독교 우파의 의제에 동의하는 정치인을 선출하는 등 법률적, 정치적인 수단을 통해 문화전쟁에서 승리하고 정치적 권력과 헤게모니를 잡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기독교 우파는 공화당의 강력한 지지세력으로 표를 몰아주고 있고, 미국이 기독교적 가치로 회귀하기를 기대한다.

 

기독교 좌파(4장)는 정치적으로는 자유/평등/박애와 같은 계몽주의적 이상에 영향을 받았고, 성경적으로는 구약의 예언자적 전통과 신약의 약자에 대한 예수의 관심과 가난한 이들을 위한 정의의 요구를 강조해 왔으며, 실천적으로는 노예제 폐지, 여성운동, 시민권 운동, 노동운동, 사회 구호, 반전운동 등에 참여해 왔다. 미국에서 기독교 좌파에 해당하는 그룹은 주류 개신교(Mainline churches), 복음주의 좌파, 해방신학의 영향을 받은 급진주의 그룹 등이 있다. 미국 주류 개신교는 위에서 언급한 사회적 실천들을 주도했으나 인구의 노령화와 기독교 인구 감소라는 상황을 맞고 있고, 주류 교회의 사회적 의제들(시민권, 여성인권, 베트남전 반대)이 어느 정도 실현되면서 오히려 사회적 영향력이 축소되어 왔다.

 

최근 복음주의 좌파가 활발한 편인데, 우리가 잘 아는 짐 월리스, 존 퍼킨스, 토니 캄폴로, 로날드 사이더, 브라이언 맥클라렌, 소저너스, 레드레터 크리스천 등이 이에 해당한다. 2004년 미국 대선 당시 짐 월리스가 “하나님은 공화당원도 민주당원도 아니다”라는 슬로건을 사용한 것이 상징적인 사건인데, 이들은 기독교 우파의 편협성과 기독교 왜곡을 비판하고, 기독교 우파가 특히 공화당과 정치적으로 유착되었으며, 권력을 지향하며, 약자가 아닌 강자와 부자의 편이 되었으며, 평화가 아닌 군사주의와 국가주의에 빠져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동시에 기독교가 몇 가지의 윤리적 문제에만 집착할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와 사회적 약자, 환경문제, 전쟁, 에이즈, 이민문제까지 관심과 참여를 확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신-재세례파(5장)는 존 하워드 요더, 스탠리 하우어워스, 리처드 헤이스 등의 신학자를 꼽을 수 있다. 이 그룹은 산상수훈 등에 나타난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 기초해 평화주의와 화해, 공동체주의를 강조하고 폭력과 제국, 국가주의를 반대한다. 교회가 콘스탄틴주의와 타협한 것이 예수의 가르침과 초대교회의 신앙으로부터 멀어진 결정적인 변질과 타락의 계기가 되었다고 설명하는데, 공동체주의와 평화주의, 약자와 가난한 자에 대한 관심이 국가주의, 국가교회, 군사주의로 대체되었기 때문이다. 국가는 기본적으로 강제적이며 폭력적인 속성을 가지며, 거짓된 구원의 신화를 유포하는 정부의 목적은 왜곡되고 부패했으며, 타락한 정사와 권세들은 인간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악마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교회는 세상의 정부와 권력과 거리를 두면서 공동체, 화해와 평화, 비폭력에 헌신해야 하고, 대안적 공동체로서 참된 교회를 추구하며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관계를 통해 세상에 예수의 가르침을 증거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후기 현대 사회의 경제와 문화를 지배하는 자본주의가 추구하는 번영과 소비라는 우상을 숭배하는 현상을 비판한다. 

 

 

모든 것이 정치화 된 상황에서 미국 기독교의 비극은 기독교가 “문화적 성취, 지적, 예술적 생명력, 타자의 필요에 대한 봉사”가 아닌 “분노의 수사학과 의지의 야망”으로 이해되는 점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기독교의 “탈정치적 증언”이 필요하다.

 

이러한 입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미국 기독교의 정치 참여에 있어 공통된 현상이 발견된다고 지적한다. 가족, 성, 교육, 과학과 같은 문화 전쟁의 이슈를 둘러싸고 각종 이익단체와의 소송이나 법적 갈등이 폭발하는 현상이 말해주는 것은 기독교의 접근이 “지배와 권력에의 추구”로 요약되며 “모든 것의 정치화”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기독교가 세상에 접근하고 문화를 변혁하는데 있어 지나치게 “법률적, 정치적 수단을 통해 타자에게 우리 의지를 강요”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국가의 강제력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관철하고 세상을 통제하려는 욕구 뒤에는 프랑스어 ‘르상티망(ressentiment)으로 표현되는 분노의 정치심리학이 있다. 과거 기독교가 누렸던 특권을 상실한 것에 대한 분노와 두려움, 그리고 세속주의자, 반기독교인들의 악행으로 기독교와 기독교인들이 부당한 일들을 당하고 있다는 믿음이 기독교인들을 결집시키고, 정치적 접근에 나서게 만들고 있다. 모든 ‘공적인 요소’들이 ‘정치적인 것’으로 환원되어 버리자, 정책적이고 공공의 복지 차원에서의 건전한 토론과 타협은 불가능해지고, 끝없는 문화 전쟁과 정치적 대립이 지속되고 있다.

 

이런 비판은 일차적으로 기독교 우파를 겨냥하고 있다. 1979년 ‘도덕적 다수’를 만들어 레이건의 당선과 재선에 영향을 끼친 제리 폴웰과 기독교 연맹을 만들었고 각종 사회적인 실언들로 유명한 팻 로버트슨 같은 기독교 지도자들로 대표되는 기독교 우파는, 기독교의 총체적 가르침을 몇 가지 윤리적 주제로 환원하여 왜곡시키고 끝없는 문화전쟁에 집착하며, 공화당과 노골적으로 결탁하여 자신의 의지를 사회에 강요하고 권력과 헤게모니를 추구해 왔다.

 

그런데 저자는 방향만 다르지 기독교 좌파도 우파와 비슷한 동기와 전략을 보이고 있다고 주장한다. 좌파는 기독교 우파에 대한 강력한 비판의식과 분노라는 정서에 이끌려 역시 정치 참여를 통해 기독교 우파에게 빼앗긴 영향력을 회복하자는 말로 권력을 추구하며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기독교 좌파 지도자 다수의 입장을 보면 낙태를 제외하고는 민주당의 진보진영과 같은 노선이라 할 수 있고, 민주당 자문관으로서의 짐 월리스의 사역이나 브라이언 맥클라렌의 오바마 지지 선언 등 기독교 좌파와 민주당이 정치적으로 결탁하는 경향도 관찰된다는 것이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신앙에 근거한 정치 참여는 우파의 배타적 영역이 아니다”라고 언급했듯이 민주당도 복음주의 좌파를 이용한다는 지적도 있다.

 

신-재세례파에 대한 저자의 시각은 다소 호의적이며, 콘스탄틴주의에 대한 비판은 적절하다고 지지한다. 또한 신-재세례파와 복음주의 좌파에게서 유사한 성향들이 관찰되는데, 양측이 모두 교육받은 중산층으로, 기독교 우파의 행태를 경멸하고 규제받지 않는 시장경제를 비판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반면 양측은 국가관에서 차이를 보이는데, 기독교 좌파는 국가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에 대한 압력과 참여를 통해 법과 정책 변화를 추구하지만, 신-재세례파는 권력 사용을 불신하고, 국가로부터 거리를 유지한다. 물론 저자는 신-재세례파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한다. 분리주의적 충동과 경건주의, 완전주의 성향으로 인해 결국은 세상을 혐오하는 신학을 제공하고 있고, 교회와 세상 사이에 선을 그으려는 노력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며, 신-재세례파가 교회 이외의 다른 대안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2부 말미의 6장과 7장에서 저자는 자신의 비판을 종합하는데, 기독교가 “법과 정치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환상과 착각”이라고 말한다. 법은 가치를 반영하지만, 가치를 창출하거나 주입할 수 없고 가치에 대한 싸움을 종식시킬 수 없다. 모든 것이 정치화 된 상황에서 미국 기독교의 비극은 기독교가 “문화적 성취, 지적, 예술적 생명력, 타자의 필요에 대한 봉사”가 아닌 “분노의 수사학과 의지의 야망”으로 이해되는 점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기독교의 “탈정치적 증언”이 필요하다. 교회가 미국 사회의 삶과 정체성에 무비판적으로 동화되어 왔고, 지배적 정치이념과 사회 구조에 뒤엉켜 있다는 점을 비판하고 반성하며, 공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을 분리시키고 정치와 적절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에 따르면 예수의 삶에 나타난 권력 작동 방식의 특징은 “하나님에 대한 완벽한 헌신” 속에서 “지위, 명성, 특권을 거절”했으며 “긍휼의 마음”에 추동되어 “비강제적인 방식”으로 나타났는데, 이러한 예수의 모습을 반영한 새로운 방식의 접근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3부에서 ‘신실한 현존의 신학’이라는 패러다임을 모색한다.

 

공적 영역에서의 기독교 우파, 좌파 그리고 신-재세례파는 무엇이 다르고, 어떻게 닮았나?

 

3장으로 넘어가기 전에 저자의 설명과 주장들을 더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기독교가 공적 영역에서 헤게모니를 잃어가는 것에 대한 좌절과 분노가 기독교 정치 참여의 동력이 되는 점, 법률적, 정치적 수단을 통해 타자에게 자신의 의지를 강요하려는 시도, 모든 것을 정치화 하려는 경향에 대한 저자의 통찰은 핵심을 꿰뚫고 있다. 특히 기독교 우파 논리의 기초인 ‘기독교 국가 미국’에 대한 믿음은 신화에 가깝다는 것이 확인되어 왔는데,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대다수가 예수를 개인적인 구세주로 믿는 복음주의적 그리스도인이 아닌 ‘이신론자’들이었으며 엄격한 정교분리를 신봉하고 이를 헌법에 명시했다1). 물론 문화적으로 유대-기독교적 영향이 강력했던 것은 사실이나 미국 역사 초기부터 가톨릭과 유대교, 그리고 다양한 개신교 종파들에 대한 종교의 자유와 관용이 존재했고, 이제 사회의 다원화와 세속화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기독교가 공공영역에서 독점적, 지배적인 역할을 끼치던 시대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은 시대착오적이며 가능하지도 않다.

 

기독교 우파는 세속화되고 반기독교적인 분위기에서 자신들이 핍박받는다고 하지만, 이미 다원화된 환경에서 기독교 헤게모니를 추구하는 자신들의 행태가 비기독교인들에게 공포를 주고 불편을 끼칠 수 있으며 황금률과 존중으로 대표되는 예수의 태도와 상충된다는 것은 거의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기독교 우파는 자신들의 문화-사회적 관점을 기독교적 가치로 혼동해 기독교와 성경의 이름으로 인종차별이나 여성차별 철폐를 반대한 전력이 있는데, 오늘도 그들이 집착하고 있는 이슈들을 보면 그런 전력을 답습하고 있으며 성경을 몇 가지 윤리적 이슈들로 축소시킨다는 비판도 있다. 간단한 예를 들자면 이들은 일관되게 낙태와 안락사를 반대하지만 총기 소지와 사형제도, 군사주의적 외교정책은 적극 지지하고 의료보험개혁은 반대한다. 짐 월리스 등이 여러 번 지적했듯 우파의 생명윤리는 총체적이지 못하고 모순성을 띄는데, 더 나가서 생각해 보면 정치적인 이슈화와 동원을 위해 취사선택된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도 든다.

 

또한 정치적인 수단을 통해 과연 그들이 추구하는 윤리적 목표를 이룰 수 있는지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1920년대에 제정된 금주법이 알카포네와 같은 마피아가 엄청난 부를 축적하며 활개를 치게 되면서 원래 목적을 이루는데 완전히 실패한 경우처럼, 법률로 개인의 선택을 규제하는 효과에 대한 의문, 개인의 자유에 대한 침해의 논란도 있다. 예를 들어 폴웰의 ‘도덕적 다수’ 조차도 미국 사회에서 기독교적 윤리를 지키는 목적에는 실패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듯, 수많은 보수 기독교인들이 공화당에 투표해 왔지만 세속화나 기독교적 윤리의 영향력이 축소되는 것을 막지 못 했다. 최근 미국의 문화적 정치적 변화를 볼 때 현실적으로 낙태를 전면 금지하거나, 동성애자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유지하거나 공립학교의 기도를 부활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말로는 기독교 윤리라는 목표를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공화당에 표를 몰아주는 역할에만 충실했다는 비판이 가능한데, 헌터가 언급했듯 보수 기독교인들이 “공화당의 쓸모 있는 바보들”이라 불린다는 표현이 이를 반영한다.

 

기독교 좌파도 우파와 방향만 다르지 같은 동기와 전략을 쓰고 있다는 저자의 주장은 일면 공감이 되면서도 과도하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의 지적처럼 복음주의 좌파를 대표하는 몇몇 인사들이 민주당이나 민주당 정치인들에 가까운 면도 있다. 예를 들어 토니 캄폴로의 경우 빌 클린턴의 영적 조언자였고, 최근 힐러리 클린턴을 공개 지지하기도 했으며, 짐 월리스도 민주당 자문관이자 오바마의 영적 조언자로 활동했다. 하지만 우파가 몇 가지 윤리적 이슈를 절대화하면서 특정 정당에 대한 투표를 기독교인의 의무로 강요하고, 노골적으로 정치적 헤게모니를 추구하고, 정교분리 원칙을 광범위하게 위반하는 것과 비교할 때 복음주의 좌파를 같은 급으로 비판하는 것은 지나치다. 혹시 정치적으로 편향되었다는 평가를 피하기 위해 인위적인 양비론을 추구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미국 기독교 좌파를 대표하는 인물 짐 월리스도 민주당 자문관이자 오바마의 영적 조언자로 활동했다.

 

현실정치에서 기독교 좌파의 영향력은 상당히 제한적이라는 점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복음주의 좌파와 신-재세례파는 최근에 주목을 받고 있지만 원래 인구가 많지 않았고, 동성애 등의 이슈 등으로 인한 분열로 독자적인 정치적 세력화가 어려워 보인다. 주류 기독교는 사회적인 관용과 다양성을 존중하지만, 실제로 가장 백인-엘리트 중심이기도 해서 심각한 노령화와 인구 감소를 경험하고 있다. 우파 근본주의자들의 인구도 감소하는 경향이 있지만 아직 지역적, 계층적, 문화적으로 확고한 토대를 가지고 있고, 최근의 변화가 이들을 정치적으로 결집시키는 경향이 있다.

 

결국 세속화와 문화전쟁으로 인해 전반적으로는 기독교의 인구와 영향력이 감소하고 있지만 근본주의를 벗어나 다른 기독교적 입장으로 전향하는 이들보다는 아예 비기독교화 하는 인구가 더 많고, 보수 기독교의 영향력은 어느 정도 유지되는 반면 진보 기독교의 정치적 영향력은 제한적이다. 2000년대 중반 이후 복음주의 좌파가 부상하고, 오바마의 당선에도 영향을 미친 면도 있지만, 최근 오바마 정부는 전반적으로 비기독교 인구에 더 신경을 쓴다는 인상을 받는다. 물론 여기에는 기독교 우파가 오바마 집권 내내 인신공격성의 비난을 퍼부어 온 것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에서 재세례파(아나뱁티스트)는 아직 알려지는 과정이고 실제 사역도 초기 개척 단계에 있는데, 저자가 기독교의 문화적 접근에 대한 미국 기독교의 세 가지 입장 중 하나로 신-재세례파를 자리매김하고 그 신학적, 사회적 의미를 부각시킨 점은 매우 반가운 일이다. 저자가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현재 ‘신-재세례파’라는 명칭은 아미쉬, 메노나이트, 후터라이트 처럼 전통적 재세례파의 역사와 전통, 신학에 직접적으로 뿌리를 둔 이들 뿐 아니라, 재세례파의 사상을 광범위하게 공유하는 이들을 통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신-재세례파를 대표하는 신학자들은 메노나이트 출신으로 고셴 대학 등에서 가르친 요더 외에도 듀크대의 스탠리 하우어와스와 리처드 헤이스(감리교), 풀러에서 가르치다 몇 년 전 작고한 글렌 스타센(침례교), 그리고 그렉 보이드 등이 있다.

 

이들은 각기 다른 교단을 배경으로 하지만, 요더와 재세례파로부터 강력한 신학적 영향을 받고 신학적, 사회적 입장을 공유하고 있다. 유명한 쉐인 클레어본도 제국과 폭력에 대한 반대, 평화주의, 새로운 수도원 운동 등 신-재세례파적 성향을 강하게 보이고, 큰 범위에서는 브라이언 맥클라렌, 토니 캄폴로, 짐 월리스, 로날드 사이더, 랍 벨 등도 신-재세례파로 분류되기도 한다는데 이는 복음주의 좌파가 신-재세례파적 의제를 상당부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저자가 신-재세례파 전통을 단순히 분리주의로 비판한 것은 상당히 평면적인 분석이라고 생각된다.

 

전통적인 재세례파 내에도 생활방식과 문화적인 분리주의를 추구하는 아미쉬도 있지만, 메노나이트는 그렇지 않고, 콘스탄틴주의에 대한 반성과 국가주의, 헤게모니 추구에 대한 경계에서 직접적 권력 추구를 반대할 뿐 화해와 평화, 갈등 해소 등의 차원에서 오히려 현실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기도하고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개혁적 혹은 현실주의적 아나뱁티스트라 칭하는 존 레터콥 같은 경우, 민주화를 경험한 현재의 서방국가 정부들을 재세례파의 신학이 시작된 16세기의 정부들과 똑같이 볼 수 없으며 이제는 정부를 하나님의 선을 이루는 도구로 활용하고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2). 이러한 분류는 한국 기독교의 상황에도 비슷하게 적용할 수 있는데, 그에 대한 논의는 3부의 내용을 다루고 마지막에 정리하려고 한다. [3부에 계속]  

 

주ㅡ 1) 다음 글은 이 주제를 잘 정리하고 있다. 손태환, “미국은 기독교 국가가 아닙니다 - 성경보다 독립선언서 · 헌법, 기독교보다 세속·계몽주의” 뉴스M, 2013/01/21 (http://www.newsm.com/news/articleView.html?idxno=3061) 2) 존 레터콥, 배덕만 역, 기독교 정치학, 2011, 대장간

 

 

- 3부: 새로운 도시 광장을 향해 http://ichungeoram.com/9151 

 

현대 사회의 도전에 대응하는 세 가지 기독교 문화 참여 패러다임

 

3부에서 그는 비로소 자신이 말하는 ‘신실한 현존의 신학’ 패러다임을 소개한다. 먼저 그는 기독교가 현대세계로부터 ‘차이’와 ‘해체’의 도전을 경험하고 있다고 말하는데 ‘차이의 도전’은 다원주의가 가져오는 문화전쟁, 세계관을 지탱하는 구조와 관점의 파편화, 혼합주의적 압력을 말하며 ‘해체의 도전’은 공유된 언어의 붕괴, 회의주의와 해체주의, 전자매체의 등장으로 인한 의식과 문화의 변화를 말한다. 이러한 도전에 대응하는 기독교의 문화 참여 패러다임을 세 가지로 유형화 한다. 첫째, 기독교 우파와 연결되는 “~에 대한 방어” 패러다임의 핵심은 세속화에 맞서 기독교의 가치를 지키고 세상에서 기독교의 주도권을 회복하는 것이고 둘째, 기독교 좌파를 대변하는 “~에 대한 적합성” 패러다임은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고 공명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역사적 기독교의 신앙고백 보다 사회적 실천을 강조해 왔다. 셋째, 신-재세례파의 “~로부터의 정결” 패러다임은 현대 세계 속에 내재하는 폭력과 권력으로부터 분리해 교회의 순수성을 지키고 참된 교회가 되는 것을 중시한다. 저자는 세 가지 관점 모두에 한계가 있다고 설명하는데 우파는 문화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에 사로잡힌 이원론적 경향과 콘스탄틴주의적 권력추구라는 문제가 있고, 좌파는 적합성에만 집착해 기독교의 독특한 관점과 실천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신-재세례파는 우파와 달리 콘스탄틴주의를 배격하지만 분리주의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역시 이원론적이다.

 

저자가 세 가지로 권력에 대한 태도와 문화 참여 패러다임을 유형화 한 것은 유명한 리처드 니버가 <그리스도와 문화>에서 5가지 유형을 제공한 것을 떠올리게 한다. 이는 거시적이고 복잡한 현상을 종합-정리하는 대가의 통찰력을 보여주는 동시에, 지나치게 도식화, 단순화했다는 한계를 보여준다. 기독교 우파, 좌파, 신-재세례파 안에도 다양한 입장들이 존재하며 그 안에 교류와 상호작용이 있다는 것을 충분히 다루지 않았다는 점은 아쉽다1). 예를 들어, 기독교 우파에도 문화 전쟁에 집착하는 중하층 백인 중심의 근본주의자들도 있지만, 윤리적 이슈에 다소 거리를 두고 미국식 시장경제와 군사력을 통한 민주주의의 확산을 강조하는 신보수주의적 기독교인들도 있고(물론 이 그룹은 유태인들이 핵심이다) 기독교 좌파로 묶인 주류기독교, 복음주의 좌파, 해방신학 계열은 상당한 차이도 나타내며, 복음주의 좌파는 태생적으로는 우파와 공유하는 점도 있고, 최근에는 신-재세례파와 많은 교류와 자극을 주고받고 있다.

 

1부와 2부에서 역사적 신학적 분석이 탁월하고 구체적인데 비해 3부에서 제시한 대안은 기대보다 실망스럽다는 생각도 든다. 현실에서 제시할만한 실례들이 적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구체성이 떨어지고 상당히 추상적인 면이 있다. 관련 성경구절들을 언급하며 신실한 현존의 신학의 의미를 설명한 부분은 읽다보면 감동이 느껴지기도 하는데, 신학적 패러다임을 대입한다면 저자의 주장이 아주 새롭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저자의 대안은 콘스탄틴주의와 권력의지를 경계하고, 동시에 이원론이나 분리주의를 극복하고, 세상 속에 성육신하자는 뜻으로 다가오는데 이는 칼빈주의와 아나뱁티즘의 절충, 혹은 복음주의 좌파가 말하는 사회적 책임 의식과 참여와 맞닿아있고, 콘스탄틴주의와 권력추구를 경계하며, 대안적 공동체로서의 교회 자체가 세상에 대한 증언이라는 신-재세례파의 입장이 조화된 형태는 아닌가 싶다. 그런 점에서 추상적인 개념보다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신학적 논의와 실천적 사례들을 더 소개해 주었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물론 1부와 2부의 분석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는 넘치는 편이고 3부의 내용을 구체화 하고 발전시키는 일은 이 시대의 고민하는 기독인 모두에게 주어진 과제일 수도 있다.

 

1부에서 탁월성과 리더십을 가지면서도 권력과 엘리트주의에 빠지지 않는 이들과 문화형성의 핵심부에서 작동하는 네트워크가 문화변혁의 핵심이라는 운을 띄워 놓았는데 이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내용이 부족하고, 신실한 현존이라는 패러다임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설명이 충분치 않다. 개인적으로 교회사를 생각해 볼 때, 그러한 네트워크가 어떤 인위적인 기획이나 프로젝트로 발생할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또한 근본적으로는 문화 변혁이라는 것 자체가 우리의 목표인가, 아니면 우리의 목표인 ‘그 무엇’을 이루는 과정에서 동반되는 현상인가도 질문해 볼 필요가 있다. 저자는 기독교 우파의 콘스탄틴주의와 권력추구를 경계하지만 다분히 문화의 중심부, 탁월성, 리더십 등을 강조하는 면이 있어서 약간의 불편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어쨌든 과거에 한번 기독교가 문화와 정치를 주도했던 기억이 있는 서구 사회, 혹은 미국의 관점에서 다시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논의를 전개하는 것은 아닌가 의문도 들었다.

 

(문화) 변혁은 어디에서 출발하는가

 

많은 경우, 기독교의 영향으로 나타난 문화적 변화는 그 자체로 독립된 현상이었다기보다는 영적, 신학적 변화의 결과물이었다는 생각이 들고(예를 들어, 윌버포스와 클래팜 공동체의 활동을 영국의 부흥과 존 웨슬레나 존 뉴턴의 사역 등과 분리할 수 없듯이) 정치, 경제, 사회적 변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생각도 든다. 문화 변혁을 이렇게 거대한 변화의 일환으로 이해할 때는 계층적인 문제와 기존 체제와의 긴장 관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기존의 문명에서 엘리트의 일부가 개혁과 부흥을 이끄는 경우도 있지만 결정적인 문명의 전환은 대부분 기존 체제의 기득권에 물들지 않고, 그 모순을 가장 뼈저리게 느낀 이들이 주도하는 경향이 있다. 많은 경우 그들은 기존 체제에서 위험 인물로 지목되어 배제되거나 아니면 스스로 그 체제를 떠난 사람들인데, 기존의 체제와 이익을 같이 하는 이들은 체제와 운명도 같이 하기 때문이다.

 

문화 변혁이 주제이긴 하지만 저자는 계층적 문제와 기득권과 구조적 모순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데 이는 역시 미국적 사고의 특성과 한계는 아닌가 추측하게 된다. 미국이 규모가 거대한 세계 초강대국이자 사회체제가 상대적으로 안정적이고 충격을 흡수할 능력이 크다는 점, 유럽이나 제3세계에 비해 상대적으로 보수화된 사회라는 점에서 계층적, 구조적인 언급이 없이 이런 거시적인 논의가 가능할지 모르지만 한국적인 맥락에 오면 이런 논의는 좀 공허해 지는 면이 있다.

 

깊이 생각해 보면, 성경이 말하는 문화 변혁은 계층적, 구조적인 맥락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잘 아는 모세와 그의 동역자들은 출애굽의 지도자를 넘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포괄하는 히브리 문명의 선구자로서 폭압적인 제국의 문명이나 타락한 가나안의 토착문명이 아닌 정의와 공평, 인애와 자비에 기반을 둔 제3의 문명을 발생시켰다. 모세는 제국의 최하층에서 출생했지만 특별한 섭리로 제국의 학문과 관점을 모두 섭렵했고 제국주의 피라미드의 꼭대기에서 세계의 흐름을 보았지만 제국의 엘리트로 편입된 것이 아니라다시 주변인으로서, 피압박자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고통 받는 약자들의 편에 선다.

 

다윗의 경우도 가문에서 가장 작은 자였다가 왕에게 발탁이 되는데 폭군인 사울의 체제에서 도망한 후 아둘람굴에서 그 시대에 가장 원통한 자들과 한패가 되고, 새로운 시대와 문명을 일으킨다. 예수님도 로마제국의 최하층에서 출생하신 동시에 다윗의 자손이라는 혈통이었으며 말씀과 권능으로 인기와 기득권층의 관심을 받았으나, 철저하게 약자의 편에서 새로운 하나님 나라를 외쳤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유대교의 위선과 제국의 폭압성, 팍스로마나의 허위를 폭로했다. 로마의 제국주의와 유대민족주의의 갈등 속에서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 가난한 자와 부자의 경계를 초월하는 ‘새로운 희망의 공간'을 열어젖혔다. 사도들과 초대교회 성도들, 큰 범위에서의 종교개혁자들도 비슷한 행동양식을 보였다. 이들은 모두 기존 체제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결국 거대한 문명사적 변화를 위해서는 단순히 탁월성이나 문화 형성의 중심에 대한 근접성을 넘어 중심부를 이해하고 섭렵하면서도 철저한 주변부의 관점과 정체성으로 무장한 이들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결국 거대한 문명사적 변화를 위해서는 단순히 탁월성이나 문화 형성의 중심에 대한 근접성을 넘어, 중심부를 이해하고 섭렵하면서도, 철저한 주변부의 관점과 정체성으로 무장한 이들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신실한 현존의 신학'이 한국 기독교에 던지는 질문

 

마지막으로 한국 기독교에 주는 함의에 대해 간단히 생각해 보자. 먼저 2부에서 진행한 세 가지 범주화는 한국의 상황에서 적용점이 많다. 천주교와 비교할 때, 개신교는 원래 조선시대, 일제치하에서 중·하층민을 중심으로 전파되었으나 한두 세대 만에 다수의 민족 지도자와 독립 운동가들을 배출하는 놀라움을 보였다. 이런 결과 이승만 정부시기에 기독교 엘리트들의 영향력이 강력했고, 군사독재 시기에는 전도에 대한 열정과 친미·반공 자본주의적인 노선을 선택하며 비약적인 양적성장을 경험해 이제는 사회 지도층과 기득권의 종교로 자리를 잡았다.

 

미국의 주류기독교가 20세기 초 사회복음을 주창하는 월터 라우센부쉬 등을 중심으로 구조적 악에 맞서 사회 개선에 참여할 때 기독교 우파는 이원론, 종말론적 관점에서 분리주의적 행태를 보였으나 60년대부터 세속화가 진행되고 자유주의, 진보세력이 발흥하자 기독교 문명이 도전을 받는다며 70년대 말부터 본격적으로 정치에 참여하기 시작한다. 한국 기독교 우파의 경우도 일제 강점기에 친일 부역한 경력이 있고 군사 독재 시기에는 이원론에 근거해 정권에 동조하거나 침묵하는 경향을 보였는데, 오히려 '민주 정부'가 들어서면서 직접적으로 정치화를 시작했다. 사회적 정의와 약자를 향한 배려보다는 몇 가지 개인윤리에 집중하면서 기득권의 정치적 이슈를 전폭적으로 지지하며 보수 정당과 동맹 관계를 맺는 다는 면에서 미국과 한국의 기독교 우파는 쌍둥이 같은 모습을 보인다. 자유주의에 대한 반발로 근본주의 신학과 문자주의가 팽배하고 반지성주의와 극우적인 행태를 보이는 면도 유사하다.

 

한편, 한국의 보수는 문화전쟁에 집중하는 미국의 기독교 우파보다 신보수주의 우파에 더 가까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반공, 자본주의, 친미가 워낙 중요했기에 낙태, 동성애 문제 등은 핵심적인 이슈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미국 사회는 기독교 문화가 지배적이었던 상황에서 세속화, 다원주의화되면서 문화전쟁이 일어난 반면, 한국은 기본적으로 다종교 사회였다는 점도 다르다. 최근에 동성애 이슈가 한국에서도 논란이 되고 있는데, 이제 한국 기독교도 미국의 문화 전쟁을 따라갈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미국의 경험에서 보듯 법적, 정치적 수단을 동원한 문화 전쟁을 통해 기독교 윤리를 사회에 강요하려는 노력은 실패할 가능성이 크며, 도덕성에서 매우 낮은 평가를 받고 있는 기독교가 동성애 같은 이슈로 공격적인 태도를 보일 경우, 정치적 영향력의 확보보다는, 사회적 고립과 비웃음이 심화될 가능성이 크다.

 

미국의 좌파에 대한 분류도 적실성이 있다. 미국에서 기독교 우파의 정치화 이전에 자유주의적인 주류 교회가 기독교를 대표하고 다수를 형성했듯 한국에서도 진보 교회가 민주화와 노동운동, 통일 운동에서 예언자적 역할을 수행하며 사회변혁을 선도했던 경험이 있다. 군사독재의 정치적 박해 속에서 진보 교회가 ‘소도’ 같은 보호 공간으로 존재했고, 정보와 자원이 제한된 상황에서 해외의 지원세력과 국내의 운동을 연결해 주었다. 미국 주류 교회와 유사하게 민주화와 노동운동과 통일 운동의 의제들이 어느 정도 성취되면서 진보 교회는 영향력과 동력이 위축되었는데 교회가 특수한 역할을 감당해야 했던 조건들이 사라지자 굳이 교회의 이름과 조직을 통해 사회운동을 할 필요가 없어지고 인적 자원이 탈 기독교화되거나 정치권에 흡수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동시에 진보 교회가 보여줄 수 있는 기독교적 특성과 정체성이 무엇인가라는 의문, 그리고 사회성과 영성의 균형에 대한 고민도 나타났다.

 

복음주의 좌파의 등장은 미국과 한국 모두 근본주의의 반지성주의와 문자 주의, 수구성 등에 대한 반성으로 복음주의가 분화되면서 나타난 결과다. 한국의 경우 제자훈련과 기독교세계관운동, 각종 문서 운동, 캠퍼스 선교 운동, 연합 운동 등의 결과로 복음주의권 이라고 할 수 있는 그룹이 형성되었다. 한편 짐 월리스를 비롯한 유명한 지도자들의 신앙적, 사회적 활동으로 어느 정도 대사회적인 영향력이 있는 미국에 비해 한국의 복음주의권, 혹은 복음주의 좌파는 전체적인 규모가 작고, 신학교나 일반 지역 교회에는 영향력이 제한적이며, 사회적으로는 아직 존재감이 미미하다. 앞서 말했듯, 신학교나 지역 교세로 확장되지 못했고 일종의 엘리트들과 청년, 관심자들을 중심으로 그들만의 리그에 그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비판도 가능하다.

 

한국의 신-재세례파는 아직 역사가 길지는 않지만 2000년대 초부터 자생적인 움직임과 북미 메노나이트 교회의 지원 등으로 교회 공동체, 평화 교육, 갈등분쟁 전환, 회복적 정의, 출판활동 등을 꾸준히 진행해 오고 있고, 이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더라도, 신-재세례파 계열 신학자들의 연구가 소개되면서 관심 갖는 이들이 늘어났다2). 특히 공동체, 이웃, 정의, 화해, 평화, 비폭력 저항 등의 개념을 복음과 구원의 핵심적인 개념으로 포함하는 신-재세례파 전통은 복음이 개인주의적, 내세 중심의 영혼 구원으로 축소된 복음주의/근본주의 신학을 넘어서는 대안으로 관심을 받고 있다. 또한 식민주의, 분단과 전쟁, 군비 경쟁, 군사주의, 안보 논리, 강대국 패권주의에 지배받는 한반도의 상황에서 평화와 화해를 강조하는 신-재세례파의 신학과 실천은 큰 의미를 가진다3). 오늘 기독교가 보이는 많은 문제들의 뿌리에는 이원론보다도 혼합주의가 있다는 지적도 있는데 그런 점에서 세상의 권력, 욕망, 폭력과 구분되는 교회다운 교회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에도 신-재세례파의 교회론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4)

 

저자는 ‘신실한 현존’을 이야기 하면서 그 현존의 자리가 어디여야 하는지는 명확히 말하지 않는데 보다 극단적으로 치닫고 있는 한국적 상황에서는, 강자의 탐욕을 위해 약자가 고통 받고 정의가 무너지는 사회의 현장에 있는 그 누군가가 예수님의 임재와 새 시대를 위한 하늘의 음성을 듣게 되리라 믿는다. 

 

새로운 도시 광장을 향한 상상과 연대

 

종합하면 진보교회의 영향력이 매우 감소했고, 복음주의권은 확장성이 약하고, 신-재세례파는 아직 개척단계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저자가 세 가지 신학적 입장으로 분류한 미국의 상황에 비교할 때, 한국 상황은 기독교 우파의 세력이 더욱 지배적이고, 기독교의 대사회적 이미지가 기독교 우파로 과잉 대표된 면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교회는 전반적으로 문자주의, 근본주의로 인한 반지성주의가 팽배하고, 그 안에서 양산된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은 단순무식과 막무가내가 익숙한 거대한 무지의 포스가 되어 일부 지도자들의 왜곡된 주장을 절대화 하고, 의견이 다른 이들을 이단-악마시 하여 우리 사회의 건전한 사고와 발전을 위협하고 있다.

 

또한 번영신학과 기복신학에 따른 고지론, 성공주의, 물신주의가 충만하다. 종교로서의 기본적인 도덕성이나 자정능력이 의심받고 있고, 사회 정의에 대한 관심이나 약자에 대한 공감은 고사하고 기본적인 사회적 감수성이나 예의를 갖추지 못해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친미반공자본주의라는 특정한 우파의 정치관이 성경의 가르침보다 더 강하게 기독교의 정체성을 지배하고 있고, 보수 정당과 기득권의 패권을 유지하는데 든든한 지지대가 되고 있다. 개신교 전파 초기에 가장 약자의 편에 서서 개혁과 진보의 추진세력이 되었다면, 오늘날에는 가장 기득권의 편에서 사회의 변화를 가로막는 세력이 되었다. 결국, 한국교회는 독립운동과 근대화, 민주화, 노동운동, 통일운동 등에서 선배들이 보인 희생과 공헌을 거의 다 까먹고 종교적 권위와 도덕적 사회적 자본을 거의 다 상실한 채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근본주의 기독교 우파의 행태에 문제의식을 가지는 기독교인들은 새로운 모색과 고민, 대화를 할 필요가 있고, 이미 그런 작업이 진행되어 왔다. 특히 개인적인 바람이 있다면, 진보교회, 복음주의 좌파, 신-재세례파가 가진 장점들이 지속 발전되며 서로를 인정해 주며 건강하게 인적-신학적으로 교류하고 협력할 수 있기를 바란다.

 

진보교회의 경우, 과거 민주화와 노동과 통일 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선도적 역할을 담당한 도덕적-사회적 권위를 갖고 있다. 적어도 장준하, 문익환, 함석헌을 아는 사람은 기독교 전체를 싸잡아서 ‘개독교’라고 쉽게 단순화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신학적 입장을 떠나서 민중 신학은 함석헌 등을 제외하고 한국 기독교에서 토착신학이라고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성과물이다. 한국의 절차적인 민주화는 이루어졌으나 오늘 신자유주의의 광풍 속에 민중의 삶은 벼랑으로 내몰리고 있고,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거치며 민주화, 노동 운동, 통일 운동의 성과는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어 교회가 보여줘야 할 예언자적 역할은 다시 요청되고 있다. 최근에는 해방신학에 대한 재조명도 이루어지고 있는데, 남미에서 해방신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김근수 선생 같은 분의 글과 활동도 의미가 있고 교종 프란체스코의 등장과 진보적인 발언도 이러한 세계적인 흐름과 맞닿아 있다.

 

복음주의 좌파의 경우, 전체 기독교로의 확장성은 제한적이지만, 그래도 상대적으로 좋은 인적자원과 활력을 가지고 있으며, 현재의 한국사회와 교회에 대한 비판적인 성찰과 새로운 모색을 진행하고 있다. 최근에는 소장 신학자들을 중심으로 좋은 신학적 연구와 성찰들이 나눠지고 있고, 성서한국이나 코스타 같은 대회를 통해 복음주의 네트워크가 유지되고 있고, 청어람이나 느헤미야 같은 교육과 토론의 장도 지속되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신-재세례파는 규모와 상관없이 꾸준하게 출판과 평화교육, 갈등해소, 회복적 정의 분야에서 진정성 있는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근본주의 보수 기독교의 행태와 진보 개혁적 기독교의 열악한 상황은 이런 그룹들이 더 협력할 수 있는 상황을 조성해주고 있다. 80년대에는 자유주의-진보신학 대 복음주의-보수주의의 대결구도가 있었다면, 이제는 극단화된 근본주의의 대척점에서 진보 교회와 복음주의 좌파가 공유하는 지점이 많다. 예를 들어 복음주의 좌파의 주요 신학자라 할 수 있는 김회권 목사는 총체적인 하나님 나라의 신학을 강조하며 해방신학과 민중 신학을 복음주의 신학 안에서 창조적으로 접목시키고 싶었다고 언급했다5). 이미 복음주의 좌파와 아나뱁티스트는 인적으로 얽혀있고 많은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 한국의 자생적인 아나뱁티스트들은  주로 복음주의권에서 출발해 그 한계를 뛰어넘고자 아나뱁티즘을 수용한 경우가 많고, 복음주의 권에도 아나뱁티즘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이들이 많다. 한국적 차원에서의 신-재세례파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을 느끼기 시작한 몇 가지 개인적인 에피소드가 있는데 첫째는 미국의 진보교단에서 한반도 상황과 평화를 놓고 개최한 평화 컨퍼런스가 아틀란타에서 열렸을 때 우연히 진보교회의 캠퍼스단체인 KSCF(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간사님과 대화를 하게 되었는데 최근에 복음주의권 교회와 선교단체들과 대화와 협력을 한다고 해서 놀랍고 반가웠다. 8, 90년대 까지만 해도 캠퍼스에서 진보와 보수 기독교 단체들은 ‘예수 믿는 거 맞나’ 혹은 ‘역사의식과 사회의식 없는 보수 꼴통’으로 서로를 매우 경원시 하는 분위기였는데 시대적으로 보수기독교의 행태가 보다 극단화 되고, 캠퍼스 학생운동 자체가 총체적 위기를 맞으면서 겸손한 모습으로 대화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다는 추측을 해 보았다. 비슷한 예로, 메노나이트 대학인 고셴 칼리지에 방문했을 때, IVF출신으로 음악활동을 하시면서 메노나이트 공동체에 참여하셨던 간사님과 대화를 나눴었는데 과거 홍대 두리반 투쟁에 방문해 공연했을 때 거기서 향린교회 목사님과 ‘현장의 영성’에 대해 대화 나눴다는 이야기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저자는 “기독교는 세상과 문화를 변화시킬 수 있는가?”라는 주제를 논의하고 있는데 사실 오늘 한국의 기독교는 세상의 변화는 고사하고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있는가'라는 절박한 질문을 마주하고 있다. 종교개혁 수준의 변화가 요구되는 이런 상황을 마주하면서 이 책이 기독교의 신학적, 정치적 입장과 맥락을 이해하고 논의하는데 좋은 자극이 되기를 바란다. 궁극적으로 한국에서는 진보 교회, 복음주의 좌파, 신-재세례파가 서로 교류하며 오늘의 한반도의 역사적, 정치적, 지역적 맥락에서 신학을 변증법적으로 종합하고 새로운 운동을 만들어 내길 기대한다. 저자는 ‘신실한 현존’을 이야기 하면서 그 현존의 자리가 어디여야 하는지는 명확히 말하지 않는데 보다 극단적으로 치닫고 있는 한국적 상황에서는 강자의 탐욕을 위해 약자가 고통 받고 정의가 무너지는 사회의 현장에 있는 그 누군가는 예수님의 임재와 새 시대를 위한 하늘의 음성을 듣게 되리라 믿는다. [끝]  

 

주ㅡ 1) 약간 오래된 책이고, 주류기독교의 시각이 두드러진 면이 있지만, 좀더 자세하게 권력과 문화에 대한 기독교의 접근방식을 분류한 책은 다음을 참고: Phillip Wogaman, Christian Perspectives on Politics, 2000,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 한국의 아나뱁티스트에 대한 소개와 정보는 다음 자료들을 참고: 한국 아나뱁티스트 센터 (http://www.kac.or.kr/); 박삼종, “아나뱁티스트 영성 전통과 한국교회,” 신학의 집 나모스 (http://namos.org/xe/185038); 김창규, “종교개혁의 잊혀진 전통, 아나뱁티스트: 무관심과 냉대 딛고 60년대부터 재평가,” 뉴스M, 2009년 1월 23일 (http://www.newsm.com/news/articleView.html?idxno=1144); 김은석, “무지와 오해를 넘어 교회의 대안으로: 10주년 맞은 한국아나뱁티스트운동,” 복음과 상황 254호, 2011년 11월 29일 (http://www.goscon.co.kr/news/quickViewArticleView.html?idxno=28054) 3) 평화주의와 아나뱁티스트 신학에 관심이 있다면 다음 책을 참고: 신원하, 전쟁과 정치, 2003, 대한기독교서회; 김두식, 평화의 얼굴, 2007, 교양인 4) 김기현,“다시쓰는기독교세계관④: 이원론 vs 혼합주의”, 복음과 상황 196호, 2007년 1월 12일 5) 김은석, 김회권 목사가 말하는 87년형 복음주의 태동기, 복음과 상황 256호, 2012년 1월27일 (http://www.gosc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8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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