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엽

서평, '예언자적 상상력'

(월터 부르그만, 1978년 초판, 2001년 개정 증보판)

 

2019년 7월 이인엽

0. 들어가며

 

2014년 경, 미시간 생활 초기 김회권 목사님의 특별집회에서 받은 영감들이, 5년의 삶에서 한 지표가 되었었다. 모세의 출애굽과 가나안 정착이 보여주는 문명사적 전환, 제국의 정치와 종교에 대항하는 대안 사회로서의 성격 등은, 오늘 제국 말기적 현상들을 목도하는 우리에게 귀중한 통찰들을 준다고 느꼈고, 포로기나 포로귀환시기 지도력을 발휘하고 대안적 공동체를 만들었던 에스라, 느헤미야 같은 인물들을 보면서, 이민자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가고 어떤 사역을 하며 공동체를 이루어야 하는가에 대한 약간의 희망을 보기도 했었다 .

 

그런 마음으로 이런저런 시도와 활동들을 하며 살아온 미시간 생활 5년이 지나갔는데, 기쁨과 보람이 있던 순간들도 있지만, 그동안 겪은 실망과 환멸들이 마음이 우울하게 만든다. 새로운 변화를 기다리던 요즘, 예전에 사 놓고 잊어버렸다가 우연히 잡아서 읽기 시작한 이 책의 내용과 김회권 목사님의 긴 서문은, 5년전의 고민들을 다시 기억하고 반추하게 해 준다. 한국사회의 과제들과 한국교회들의 막장스러운 모습, 미국 사회와 미국 교회들의 한심한 모습들을 보면서, 종교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고, 미국 사회와 정책들에서 나타나는 제국 말기의 현상 속에서 문명사적 전환을 갈망하게 된다. 시대적 변화는 어디에서 어떻게 찾아올 것인가?

이 책은 78년에 출간되었는데, 매우 함축적이고 직관적이며 거시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좀 막연한 이야기로 느낄 수도 있겠지만, 그렇기에 시대를 초월해 오늘의 시점에도 큰 시사점이 있다는 생각이다.

 

1. 대안의 공동체가 타락할 때

 

저자는 파라오가 대표하는 ‘승리주의적 제국 종교’와 ‘억압의 체제’에 맞서, 모세는 ‘하나님의 자유의 종교’, 그리고 ‘정의와 긍휼의 사회’를 대안으로 제시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정치 종교 체제가 공고화 되고, 특히 솔로몬 시기 정치경제적으로 ‘왕권의식’에 기반한 일종의 ‘준 제국화’가 진행되다. 일종의 ‘승리의 저주’라고나 할까? 종교적으로 성전 체제가 공고화 되면서, 과거 존재했던 ‘하나님의 자유’와 ‘하나님의 접근성’ 사이의 긴장이 무너지게 되는데, 성전 체제가 강조하는 ‘하나님에 대한 접근성과 이스라엘의 수호자로서의 성격’이, 모세가 강조했던 ‘하나님의 자유, 체제에 대한 비판성’을 압도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준 제국화 된 이스라엘이 풍요와 안보를 우상으로 숭배하면서, 정의와 긍휼, 자유와 견제의 정신은 침식되고 상실 된다. 저자는 결국 가나안에서 대안 사회를 추구하던 이스라엘이 다시 이집트 제국의 체제로 회귀하면서, 거짓된 안정, 안보와 풍요의 이데올로기가 절대적 가치가 되고, 피라미드식 권력과 부의 집중이 이루어 지며, 비판하는 선지자의 목소리, 고통받는 약자의 목소리는 억압받게 된다고 지적한다. 이스라엘과 하나님 간의 관계도, 자유로운 하나님의 정의와 긍휼이라는 가치를, 이스라엘이 끊임없는 긴장과 노력 속에 구현해 내야 하던 관계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안보와 번영이라는 가치를 무조건 적으로 보장해주고, 성전에서 제사와 예배 행위를 통해 하나님에게 언제나 접근할 수 있는, 일방적이고 기계적인 차원으로 변해간다. 국가주의 성전 체제는 하나의 자기 완결적이며 화석화된 이데올로기가 되어 버린다.

 

한편으로 결국 솔로몬의 등극과 성전 건축도 하나님의 큰 계획 속에 있는 것은 아니었나 지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왕을 세우는 것 안에 하나님에 대한 반역적 차원과 하나님의 섭리가 공존했고, 왕국의 공고화와 성전 건축도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의 요소가 있었으나, 동시에 왜곡과 타락의 요소가 공존했다는 양면성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다윗의 후손이 성전을 건축한다는 예언도, 솔로몬과 성전 건축이라는 단기적, 제한적 성취와, 멀리는 메시야와 하나님 나라 건설이라는 장기적, 궁극적 차원을 모두 함축하고 있다. 역사와 현실, 예언을 보면서 긴장감 속에 복잡성과 양면성을 고민해야 하는 이유다.

 

2. 화석화된 이데올로기로 전락한 신앙

 

이제 체제수호의 이데올로기가 된 종교와 사상에 젖어 사람들은 ‘애통의 파토스’와 ‘시대의식’을 잃고 무감각해진다. 완결적인 이데올로기 속에서는, 변화도 없고 문제의식과 비판 의식도 실종되며, 창조력과 시대 의식이 사라진다. 하나님의 자유와 시대적 메시지도 그 이데올로기에 막혀 선포되지 못한다. 변화와 진보에 대한 기대도 없으며, 비판과 심판에 대한 두려움조차 없어진다. 이는 백성이나 지배자나 매한가지이다. 저자는 솔로몬이 쓴 전도서의 메시지에서 배어 나오는 ‘피로감’을 이러한 시대적 상황과 연관시키는데, 매우 흥미로운 지적이다. 기존의 설교에서 ‘헛되고 헛되니 모든것이 헛되도다’라는 전도서의 메시지를 인생에 대한 실존적 통찰로 찬양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런식의 비판적 성찰은 처음 접하는 것 같다. 또한 저자는 제국적 체제에서는 기술과 농업을 비롯한 사회 전반의 진보가 막히고 전쟁 기술만 진보하는데, 착취적 구조가 창조성을 고갈시켜 버리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짧지만 매우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이는 역사적으로 로마제국, 대영제국, 미국 등을 포함해, 제국 말기에 나타나는 매우 보편적, 반복적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솔로몬 체제가 지속되면서 모세의 전통을 따르는 ‘예언자들’의 역할이 부각된다. 예언자들은 ‘시적 상상력’과 ‘애통의 파토스’로 무장하고, ‘시대정신’이 담긴 메시지로 이스라엘의 무감각에 도전하고 그들의 타락과 악행을 비판한다. 약자에 대한 착취에 기초한 풍요, 이스라엘의 제국화를 조건으로 하는 거짓 안보, 이를 종교적으로 정당화 해주는 성전체제의 허구성을 지적한다. 인간들의 기대와 욕망에 얽매이지 않으시며 자신의 원칙에 따라 행동하시는 자유로운 하나님께서, 강자의 악행과 약자의 고통에 분노하고 계시며, 그분의 심판이 임박했음을 경고한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대로, 지배자들은 예언자들의 메시지를 억압하고 핍박했으며, 백성들은 진실을 외면하고 거짓된 약속과 안정감을 포기하지 않았다.

 

3. 예언자들: 비판과 희망의 메신저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은 이스라엘에게, 처절한 심판과 포로기라는 절망의 시대가 찾아오고, 거짓된 정치적 종교적 이데올로기의 약속들은 온전히 무너지게 된다. 그런데 그 때 비로서 하나님의 주도권이 회복된다. 이제 예언자들의 소명은 비판에서 새로운 희망의 선포와 활성화로 넘어간다. 예언자는 상황에 따라 무너뜨리기도 하고 다시 일으켜 세우기도 하는 자이다. 저자는 예레미야의 ‘절망과 심판’을 제2이사야의 ‘위로와 희망’과 비교한다. 이 둘은 대조되는 메시지이나, 파토스와 시대 의식이라는 차원에서 일치되는 예언자적 전통이다. 과거 희망의 상징들을 다시 일깨우고, 얽매이지 않으시는 자유로운 하나님, 이스라엘의 어리석음까지도 사용하시며, 역사를 뒤집으시고 피곤치 않으시는 하나님이, 왕으로 오셔서 주도권을 잡으신다는 희망을 열정적으로 선포한다. 죽음의 고통과 절망의 고뇌를 통과한 자들 가운데서, 새 희망이 선포되고 활성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예언자적 전통은 나사렛 예수의 메시지와 사역으로 계승되고 완성된다. 예수는 그의 탄생부터, 가이사와 헤롯의 왕권의식, 제국주의와 충돌하며, 그의 사역과 메시지를 통해 당시 종교 권력의 기반인 용서, 안식일, 밥상교제, 치유와 귀신축출, 세금과 빚, 성전의 개념을 모두 흔들어 놓는다. 기존의 정결법, 부채법, 속죄법들을 무효화해서 내부인과 외부인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차별 없는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선포한다. 그 시대의 ‘무감각’은, 살륙과 착취에 무뎌진 ‘제국의 체제’, 긍휼을 잃어버리고 배제와 율법주의, 선민사상으로 무장한 ‘성전 종교’에서 나타난다. 이에 맞서, 예수는 시대의 고통과 불의에 대해 지속적으로 애통과 분노를 터뜨리는데, 결국 정치적, 종교적 지배자들은 그를 더 이상 살려둘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동시에 예수는 냉혹한 현재가 유일한 실존이라 믿던 이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선포하고, 변두리에서 소외되고 희생되던 이들 안에 차별 없는 공동체를 형성하여, 그들을 새 시대의 주역으로 세워준다. 결정적으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기존 체제의 붕괴와 새로운 차원의 왕적 권위, 차별 없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한다.

 

4. 오늘의 예언자는 어디에?

 

1978년에 초판이 나왔던 이 책의 지적은 오늘의 시대적 상황에도 매우 잘 연결된다. 시대를 읽는 분별력과 통찰력이 완전히 거세되고, 화석화된 교리와 이념 만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설교들. 특정한 정치적 경제적 이념이 성경과 예수의 정신을 압도하고 대체해서,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조차 알 수 없는 교회의 현실. 하나님의 정의와 긍휼이 아닌 안보와 번영을 약속하는 종교. 지도자들은 타락하고, 백성들은 어리석으며, 모두의 욕망과 무감각이 어우러져, 기독교의 외피 안에, 개인적으로는 ‘기복주의’를 내면화하고,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으로는 ‘국가주의, 승리주의, 안보와 번영의 이데올로기’를 우상으로 숭배하고 있는 것이 이 시대의 현실이다.

 

대체 어디서부터 기독교의 변화와 개혁을 시작해야 할지 막막한 이 시대에, 저자의 말처럼, 시적 상상력, 애통의 파토스로 무장하고, 무감각하고 타락한 이들에게는 통렬한 심판을, 반면 절망한 이들에게는 새 희망을 선포할, 예언자들의 목소리가 절박하게 요청되는 것 같다. 이 시대의 예언자들은 어디에 있는가?

1978년 초판이 나온 책이지만, 오늘의 현실에 탁월한 시사점들을 준다. 예언자들의 메시지를 소재로 해서인지, 저자의 문체 역시 매우 함축적이고, 매우 깊은 통찰력들이 담겨있는 책이다. 그렇기에 유사한 고민을 해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해하기 어렵거나 막연하게 다가올 수도 있는 책이다. 생각할 거리가 많아서 한번에 읽지 못하고 하루에 한 챕터 씩 묵상하며 읽었는데, 성경과 사회를 깊이 고민한 대가의 관점으로 말씀과 역사를 조망해 주는 이런 시각을 접할 수 있다는 것이 큰 축복이다.

시대의 아픔과 모순, 불의에 민감한 사람, 새 시대를 갈망하는 사람들을 만나 고민을 나누고 새로운 가능성을 꿈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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