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엽

드라마 파친코 (Pachinko, 2022) 이야기4: 자이니치의 삶과 역사를 다룬 책, 영화들

2022년 6월 이인엽

 

드라마 파친코에 대해 이미 세 편 정도의 글을 썼는데, 마지막으로 드라마와 직접적으로 관련은 없지만, 드라마를 보고 생각난 자이니치(재일교포)에 대한 책과 영화들을 정리해 보려고 한다. 예전에 접했던 영화, 책들에 대한 기억이 가물가물 하기도 했지만, 이번 글은 쓰기가 좀 힘들었고, 시간도 오래걸렸다. 아무래도 자이니치들의 삶과 역사가 아픈 이이기들이 많고, 그것들을 다시 마주하는게 힘들어서가 아니었나 싶다.

 

1. 다큐멘터리 '우리학교(2006)'

 

 

처음 떠오르는 것은 2006년 개봉한 다큐멘터리 ‘우리학교’이다. 김명준 감독이 일본 홋카이도의 조선학교인 '혹가이도 조선 초중고급학교'의 교원, 학생들과 3년을 함께 보내며 만든 다큐로, 바지저고리를 입고 조선말과 문화를 배우며 일본에서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고 살아가는 조선학교 사람들의 모습을 다뤄 주목을 받았다.

 

냉전기 남한에는 조선학교가 거의 알려지지 않았거나, 아니면 김일성을 찬양하는 친북적인 곳으로 경계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조선학교가 북의 지원을 받고 북과 가까와 진 것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과거 남한은 재일동포 자녀들의 교육에 관심이나 지원이 별로 없었다. 오히려 군사독재 정권의 정당화를 위해, 재일교포 간첩사건을 조작하기도 했다. 반면, 북한은 재일동포 자녀들에게 나름 지원을 했었다. 70년대 초까지 북한이 경제적으로 남한보다 여유가 있었던 상황도 작용했을 듯. 70년대 까지 일본에 북과 조총련이 지원하는 조선학교가 160개에 달했으나 민단계열 학교는 2곳 밖에 없을 정도였고, 그렇기에 민족교육을 시키려면 조선학교를 다닐 수 밖에 없는 상황도 있었다. 상황상 조선학교는 자연스럽게 북쪽에 가까울 수 밖에 없었다. 이런 배경을 이해하고 나면, 조선학교에 대한 거부감이 좀 사라지고, 이념을 떠나 일본 사회 내의 극심한 차별과 억압 속에서도 민족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의 모습에 감동을 받게 된다. 조선학교는 일본에서 정식 교육기관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등 많은 차별에 시달린다. 특히 북의 일본인 납치문제가 논란이 되고, 북한이 미사일을 쏘고 핵실험을 하기 시작하면서, 일본 극우세력의 타겟이 되기도 했다. 과거 자이니치들은 식민지 시절의 징용과 가난 등, 일본의 피해자로 그 땅에서 살아왔으나, 이제 일본 우익들은 자신들을 피해자로 규정하며 일본의 자이니치들을 악마화 하기 시작한 것이다.

 

조선학교 고3 아이들은 북한으로 수학을 떠나는데, 북에 입국할 수 없는 남한 출신의 김명준 감독 대신 학생 한명이 수학 여행 장면을 촬영해 온다. 북의 안내원들의 환영을 받고, 말이 통하는 조국에 왔다는 사실에, 아이들은 들뜨고 황홀해 하는 모습을 보인다. 말 그대로 이곳이 지상낙원이로구나하는 모습이었다. 일본에서 소수자로 온갖 차별 받던 이들의 배경을 생각하면, 왜 그런 모습을 보이는지 이해가 간다. 하지만, 이들이 만일 북에 귀화해서 북에서 일상을 살게 된다면 정말 하루하루가 천국 같을까 하는 질문도 감출 수 없다.

 

2. 신숙옥 씨와 ‘자이니치, 당신은 어느 쪽이냐는 물음에 대하여(2006)’

 

젊은 시절의 신숙옥 (위), 그녀의 책 (좌), 최근 모습 (우)

 
 

자이니치들의 삶과 역사의 복잡성을 생각하게 된 것은, 역시 비슷한 시기 신숙옥 씨의 책 ‘자이니치, 당신은 어느 쪽이냐는 물음에 대하여(2006)’를 읽고 나서였다. 1959년 일본 도쿄에서 출생한 신숙옥씨는 재일동포 3세 인권운동가, 강연자, 인재육성 전문가로, 2003년 가을 KBS TV ‘한민족 리포트’를 통해서 유명해 졌다고 한다. 젊은 시절 유창한 일본어로 일본 우익들과 웃음 띈 얼굴로 당차고 날카롭게 논쟁하는 모습을 보면, 차별속에서도 자신의 정체성과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온 그녀의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젊은 시절 신숙옥의 토론 영상 두개

 

 

 

그녀가 쓴 자신의 가족사와 경험들은 매우 읽기 고통스럽다. 다큐 ‘우리학교’에서 묘사되는 조선학교나, 조선학교 아이들이 보는 지상낙원과 같은 우리조국 북한의 인상은, 신숙옥의 기록과 많이 대조된다. 그녀 역시 조선학교로 전입해 학교를 다녔는데, 시기적인 차이도 있지만, 총련 내부의 파벌싸움, 폭력적인 체벌 등 좋은 기억이 '단 하나도 없다'고 서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숙옥은 조선학교를 통한 자이니치의 민족교육이 일본의 공교육 속에서도 보장되어야 한다고 인정한다.

 

신숙옥의 가족 중 외할아버지, 외삼촌 둘, 외사촌이 북송을 자원했고 북에서 숨을 거두는데, 그 기록은 읽기 힘들 정도로 처참하다. 종전 직전인 1944년에 일본의 조선인들은 무려 2백만에 달했는데, 해방 이후 상당수가 귀국하고 약 60만명이 남았다고 한다. 이들은 일본 국적도 없고 빈곤하게 살아 일본 정부의 골치거리가 된다. 자이니치의 상당수는 제주도, 전라도, 경상도 등 남한 출신이었으나, 당시 한일 수교 전이었고, 남한 정부도 이들을 환영하지 않았다. 반면 북한은 1956년 8월 종파사건 이후 김일성 유일체계가 조성되면서 중화학공업을 육성하는데, 그 와중에 인력이 필요하게 되어, 북송 사업을 추진한다. 신숙옥이 태어나던 1959년 부터 북송이 시작되어 12월 14일, 제1차 귀환선인 크릴리온 호가 니가타항에서 출항했다. 북한 정부는 일본에서 보험도 없고, 취직, 주택구입 등 모든 면에서 차별받던 자이니치들에게, 북조선은 살 곳, 입을 것, 먹을 것, 의료, 교육, 취직 등이 모두 보장된 ‘낙원천국’이라는 엄청난 선전을 퍼부었고, 1984년 까지 93,340명이 북으로 건너갔고, 이중 6,839명은 조선인과 혼인하거나 혼혈로 태어난 일본인이었다고 한다.

 

 
북송선의 모습

북송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북의 청진항에 도착했을 때 부터 환상이 깨어졌는데, 북송자들은 환영 인파의 허름한 옷차림에 충격을 받았고, 북한 환영 인파들은 일본에서 차별 받고 고생한 이들의 옷차림이 자기들 보다 훨씬 다양하고 부유해 보여서 말문이 막혔다고. 비극적이게도 이들 대부분은 순혈주의가 강한 북에서 "째포", "쪽발이"등으로 또 다른 차별을 받았고, 일본 사회와 자본주의에 익숙한 이들은, 북에 적응하지 못했으며 심지어 간첩이나 정치범으로 몰려 숙청을 당한 이들도 많았다. 일본으로의 귀국은 허락되지 않았고, 탈북자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북에서 숨을 거두었다. 물론 일본으로부터 자금을 송금 받을 수 있는 이들 중에 사업가로 출세한 경우도 있었고, 북송 교포 출신으로 김정일의 눈에 띄어 총애를 받은 김정은의 어머니 고용희도 있긴 하다.

신숙옥은 1965년 북으로 건너간 외삼촌이 14년간 피로 찍은 지문과 고통스러운 절규가 가득한 편지를 끊임없이 보내왔다고 이야기 한다. 이미 고통스러운 일본의 삶에서, 삼촌의 편지를 받는 것은 악몽과 고통이어서 나중에 뜯어보지도 못했다고 고백하는데, 마침내 삼촌의 사망 소식을 듣고는, 슬픔과 안도감에 기쁨까지 느꼈다고 한다. 그녀는 북송 사업을, 골치거리인 자이니치를 처리하기 위해, 일본과 북한의 협력하에 진행된, 일종의 유대인 가스실로 표현할 정도였다. 이렇게 일본 사회 뿐 아니라, 북송교포들을 차별하고 숙청한 북한 사회, 그리고 항상 어느쪽이냐는 질문을 강요하는 남한에도, 신숙옥은 날카로운 비판을 던진다.

 

신숙옥은 최근에도 극우세력으로 인해 고초를 겪었다. 일본 화장품 기업 DHC는 회장인 요시다 요시아키가 자이니치 차별을 조장하는 글을 올리는 등, 극우 성향으로 악명 높은데, 그 자회사인 DHC텔레비전은 오키나와현 주일 미군 헬기 이착륙 시설 반대 운동을 하는 이들을 폭력을 일으키는 '테러리스트' 혹은 '범죄 행위를 반복하는' 집단으로 규정했고, 신숙옥이 공동대표로 있는 단체가 이를 부추기고 경제적으로 지원한다는 발언을 했다. 명예훼손 재판에서 일본 법원은 방송사에 위자료 지급과 사과를 명령해서 신숙옥 측이 승소했으나, 이후 일본 극우 세력이 신씨를 표적으로 삼아 극심한 협박과 위협을 가해왔다. 결국 피해자인 신씨가 당분간 독일로 피신해 있는 상태라는 소식을 들었다. 일본 극우 세력의 위협 속에 살아가야 하는 자이니치의 현실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다. 역사의 진실과 정의가 세워지지 못하고, 힘 가진 전범세력의 후손들이 지배하며, 약자와 피해자가 끝없이 차별받는 사회 속에서 산다는 것은 어떤 삶일지 상상하기도 힘들다. 과연 일본이라는 사회는 구원 받을 수 있는가?

 

최근 극우의 표적이 되어 협박받은 상황을 설명하는 신숙옥씨 영상

 

 

3. 용길이네 곱창집 (2018)

 

 

영화 ‘용길이네 곱창집’은 자이니치인 정의신 감독의 작품으로, 원래 ‘야키니쿠 드래곤’이라는 이름의 연극으로 시작했는데, 반응이 좋아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공연을 하다 영화로도 만들어 졌다. 아버지 용길(김상호)은 제주도 출신으로 태평양 전쟁에 끌려가 한 팔을 잃고 돌아온다. 억척스럽게 돈을 모아 한국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전재산을 먼저 실어보낸 배가 현해탄에서 침몰하고, 한국은 제주도4.3사건, 그리고 한국전쟁이 발발해 일본에 주저앉고 아내마저 죽고 만다. 역사적으로 제주도 4.3사건이나 한국전쟁 등의 상황 때문에 귀국을 포기한 이들도 많았다고 한다. 용길을 비롯해, 오사카 비행장 건설을 위해 일하던 조선인 노동자들은 비행장 옆에서 주거하게 된다. 무한도전에서 소개되어 유명해진 우토로 마을도 교토 비행장과 병설 비행기 공장 건설을 위해 약 1,300여명의 조선인 노동자들이 동원되었다가 정착하게 된 것이 그 시작이었다고 한다. 용길은 돈을 주고 땅을 샀다고 하지만, 알고보니 그곳은 일본의 국유지였고 (아마도 사기를 당한 듯) 계속해서 퇴거 명령을 받는다. 용길은 두딸 시즈카와 리카, 그리고 자신처럼 홀로 된 영순(이정은)과 재혼하면서 영순이 데려온 딸 미카, 그리고 용길과 영순 사이에서 아들과 살면서 곱창집을 운영한다. 정의신 감독은 용길이 한국으로 귀국하기 전에 일본에서 모은 재산을 배로 보냈다가 침몰해 다 날리고, 일본에 주저 앉았다는 설정이 자신의 아버지의 실제 경험을 모티브로 했다고 인터뷰에서 밝힌다.

 

영화는 용길의 세 딸들의 복잡한 연애이야기를 중심으로 자이니치 들의 삶의 애환을 그린다. 용길 부부의 아들은 착하지만 약간 장애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지붕에 올라가 풍광을 보는 것을 즐기고 말을 잘 하지 못한다. 아들을 조선학교를 보내자는 아내 영순의 말에, 용길은 우리는 일본에 살아야 하고 도망치지 말고 버티고 적응해야 한다는 말을 반복하는데, 아들은 일본 학교에서 잔혹하게 이지메를 당하고, 학교를 수시로 빼먹다가 결국 물에 뛰어들어 자살한다. 퇴거를 강요하는 공무원에게 용길은 자신은 이 땅을 돈 주고 샀다며 항변하고, 퇴거를 시키려면 태평양 전쟁에서 잃어버린 내 팔을 돌려달라고, 그리고 일본 학교에서 이지메 당해 죽은 내 아들을 살려내라고 서럽게 운다. 결국 퇴거를 하게 되면서 세 딸은 각자의 길을 떠나는데, 일본에 적응하지 못한 첫째딸 부부는 북한으로 떠나고, 한국 출신과 결혼한 둘째딸은 한국으로 가며, 세째딸은 이혼남과 결혼해 일본에 정착한다.세 딸을 떠나보내며 아들의 기억을 간직한 채, 용길 부부도 무너져 가는 곱창집과 마을을 떠나며 영화는 끝난다.

 

북송 교포들은 검열되는 편지 때문에 고통스러운 자신들의 현실을 일본의 가족, 친척들에게 간접적으로 알렸다고 한다. 자이니치의 삶을 다룬 영화 ‘용길이네 곱창집’을 보면, 북송교포가 북한의 삶이 '아마가사키시 만큼 풍요롭다'며 편지를 보냈는데, 사실 1960∼70년대의 아마가사키는 재일교포들이 집단으로 모여사는 '슬럼'이었다는 에피소드가 소개된다. 이런 소문을 알면서도 일본에서의 차별을 견디다 못한 용길의 맏딸 부부는 북송을 택한다. 영화 ‘피와 뼈’에도 일본에서 폭력적인 삶을 살던 주인공 김준평이 말년에 북송을 택해 그동안 모은 재산을 북에 기부하고는 가난하게 살다가 비참하게 세상을 떠나는 장면이 묘사되기도 한다.

 

연극 '야키니쿠 드래곤'을 소개하는 영상. 5:45부터 나오는 용길의 대사가 인상적이다

 

 

4. 양영희 감독의 영화들: 디어 평양(2006), 굿바이 평양 (2009, 가족의 나라(2012).

 

자이니치인 양영희 감독도 북송과 관련된 가족의 이야기를 영화로 담아냈다. 그녀는 조총련 계열인 도쿄 조선대학교를 졸업한 후, 조총련계 고등학교에서 2년간 국어교사로 지내며 그 사이 결혼도 했으나, 결혼도 교직생활도 맞지 않아 연극과 영화 관련된 일을 하게 된다.

그녀는 먼저 아버지를 주제로 한 다큐 ‘디어 평양’(2006)’과 북송된 오빠의 딸로 평양에 사는 조카 선화의 성장과정을 담은 ‘굿바이 평양 (2009)’을 선보였고, 이후 극영화인 ‘가족의 나라(2012)’를 제작했다. 양 감독의 아버지는 제주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건너와 북한국적을 택했고 조총련 간부가 된다. “김일성 장군님을 위해서 자녀들을 키우자”고 말할 정도로 북한체제와 북송사업을 지지했던 아버지는, 1970년대 초반 당시 자신이 솔선수범해서 10대 청소년이던 세 아들을 북송했고, 북한 경제가 어려워진 후 부모님은 거의 30년간 아들 가족의 생활물품을 보낸다. 아버지가 일본에서 물품을 보내는 조총련 간부였기에, 감독의 세 오빠들은 숙청을 당하거나 그런 일은 없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던 큰 오빠는 북에 간 이후 오랫동안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내용도 소개된다. 오빠들을 북으로 보낸 아버지와 양감독의 갈등이 잘 묘사되고, 나중에는 아버지와 어느정도 화해하는 장면도 나온다. 다큐를 통해 북송 문제를 묘사한 것으로 인해 양 감독은 북에 입국 불허 조치를 받았고, 2009년 큰오빠가 세상을 떠났을 때도 방문하지 못했다고 한다.

 

5. 할매꽃 (2007)

 

다큐 ‘할매꽃’을 만든 문정현 감독은, 좌익 혐의로 몰락한 외가의 가정사를 통해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 학살 문제를 다룬다.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좌익이었던 외가의 큰 할아버지(외할머니의 오빠)는 남한에서 좌익 색출이 시작되자 잘 아는 경찰관에게 자수를 하는데, 경찰서로 순순히 가던 그를, 어떤 이유에서인지 경찰관은 들판에서 총으로 사살해 버린다. 억울하다는 말도 못한채 외할머니는 허망한 오빠의 죽음을 가슴에 묻고 살아간다. 일본에서 공부하던 작은 할아버지는 형의 허무한 죽음을 보고 귀국을 포기한 채, 딸을 북송시킬 정도로 조총련 활동에 투신했다고 한다. 조총련 소속이지만 작은 할아버지는 형의 무덤에 절이라도 한번 하고자, 박정희 정부 시절 보도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 귀국 허가를 받았는데, 남한 정부는 공항에 들어오는 그의 사진을 찍어 마치 조총련계가 귀순이라도 한 듯 신문에 보도한다. 이로 인해 일본에 돌아가자 조총련에게 재산을 몰수당하고, 누나를 북송시킨 것에 대한 아들들의 원망을 받으며, 홀로 외롭게 살다 쓸쓸한 죽음을 맞았다는 비극적인 이야기가 소개된다. 전쟁과 학살, 타향에서의 차별, 남과 북 모두와 가족에게서 버림 받은 한 인물의 비극적 삶에 가슴이 먹먹해 진다.

 

6. 재일교포 학원침투 간첩단 사건

 

 
1971년 화상을 입은 채 검찰구형을 받는 서승(우), 그리고 동생 서준식(좌)의 모습

자이니치 관련 가장 고통스러운 스토리 중 하나는 서승, 서준식 형제의 ‘재일교포 학원침투 간첩단 사건’이다. 1928년 할아버지가 일제의 수탈에 못 견뎌 일본으로 건너가고, 그의 아버지는 징용을 피해 숨어다니다 종전을 맞았고, 1945년 교토 근교에서 서승은 태어난다. 일본에서의 차별속에 정체성을 고민하던 그는 1964년 도쿄 교대 1학년 때, 재일한국인학생 조국방문단의 일원으로 한국을 방문해 4.19의 흔적 등을 돌아보며,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한다. 그리고 1968년 그는 서울대 대학원 사회학과에, 동생 서준식은 같은 학교 법학과에 유학을 온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조국에 유학 온 이들 형제를, 간첩으로 몰았다. 한차례 방북 사실 때문에 중앙정보부에 1971년 연행되어, 서승은 1심에서 사형, 2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서준식은 7년형을 선고받았다. 대통령 선거가 있던 1971년 박정희 정권은, 이들이 야당 김대중 후보에게 북한의 선거자금을 전달하려 했다는 혐의를 씌웠다. 경쟁자 김대중을 빨갱이로 몰고 흔들리는 권력을 지키기 위해, 이들 형제를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다. 보안사에서 고문을 견디다 못한 서승은 난로의 경유를 뒤집어 쓰고 분신자살을 기도하다, 화상을 입은 얼굴로 사형 구형을 받았다. 무학이었던 어머니 오기순 씨는 아들들의 면회를 다니기 위해 50나이에 글을 배워 10년간 50번이나 일본에서 한국으로 면회를 왔고, 1980년에 자궁암으로 돌아가신다. 앰네스티는 서승을 1974년 세계의 양심수로 선정하고, 앰네스티를 중심으로 세계적인 석방운동이 벌어지는데, 한국의 민주화 이후 무려 투옥 17년째인 1988년에 서준식이 석방되고 1990년에는 서승도 석방되었다. 서승은 이후 리쓰메이칸대에서 인권운동과 투옥경험을 강의하다 교수로 임용된다. 서준식은 인권운동사랑방 대표를 역임했다. 서승의 자세한 이야기는 그의 인터뷰 참고. 대한민국 대통령이 재일동포간첩사건에 대해 공식 사과한 것은 2019년 문재인 대통령이 처음 이라고 한다. 참으로 모질고 엄혹한 시절이었다.

서경식의 저서들

 
 

두 형들이 구속될 때, 와세다대학에서 공부하던 동생 서경식은 장기간 형들의 구명활동을 펴고 이 경험을 바탕으로, 디아스포라 기행, 디아스포라의 눈 등의 책을 펴 낸다. 이산을 강요당한 디아스포라의 관점에서 주류가 보지 못하는 사회의 모순과 차별을 날카롭게 관찰하며, 국민주의(내셔널리즘)을 비판하는 저서로 인상 깊게 읽었다. 서경식은 도쿄 경제대학 현대법학부 교수로 일한다.

 

7. 영화 ‘박치기(2005)’, 그리고 ‘임진강’이라는 노래의 사연

 

 

‘소년 M의 임진강’이라는 소설을 바탕으로 이즈츠 카즈유키 감독이 제작한 청춘영화 ‘박치기(2004)’도 자이니치의 삶을 묘사한다. 주인공 중 하나인 리안성은 조선학교의 주먹 짱으로, 조선 학생들을 괴롭히는 일본 학생들을 박치기로 혼내주는데, 조국인 북한으로 가서 축구선수가 되고 싶어한다. 조선학교를 방문했다가 리안성의 여동생 경자를 보고 사랑에 빠진 일본 학생 고스케는, 경자에게 다가가고자 조선학교에서 들은 노래 ‘임진강’을 연습해서 부른다. 고스케는 임진강을 가지고 포크송경연대회에도 출연하는데, 그를 격려하는 PD와 방송을 막는 방송국 임원 사이에 싸움이 벌어진다. 임진강이라는 노래는 조총련, 한국 공안, 일본 경시청과 내각이 모두 금지시킨 요주의 노래라는 것. 어렵사리 노래가 방송되는데, 그 와중에 리안성과 조선 학생들은 일본 학생들과 패싸움을 하고, 리안성의 일본인 여자친구가 산고 끝에 출산을 하는 장면이 비춰진다. 어떻게 임진강은 남, 북, 일본 세 나라에서 모두 금지곡이 되었을까? 먼저 노래 가사를 보자.

 

임진강 맑은 물은 흘러 흘러 내리고

뭇새들 자유로이 넘나들며 날건만

내 고향 남쪽 땅 가고파도 못가니

임진강 흐름아 원한 싣고 흐르느냐

 

강 건너 갈밭에선 갈새만 슬피 울고

메마른 들판에선 풀뿌리를 캐건만

협동벌 이삭 바다 물결 우에 춤추니

임진강 흐름을 가르지는 못하리라

 

이 노래는 북한의 공훈예술가인 박세영이 작사했다. 그는 남한의 서울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에 공산주의 사상을 갖고 독립운동과 카프 문학운동에 참가했으며, 해방 후 월북하여 북한의 국가를 작사하기도 했다. 1950년대에 이 노래를 작곡했는데, 임진강은 황해도와 경기도를 가로지르는 남북의 경계로 분단을 상징한다. 1절에는 남에 두고 온 가족과 친구들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담겨 있고, 2절에는 북한의 경제사정이 남한보다 나았던 50년대, 북의 협동농장에서 풍족한 이삭의 물결을 빈곤한 남한의 사정과 대비시켰다.

당연히 북한 예술가가 북의 우월성을 언급하는 이 노래는 남한에서 금지곡이었는데, 분단이 심화되면서 남한에 두고 온 가족과 고향을 그리워 하는 감상주의적인 내용이라는 점으로 북한에서도 금지가 되었다고. 흥미롭게도 이 노래는 1960년 초에 일본의 조선학교에서 불려지다가 일본의 포크 그룹 더 포크 크루세이더즈에게 알려져 일본어로 발매되는데, 저작권이나 가사 번역 등을 문제 삼은 조총련 측의 항의, 그리고 북한 노래라는 점으로 일본에서도 금지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에서 인기를 끌면서 일본 학생운동의 현장에서 자주 불렸다고. 일본에서 인기를 끌었던 한국 가수 김연자가 90년대에 이 노래를 불러 다시 유명해졌고, 2004년 영화 박치기를 통해 더 유명해 졌다고 한다.

 

영화 속 노래 임진강 관련 장면

 

 

세 나라에서 모두 금지곡이 되어 버리는 이 노래의 처지가, 바로 북한, 남한, 일본 어디에서도 완벽하게 소속되지 못하는 자이니치 들의 운명을 상징하는게 아닌가 싶다. 조용하면서도 서러운 멜로디는 이들의 아픔을 위로하는 듯. 시간이 흐르고, 이 노래는 일본에서는 시위가 활발하던 시절을 추억하는 노래로, 남한에서는 통일을 염원하는 노래로, 자이니치들에게는 아픔을 달래는 노래로 불려진다고 한다.

 

몇가지 버전의 노래 영상을 소개한다.

 

일본 그룹 포크 크루세이더즈가 부른 버전

 

 

 

 

 

아무래도 외국에서 살다보니, 디아스포라의 삶에 대해 더 관심을 갖게 된다. 그러고 보면 최근 그런 작품들을 많이 접했다. 블로그에 올린 글 중에도, 자이니치의 삶을 그린 드라마 파친코, 그리고 미국의 한인들의 삶을 다룬 저스틴 전 감독의 영화들, 쿠바에서 한인으로서의 가치를 찾아간 헤로니모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 소련에 유학중이다 8월 종파 사건시기 망명해서 구소련에서 흩어져 살아간 이들의 삶을 다룬 다큐 “굿바이 마이러브NK: 붉은 청춘” 등이 있다.

이들의 삶을 보면, 마치 민족이라는 강물에서 떨어진 물방울들 처럼, 흩어지고 말라가서 사라지고 잊혀진 듯 보인다. 그래서 더 애처로운 마음도 든다. 하지만 언젠가 통일이 되고, 한 민족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새롭게 질문하는 날이 올 지 모른다. 그러면 주변인으로, 소수자로, 추방자로, 살아간 작은 물방울 같은 이들의 이야기가 한데 모여, 한국인이라는 더 크고 넓은 정체성의 강물과 파도를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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