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엽

지옥 (2021): 고통과 불행에 대한, 종교 철학적 질문들

​2021년 12월 이인엽

 


0. 들어가며

‘오징어게임’의 세계적인 히트를 이을 작품으로 주목 받은, 연상호 감독의 넷플릭스 드라마 ‘지옥’을 감상했다. 예고편만 봤을 땐 크게 기대가 되지 않았는데, 지옥의 사자라는 괴물들이 고지를 받은 사람을 태워 죽이고 사라진다는 설정이 좀 황당 했고, 나중에 이걸 어떻게 설명할지 막막해 보여서 였다. 그런데 시즌1을 다 보고나니, 아주 잘 만든 작품이다 싶다. 굳이 비교 하면 ‘오징어게임’은, 신자유주의 승자독식 사회에 대한 비판, 추억 마케팅, 서바이벌게임, 리얼리티 쇼 같은, 여러가지 요소를 지닌 종합선물세트 같은 작품이라 다양한 이들에게 어필 했다면, ‘지옥’은 대중성, 오락성은 조금 떨어지지만, 꽤 무거운 종교적, 철학적, 사회적 질문들을 던진다. 연상호 감독도 약간 마니아 층을 겨냥하고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래서 ‘오징어게임’에 비해서는 약간 호불호가 갈리고, 좀 지루하다는 평도 있는 듯. 그럼에도 워낙 수작인지라 오징어게임을 넘어 전 세계 1위를 찍었다. 시즌 1은 6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는데, 다른 시즌으로 생각해도 좋을 정도로 전반부, 후반부 각 세 에피소드가 확연히 구분된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이 좋았던 것은, 혹시 감독의 목표가 “종교철학의 대중화(?)”는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다양한 종교철학적 질문들(악의 문제, 신정론, 신의 예정과 예지, 인간의 자율성, 이신론, 불가지론 등)을 드라마 속에 잘 녹여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이런 저런 생각들을 정리 해 본다.

스포일러 주의! 그리고 매우 긴 글 주의!

1. 전반부의 주제: 악의 문제, 인간의 자율성과 신정론


전반부 세 편은 악의 문제, 인간의 자율성과 신정론의 문제를 생각하게 한다. 드라마는 특정 시간에 지옥에 간다는 ‘고지’를 받은 사람들에게 지옥의 사자가 나타나 사정없이 두들겨 패다가 태워 죽이고 사라지는 사건으로 시작 된다. 이에 따라, 전부터 이런 사건을 '신의 의도’로 해석해 온 새진리회라는 종교집단의 정진수 의장(유아인)이 주목 받는데, '신의 의도'란 지옥의 심판을 미리 ‘시연’함으로써 인간이 죄를 버리고 정의로운 삶을 살라는 경고이며, 시연을 받은 자들은 지옥에 갈 만한 죄인이었다는 주장을 펼친다. 이 사건을 수사하는 진경훈 형사(양익준)는 정진수의 주장에 의구심을 품는데, 형사라기 보다 철학자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상당히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뜯겨 죽을까 봐 선하게 산다'. 그걸 정의라고 할 수 있나요?....말씀대로라면, 그 신은 인간의 자율성을 믿지 않는가 보네요?”

한방 맞은 정진수는 사이비 종교 지도자 답게, 논리적 반박 보다는 진경훈의 개인적인 트라우마를 파고들어 심리를 흔들어 놓는다. 과거 진경훈의 아내는 납치되어 참혹한 강간살해를 당했는데, 범인은 반성하지 않았음에도 심신미약을 이유로 낮은 형량을 받고 출소했다. 정진수는 이를 자극하며, 정의가 무너진 세상에 신의 심판이 필요하지 않냐 주장 하는 것.

이런 설정을 접하며 ‘데쓰노트’라는 일본 만화/영화 시리즈가 생각났다. 사신이라는 존재가, 상대의 이름을 쓰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데쓰노트를 떨어뜨려, 고등학생인 주인공이 이를 갖게 되고, 세상의 범죄자, 악인들을 죽여 나가는 설정이었다. ‘지옥’과 다른 점이 많지만, 악인이 제대로 처벌받지 않는 세상에서, 심판이 시작된다면 어떻게 될까 하는 주제가 좀 비슷했다. 데쓰노트에서 처럼 불완전한 인간이 그런 능력을 갖게 된다면 세상은 혼란에 빠질 것이다. 그런데, 만일 신이 직접 이런 심판을 매번 수행해도 많은 문제가 생겨 버린다. 드라마 지옥에서 처럼 말이다.

악의 존재와 심판과 정의의 부재, 이유 없는 고통 등에 대한 의문은, 아주 오래된 철학적, 종교적 주제이다. 특히 서구 기독교 사회에서는 ‘전능하고 선한 신'이 존재한다면, 어째서 세상에 악과 고통이 존재하냐는 질문이 있었고, 이에 답하기 위한 논증들을 ‘신정론(神正論), 혹은 변신론(辯神論)’이라고 한다. 질문은 이렇다:

신이 선해서 악을 막을 의지는 있지만 능력이 없다? 그렇다면 신은 전능할 수 없다.
신이 전능해서 악을 막을 능력은 있는데 의지가 없다? 그렇다면 신은 선하지 않다.
신이 악을 막을 능력도 의지도 없다? 그렇다면 그 존재는 신일 수 없다.
신이 악을 막을 능력도 의지도 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 것을 설명할 수 없다.

그런데, 위의 질문의 전제를 뒤집을 경우, 신이 전능하고 선하다면 악을 원천적으로 허용하지 않거나, 악이 발생하면 바로 개입해서 심판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면 진경준 형사의 말처럼 인간의 자율성과 선택권 자체가 사라지는 문제가 생기는 것. 죄를 지은 자에게는 무조건 고지가 임하고 지옥 불로 태워 죽인다면, 누가 죄를 짓겠는가? 그리고 처벌이 무서워 죄를 짓지 않는 세상을 정의롭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면 인간은 자율성과 주체성이 없는 노예나 로봇으로 전락하게 되고, 인간의 진정한 '선택'과 ‘성장’은 불가능해지게 된다.

성경과 역사의 ‘맥락’ 속에서 신의 능력과 성품을 깊이 생각해보면, 신은 어떤 의도로 때에 따라 악을 허용하고, 자신의 능력과 개입을 제한한다고 볼 수 있다. 성경의 역사나, 한국의 민주화 역사를 살펴 봐도, 때로 악한 지도자가 나타나 의인과 약자들을 탄압하여 정의가 무너진 시기가 많았다. 그런데 대표적으로 광주 민주화 항쟁에서 보듯 의인의 희생과 피는, 많은 이들을 깨우치고, 그에 대한 빚진 마음이 대중을 각성시켜 민주화와 정의를 이뤄 왔다. 이는 기독교가 말하는 십자가 사건과 유사하다. 죄 없는 신의 아들의 죽음과 부활이, 세상 권력의 악을 폭로하자,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자들이 생겨나 악한 권력에 맞서 세상을 바꾼다는 것이다. 신은 광주가 피를 흘릴 때나, 메시야가 십자가에 못박힐 때에도, 직접 개입해서 ‘의인의 희생’과 ‘악의 일시적 승리’를 막지 않았다. 신은 때로 악이 횡행하는 상황과 의인의 희생(십자가 사건)을 통해 인간을 깨우쳐, 각성한 ‘인간’을 통해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매번 신이 심판과 정의를 수행한다면, 인간의 역할과 선택, 책임은 사라져 버릴 것이다.

기독교 신학에서는 신의 예정과 예지에 대한 논쟁이 진행되어 왔다. 신의 주권과 인간의 자율성을 양 끝에 두고 스펙트럼으로 나열한다면, 한쪽에는 신의 절대 주권과 전지/전능/전선한 신의 성품, 그리고 인간의 전적 타락을 강조하는 칼빈주의(장로교)가 있고, 반대쪽에는 상대적으로 인간의 자율성과 책임을 강조하는 알미니안주의(감리교 등)가 있다. 양자의 논쟁은 그 역사가 매우 길다. 칼빈주의는 신의 주권과 예정으로 세상을 설명한다면, 알미니안주의는 인간에게 신의 사랑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선택의 자유도 있다고 보았으며, 신에게 가까이 가기 위한 인간의 노력도 강조한다. 궁극적으로 신의 뜻은 이뤄지지만, 신이 모든 것을 예정했다기 보다는 예지하는 것에 가깝다는 것.

알미니안 주의에서 더 나아간 ‘열린신론’은, 진정한 자유의지란, 결정을 내리는 순간 실재가 만들어지기에, 결정을 내리기 전까지 그것은 실재하지 않고, 모든 미래는 아닐지라도, 미래의 일부분은 신에게도 열려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성경에서 신이 후회, 놀람, 실망, 변심 등을 보이는 경우를 근거로 제시한다. 신도 가능성으로 주어진 열린 미래를 직면하지 않으면 그런 감정이나 결정이 불가능하다는 것. 신이 궁극적으로 자신의 뜻을 성취하지만, 모든 것을 미리 정해놓고 안다는 것이 아닌, 가능한 결과들을 예상한다는 차원으로 해석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과정신학’은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을 차용해 신과 인간의 세상이 상호작용하며, 신이 세상의 밖에 있는 완전한 존재가 아닌, 세상과 공감하며 고통하는 존재로, 인간 세상과 함께 만들어가는 존재로 설명한다. 신은 초자연적인 기적으로 세상에 개입하지 않으며, 신 역시 미래를 불확실하게 경험하며, 자신의 뜻이 성취되고 궁극적으로 승리한다는 보장은 없다고 주장한다. 열린 신론이 기독교의 바운더리에 있다면, 과정신학은 기독교의 신론에서 많이 벗어났다고 볼 수 있는데, 중요한 것은 현실을 깊이 고민하다 보면, 단순한 신관으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는 것이다.

(신학적 논의는 개인적으로 즐겨 듣는 유튜브 채널인 '신학블록버스터'의 내용을 참고했음)

물론 이런 논쟁은 신이라는 초월적 존재를 인간 이성과 논리로 이해하려 드는 한계에서 나왔을 수 있다. 2차원에서 3차원을 설명하고 구현하는 것이 불가능 하듯, 신의 전지전능과, 인간의 자율성과 선택이, 궁극적으로 양립할 가능성도 있다. 예를 들어, 열린 신론에서 말하는 수많은 인간의 자율성들이 어떤 미래를 만들지 그 변수들의 조합을 계산하고 예측하고, 동시에 신의 뜻을 구현하는게 인간적으로 불가능해 보이지만, 신이 정말 전능한 존재라면 그런 초월적인 예정과 예지가 가능할 수도 있다.

물론 이런 신학적 논의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목사와 교회들은, 신의 전지전능전선 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강하다. 한국 교회에 보수적 장로교회가 주류라는 특징 때문이기도 하지만, 칼빈주의적 사고가 기독교 안에 보편화 되어 있는데, 이를 매우 조악하고 단순하게 적용해서 많은 문제가 생긴다. 예를 들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라면 인간의 선택, 자율성이나 책임성의 근거가 사라지고, 인간의 노력이나 선택이 무의미 해 질 수 있다. 또한 모든 게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이라면 하나님은 악의 원인이자 유발자, 허용자가 되어 버린다. 모든 것을 정해놓고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결국에는 승리할 하나님 만을 강조할 경우, 신이 인간의 고통에 아파하거나 공감하며, 악에 분노하는 인격적 반응의 이유가 사라지고, 인격성이 상실된 기계적이고 하나님이 되어 버릴 수 있다. 인간과 무한의 거리에 존재하여, 도달 할 수 없고 소통할 수 없는, 비인격적이고 완전한 타자로서의 신이 되어 버리는 것. 물론 칼빈주의는 매우 방대하고 정교한 신학 체계로, 이런 비판들을 설명해 낼 수단들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다.

문제는, 현실의 상당수 목사들이 신의 전지전능성만을 강조하며 완결적인 교리에만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 여기에는 여러가지 문제가 있는데, 목사들 대다수가 남성이라는 점과 교회안에 남성중심적 사고, 승리주의적 사고가 팽배한 점도 큰 요인이 아닐까 한다. 인간이 겪는 현실의 고통과 문제에 대한 공감능력과 소통능력은 없으면서, 신의 전능성 만을 강조하며, 자신들 만의 완결적인 신학체계를 고수하고, 일방적인 신의 뜻을 선포하며 신의 권위를 내세워 군림하는 그런 태도 말이다. 문제는 이런 기독교는, 현실의 고통을 위로하며 모순과 부정의를 극복 하는데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점. 결국 현실과 신앙이 따로 노는 이원론적 신앙이 되거나, 현실의 권력관계를 그저 신의 뜻으로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기독교가 힘과 세력으로 세상을 주도/지배하려는 패권주의적 신앙이 되기 쉽다. 무엇보다 인간의 고통과 한계에 공감하며, 십자가의 약함과 희생을 통해 다가오는 인간적인 하나님 보다는, 천상위에 군림하는 완전한 심판자로서의 파시즘적 하나님 상만을 재생산하고 기독교에 대한 거부감을 확산시킬 수 있다.

스코트 펙은 자신의 저서 ‘아직도 가야할 길’에서, 진정한 사랑은 상대의 인격적 영적 성장을 돕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에베소서 4:13은 이렇게 말한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서,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다다르게 됩니다.”

결국 인간을 사랑하는 신의 궁극적 목표는 ‘인류의 성장과 성숙’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문제는 신이 인간의 선택을 허용하지 않거나 기계적으로 인류에 개입 해서 악을 심판할 경우, 인간의 자율성과 성장이 불가능해 지고, 인류의 성숙이라는 신의 궁극적 목적을 이룰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13장에는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가 있다.
"하늘 나라는 자기 밭에다가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과 같다. 사람들이 잠자는 동안에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뿌리고 갔다. 밀이 줄기가 나서 열매를 맺을 때에, 가라지도 보였다. 그래서 주인의 종들이 와서, 그에게 말하였다. '주인 어른, 어른께서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에서 생겼습니까?' 주인이 종들에게 말하기를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 하였다. 종들이 주인에게 말하기를 '그러면 우리가 가서, 그것들을 뽑아 버릴까요?' 하였다.
그러나 주인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아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가라지와 함께 밀까지 뽑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추수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추수할 때에, 내가 추수꾼에게, 먼저 가라지를 뽑아 단으로 묶어서 불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에 거두어들이라고 하겠다.'"

악의 일시적 승리는 인간의 진심을 확인하고, 의인과 악인을 분리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평소에 구분할 수 없이 섞여 있다가, 악이 힘을 잡으면, 거기에 '영합'하는 이들과 '저항'하는 이들이 분리되며, 자신의 진정한 속내를 드러내 보이기 때문이다. 신이 악을 원천적으로 방지하거나 바로 심판한다면, 이러한 과정도 불가능하다.

영성과 성숙이라는 차원에서도 신의 일시적 침묵과 부재는 중요하다. ‘신앙의 확신’은 신의 개입과 은총, 구원의 경험에서 생기지만, 많은 경우 ‘신앙의 성숙’은 신의 침묵과 이해할 수 없는 고통, 부정의에 대한 고민 속에 발생한다. 오늘의 기독교의 문제는 신앙의 ‘확신’만을 애써 강조할 뿐 ‘성숙’은 부재하다는 것이고, 그런 종교인들이 고통받는 이들을 쉽게 재단하고 정죄하면서, 세상은 더욱 ‘지옥’이 되어 버린다.

2. 후반부의 주제: 인생의 고통과 불행에 대한 해석의 문제


후반부 세 편은 박정자의 시연 이후, 새진리회와 화살촉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고 세상을 지배하는 모습을 그린다. 드라마는 괴물의 정체나 고지와 시연의 의미를 밝히는게 크게 중요하지 않으며, 그것을 어떻게 해석 하느냐가 문제라고 이야기 하는 것 같다. 민혜진 변호사과 함께 소도를 이끌면서 새진리회에 맞서는 공형준 교수(임형국)는 후반부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배영재PD(박정민)와 대화 하면서, 지옥의 시연은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지진 같은 자연 재해에 가까운데, 이런 우연적인 사건에 정진수가 심판이라는 의미를 부여했고, 새진리회가 이를 해석할 독점적인 권력을 갖게 된 것이 문제라 설명한다.

그 소재가 황당하지만, 괴물이 나타나 사람을 두드려 패고 죽이는 사건은, 말하자면 예기치 않은 삶의 고통과 불행에 대한 '은유'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진경훈 형사는 끔찍한 범죄로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고, 민혜진 변호사의 어머니는 암 선고를 받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배영재PD 부부의 아이는 태어나자 마자 고지를 받는다. 이런 예기치 않은 인생의 고통은 괴물에게 두드려 맞는 것과 다르지 않다. 문제는 그 원인과 의미를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는 점. 종교와 인간의 심리에서 찾기 쉬운 논리는 ‘인과응보’, 즉 누군가 죄를 지어서 벌이 임했다고 보는 것이다. 인간에게 죄의식과 두려움은 가장 본능적인 감정인데, 새진리회의 정진수는 바로 그것을 파고들어 종교의 지배로 세상을 정화하려 한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괴물과 시연이 신의 징벌이라 믿으면, 인간은 죄를 멀리하고 선한 삶을 살 거란 논리. 문제는 이것이 인간에게 자율성을 주고, 스스로 선을 선택하게 해, 인류의 성숙을 도모하는 '신의 뜻'과 배치된다는 것이라 생각한다. 종교인들은 매사에 신을 내세우지만, 신의 진정한 뜻에 정 반대에 서 있는 경우가 많다.

신약 성경에 보면 예수가 메시야 사역을 시작하면서 성령의 세례를 받고 광야에 나가 사탄에게 세가지 시험을 받는다. 그 중에 사탄에게 절 하면 이 세상을 넘겨주겠다는 것은, 목적을 위해 수단을 합리화 하라는 것일 수 있고, 돌로 떡을 만들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것은, 인간의 자율적인 선택이 아닌, 초월적인 기적을 통해 인간을 지배하라는 유혹이 아닐까 한다. 구약에는 성전에서 뛰어내릴때 천사를 보내 발이 돌에 부딛히지 않게 한다는 구약의 예언 구절도 있었고, 신의 아들이 기적을 일으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거나 나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예수는 기적의 능력을 사람을 돕기 위해서만 사용했고, 기적으로 인간에게 선택을 강요하고 그들을 지배할 것을 경계했다. 그것은 참된 선택과 사랑이 아니요, 강요된 복종이기 때문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 삽입된 '대심문관' 이야기는 이를 잘 보여준다. 추기경인 대심문관은 예수와 대화하면서, 예수가 사탄의 시험에서 거절한 기적과 신비와 권위, 세가지가 노예근성에 물든 인간을 지배하고 교회 조직의 권위를 작동하게 한다 말한다. 그리고 이를 거부하고 인간에게 자율성을 주려고 했던 예수를 조롱하며 쫓아낸다. 오늘 교회의 모습은 예수와 대심문관의 모습 가운데 어느 쪽에 더 가까울까?

 


시즌 중반에 나오는 반전 하나가 바로, 정진수 본인도 "20년 전에 고지를 받았다"다는 것. 하지만 어린시절 부모에게 버림받고 고아원에서 자란 그는, 착하게 살면 부모가 찾아 오리라는 믿음으로 딱히 지옥에 갈만한 죄를 지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솔직하게 고지와 시연이 불합리하다고 토로하거나, 인과응보와는 상관없다고 사람들을 깨우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반대로 자신의 진실은 묻어 버리고 새진리회의 교리를 만들어 신의 징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사람들을 통제하고 세상을 정화하는 것을 자기 삶의 의미로 삼는다.

정확히 정진수와 반대된 길을 간 사람이 있었다. 그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이다. 그는 하나님이 사탄에게 자랑할 정도로 순결한 의인이었으나, 사탄의 시험으로 자녀들이 죽고, 재산을 잃고, 질병에 걸려 고통하며 죽음을 기다리는 처지가 된다. 그의 친구 셋이 찾아와 그와 대화하는데, 친구들은 처음에는 그의 불행을 위로하는 듯 하더니 이내 ‘인과응보’의 논리로 욥을 괴롭게 한다. 하나님은 전능하고 선하신 존재이고, 인간은 불완전하기에, 욥이 반드시 지은 죄가 있을 것이고, 그로 인해 이런 고통을 당한다는 것을 인정하라 강요하는 것. 그런데 욥은 고통의 와중에도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결백과 억울함을 항변한다.

원죄와 전적 타락, 십자가와 대속을 강조하는 주류 기독교의 교리와 비교할 때, 욥기는 상당히 대척점에 서 있다. 그렇기에 제대로 해석도 어렵고, 교회에서 잘 다루지 않는 면도 있다. 그러나, 드라마 지옥과 연관시켜 볼 때, 욥기에는 죄의식으로 인간을 얽매고 지배하려는 종교적 권력에 맞선, 한 인간의 굽히지 않는 인간성이 묘사된다. 억울하다는 그의 외침에서, 오히려 신의 의도 – 자율적으로 선을 선택하는 성숙한 인간의 가능성 – 는 부각되지 않는가 싶기도 하다.


전적 타락 만을 부르짖는 칼빈주의를 무비판 적으로 적용하며, 인간의 선한 의지나 노력 자체를 무의미하다고 폄하하는 목사들이 꽤 많다. 인간의 선한 의지와 노력이 ‘불완전’하다는 것과, 그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의 차이를 모르는 무식한 주장이다. 자신은 그 만큼 노력해 본 적도 없으면서도, 선하고 정의로운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을 비웃는 '무례함', 그리고 종교와 상관없이 선하고 정의로운 삶을 추구하는 이들 안에 신의 형상이 있고, 그것이 세상을 보다 나은 곳으로 만들어 왔으며, 우리 모두가 그런 노력에 빚지고 있음을 인식하지 못하는 '무식함'. 이런 태도가 기독교에 대한 세상의 반감을 더욱 강화한다.

부모에게 버림받고 고아원에서 자라난 정진수는 어쩌면 불행한 운명의 피해자이다. 하지만 그는 고통받는 자들과 연대하고 불합리한 자신의 운명에 저항하기 보다, 오히려 진실을 감추고 인간을 무자비하게 짓누를 수 있는 '죄책감의 종교'를 만들어 낸다. 새진리회는 가난한 미혼모로 두 아이를 키우다 고지를 받은 박정자(김신록)의 시연을 최초로 중계하게 되는데, 그 전에 정진수가 박정자와 대화하는 장면을 보면, 그녀의 불행에 대한 공감은 전혀 보이지 않고, 박정자를 죄인으로 몰 수 있는 단서를 찾기 위해 집요하게 그녀에게 질문을 던지고 주위를 살핀다. 정진수가 진경훈 형사의 딸 희정이 엄마의 복수를 하도록 도와주는 것도, 결국은 희정을 살인자로 만들어 진경훈이 자신에 대한 진실을 영원히 묻어버리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지메와 사이비종교를 다루는 일본 만화 ‘21세기 소년’의 설정과 유사하게, 정진수는 극단적 환경에서 자라나,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이코 패스에 가까운데, 배우 유아인은 공허하면서도 과장된 정진수의 정신세계를 잘 표현해 냈다. 그는 새진리회의 가르침으로 권력을 얻은 후, 사람들을 지배하는 거짓된 교리를 세워 자신의 허무한 인생을 보상받고자 한다.


욥기의 결말은 해석하기가 어렵다. 욥에게 현현한 하나님은, 욥의 고난의 이유를 말해주기 보다는 자신은 창조자이며 욥은 피조물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동시에 하나님은 욥의 친구들을 꾸짖고 욥을 회복시키고 복을 준다. 이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전능한 신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거기에 토를 달지 말라, 아무리 의롭고 선해도 인간은 피조물일 뿐이다라는 칼빈주의적 해석도 가능하다. 반면 인과응보의 논리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결백을 외치는 욥의 모습에서 신이 의도한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인간을 볼 수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무엇보다 신이 어떤 의도로 고통과 불행을 허락하는지, 인간이 다 헤아릴 수 없으며, 고통과 불행은 죄의 결과라는 도식화를 경계하는 욥기의 메시지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신약에서 예수의 가르침에도 이런 부분이 있다.

누가복음 13:1-5
바로 그 때에 몇몇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해서 그 피를 그들이 바치려던 희생제물에 섞었다는 사실을 예수께 일러드렸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런 변을 당했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 또 실로암에 있는 탑이 무너져서 치여 죽은 열여덟 사람은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죄를 지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

요한복음 9:1-3
예수께서 가시다가,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다. "선생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이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요,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

두 구절 모두, 인간의 고통과 불행을 죄의 결과로 ‘일반화’ 하는 것을 부정하고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고통과 불행의 꽤 많은 부분은 자기 죄의 결과일 수 있지만(예를 들어 누가 자신의 선택에 의해 살인을 저질러 사형을 당한다면, 사형이라는 불행은 자기 죄의 결과이다), 그렇다고 ‘모든’ 고통과 불행이 자기 죄의 결과는 아니다. 인과응보의 논리를 일반화 해서 들이댈 경우, 이것은 무시무시한 칼이 되어 사람들을 찌르게 된다. 박정자의 경우 처럼, 인생에서 닥치는 고통과 불행 자체도 견디기 힘들고, 많은 경우 그런 일들은 사회적 약자에게 벌어진다. 그런데 그들을 죄인으로 몰아 손가락질까지 한다면, 사람을 두 번 죽이는 것이 된다. 불쌍한 박정자 가족에게 새진리회와 화살촉, 대중이 정신적인 린치를 가하는 장면은 보기 힘들 정도로 참혹하다. 박정자를 연기한 배우 김신록은 마치 그 사람이 된 것 처럼 리얼했다.
어떤 고통과 결핍을 겪고 있는 사람들 일 수록 교회를 나가기 어렵다는 말을 한다. 그런 사람들을 대하는 교인들의 태도가 매우 미성숙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오늘의 신앙인들의 태도도 예수 당시에 시각장애자를 보고 누구의 죄 냐고 묻는 이들과 그리 다르지 않다.


모순의 정점은 갓 태어난 배영재PD의 아기가 고지를 받는 부분이다. 자신의 죄 때문에 고지와 시연을 받는다고 주장한 새진리회의 교리가 무너질 위기에 처한다. 엄밀히 말하면 박정자의 죄도 명확히 밝혀진 바가 없었다. 그런데, 김정칠과 새진리회는 자신들의 교리를 돌아보기 보다, 아이를 없애려고 한다. 결국 자신들도 교리를 믿는게 아니고, 종교 장사를 하고 있었음이 드러나는 것. 이제 헤롯왕이 메시야의 출현을 막기 위해 아기를 죽이려 들 듯, 새진리회는 배PD의 아이를 쫒기 시작한다. 민혜진 변호사는 아이를 지키려 하지만, 동시에 아이가 고지와 시연을 받은게 알려지면 새진리회와 화살촉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생각에, 아이의 시연을 중계하고 싶어한다. 배PD가 분노하며, 당신들이 새진리회와 뭐가 다르냐 지적하듯, 좋은 의도를 가진 집단도 인간을 도구화 할 가능성을 보여준다.

흥미로운 점 한가지는, 새진리회는 ‘원죄’라는 개념이 없기에 아이의 고지가 문제가 된 것인데, 비교하자면, 기독교의 원죄 개념은, 스스로 지은 죄(자범죄, 혹은 고범죄)가 없는 아이 마저도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무시무시한 교리가 될 수도 있다. 과연 원죄의 교리가 성경에 근거가 있는가, 그리고 원죄를 오늘 대부분의 목사들이 말하듯, 아담의 죄가 유전되어, 자신의 행위와 상관없이 모든 이들은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고 해석하는 것이 정당한가는 사실 고민해 볼 문제다. 신앙을 배제하고 완전히 비즈니스적인 논리로 해석한다면, ‘원죄’는 세상에 존재하는 단 한명의 고객도, 교회라는 상품을 사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장치는 아닌가 비판해 볼 수도 있다. 또한 신학자들 안에서도 원죄에 대한 해석이 다양한 방식들이 있다는 것도 공부해 볼 필요가 있다.

연상호 감독은, 애니메이션 영화 ‘사이비’ 같은 전 작에서 부터 시작해, 왜곡된 종교가 보이는 문제들에 천착하는 경향을 보인다. 정진수에 이어 2대 의장이 되어 새진리회를 키우는 김정칠 의장(이동희)이 주도하는 종교적 지배는, 그 자체로 지옥도에 가깝다. 김정칠은, 다소 지나치게 전형적일 정도로, 타락한 종교 지도자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앞에서도 언급 했듯, 감독이 집중하는 문제는, 고지와 시연의 진실을 밝혀내는게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초자연적 현상이라 간주 한 후, 그에 대한 해석을 독점하고, 신의 심판이라는 교리와 죄책감으로 인간을 정죄하고 지배하는 종교적 폭력과 광기를 비판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런 점에서 드라마의 주제는 이신론이나 불가지론과 연결 지을 수도 있다.


3. 이신론과 불가지론, 그리고 종교의 의미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택시 기사의 말은 노골적으로 드라마의 관점을 대변하고 있다.

"전 신이 어떤 놈인지도 잘 모르고, 관심도 없어요. 제가 확실히 아는 건 여긴 인간들의 세상이라는 겁니다. 인간들의 세상은 인간들이 알아서 해야죠. 안 그렇습니까, 변호사님?"

이신론이나 불가지론은 주류 기독교의 범위에서는 벗어나 있다. '이신론'은 세상을 창조한 신적 존재는 인정하지만, 그 신은 세상과 세상이 돌아가는 법칙을 만들어 놓고, 이후엔 인류가 알아서 역사를 이뤄가게 하며, 기적이나 심판 등으로 직접 개입하지 않는 신이다. 시계공이 시계를 만들면, 시계가 알아서 돌아가듯이 말이다. 과거 계몽주의 시기 기독교적 사고에서 벗어나는 한 단계로 이신론이 부상하기도 했었다. ‘기독교 국가 미국’을 믿는 보수 기독교인들의 생각과 달리, 조지 워싱턴을 비롯해서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들 대부분은, 창조자는 인정하지만 우리의 삶에 개입하는 인격적인 하나님을 믿지는 않았던 이신론자들이기도 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신의 영역은 우리가 알 수 없고, 증명 될 수 없으며, 신이라는 존재가 우리에게 크게 중요하지도 않다 생각하는 '불가지론'이 된다. 불가지론은 실질적으로 무신론에 가까워 진다.

기독교인들은 이신론이나 불가지론에 거부감을 가지겠지만, 사실 기독교인에게도 이런 사고는 꽤 의미가 있다. 앞에서 말한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섭리'로 생각하는 극단적 칼빈주의와 반대 편에서, 이신론과 불가지론을 적용하면, 이제 세상은 하나님의 책임이 아닌 '인간의 책임'이 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소위 가장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이 왜 인격적, 신앙적으로 지극히 미성숙한 유아적 행태를 보이며, 성장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을까 오랫동안 질문해 왔다. 왜곡된 칼빈주의적 사고가 개인주의적 신앙과 결합할 때, 나타나는 결과가 아닐까 한다. 나는 지극히 특별하며, 내 주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으로 해석 되어야 하고, 알 수 없는 고통과 불행이 닥칠 때, 하나님 대체 나에게 왜...하며 극도의 자기연민에 빠져들거나, 더 큰 축복을 주시려고 이런 고통을 주시나 등등, 일종의 과대망상적인 사고를 보이는 등,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책임지지 못하고, 매사에 신이 특별한 섭리를 끌어들이면, 성숙하고 책임있는 인간으로 자라나기가 어렵지 않은가 싶은 것.

개인적으로 많은 시간을 기독교인들 안에서 보내왔는데, 신앙이 없지만 자신의 성숙과 사회의 정의를 고민하는 이들을 만나보면서, 오히려 신이나 특별한 섭리가 없이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정신적으로 더 건강 할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해 보았다. 어떤 불행과 고통을 겪을 때, 많은 기독교 인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자신의 죄에 대한 심판인가 죄책감에 빠지거나, 그 의미가 직접 해석되지 않는 것에 불안해 하고 혼란스러워 한다. 그런데 신앙이 없이 정신적으로 건강한 이들은, 고통과 불행은 누구에게나 찾아 올 수 있는 거라 받아 들이고, 자기 주어진 한계 속에서 그걸 이겨 나가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결국 인생을 살아갈 수록 설명되지 않는 것이 많은데, 내 주변에 일어나는 일 하나하나에 신의 뜻을 부여하며 의미를 알려고 하는 사고는, 매우 유치하고 자기 중심적이며, 책임있는 인생의 주체가 되어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는 것을 가로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병들고 약하고 가난하고, 외롭고 절망하는 이에게, 신이 당신에게 관심을 갖고 있으며 당신은 신 앞에서 특별한 존재라는 메시지는, 사람을 살리고 구원한다. 그러나 지금의 기독교에서는 이런 메시지가 '교회 조직의 비즈니스 마인드'와 '개인의 욕망'이 상호 작용하는 불건강한 방식으로 작용하는것이 아닌가 우려한다. '교회에 헌신하면 복을 받는다'는 잘못된 메시지를 사고 팔다가, 원망하고 후회하는 일들이 많다. 이미 많은 것을 가진 이들이, 타인의 아픔과 고통에는 무관심한 채, 자신이 특별한 삶을 사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하는, 유아적이고 이기적인 심리를 부추기는 종교가 된 것은 아닌가 싶은 것.

결국 과도하게 불건강한 방식의 종교성을 가진 사람은, 오히려 신과의 건강한 ‘거리두기’가 필요하다는 생각도 든다. 신앙을 버리는 차원의 이신론이나 불가지론이 아닌, 하나님은 인격적이며 인류 역사와 우리 삶에 개입하시지만, 동시에 또 많은 부분을 인간에게 맡겨두고 지켜보시기에 인생의 책임있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제한적 이신론', 그리고 인간의 한계 속에 우리에게 벌어지는 많은 부분은 당장 설명이 불가능 할 수 있고, 이해되지 않는 삶이라도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그 의미를 찾아가자는 '제한적 불가지론'이, 신앙인에게 필요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

본 회퍼는 ‘성인이 된 세상’이라는 개념을 소개했는데, 탈 종교화 되고 세속화 되며, 과학과 학문이 발전된 세상은 종교의 도움이 없이도 많은 부분을 설명하고 스스로를 꾸려나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과거 세상이 스스로 설명하거나 대응하지 못하는 한계를 지적하며 종교의 정당성을 주장하던 것을 ‘틈새의 신’ 전략이라고 하는데, 이제 ‘성인이 된’ 세상에서는 점점 더 그 전략이 통하지 않는 다는 것. 인간이 설명할 수 없는 신비, 공포, 죄책감으로 인간을 찍어 누르려는 새진리회의 전략도 이와 유사하다. 본 회퍼는, 오히려 그런 전략을 버리고, 타자를 위해 고난 당하는 존재로서의 하나님이라는 신의 본질을 가지고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인이 된 세상에서 과거의 접근 방식이 통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진짜 신의 본질을 드러낼 기회라는 것이다. 신의 심판에 대한 공포로 인간의 지배하고, 인간의 자율성과 선택을 제한하는 종교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타자를 위해 고난 당한 존재로서의 신을 강조하며, 그에 대한 믿음이 우리가 타자를 위한 선과 정의를 선택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신앙을 강조하는 것이, 현대 사회에서 종교의 본질로 승부하는 전략이 된다는 것이다.

4. 반종교 주의? 종교 없는 세상?

몇가지 작품에서 왜곡된 종교가 끼치는 문제를 지적한다는 점에서, 감독의 메시지는 다소 ‘반종교적’이라 해석 할 여지도 있다. 다만 연상호 감독이 인터뷰에서 자신도 교회를 다닌다고 답했다는데, 감독이 정확히 어떤 신앙관을 갖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감독은 죄책감으로 인간을 찍어 누르는 종교의 문제에 대해 특히 비판적으로 보인다. 굳이 반대의 측면을 살펴보면, 죄책감과 죄의식은 다르며, 종교와 죄의식이 없는 사회 역시, 다른 종류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본다. 유명한 영화 ‘굿윌헌팅’에서 어린 시절 학대의 트라우마에게 시달리는 주인공에게 “그것은 너의 잘못이 아니다(It’s not your fault)”라는 말이 필요하다면, 반대로 무자비한 학대를 가한 가해자에게 필요한 말은 “그것은 너의 잘못이다”라는 말이다. 문제는 복잡한 세상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을 때도 있고, 한 사람이 가해자이자 피해자일 수도 있고, 많은 경우 가해자도 스스로를 피해자로 합리화 하기도 한다는 점. 여기서 중요한 구분 점 하나는, 권력의 문제가 아닐까 한다. 오늘의 종교가 권력의 문제에 대한 인식이 없기 때문에, 약하고 가난한 피해자들에게는 '너도 죄인이다'라며 찍어 누르고, 오히려 돈과 권력을 가진 가해자에게는 용서를 말하는 것은 아닐까? 고통을 겪는 약자에게 죄와 심판을 운운하는 것은 폭력이지만, 권력을 갖고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심판과 정죄가 필요하다.

보수와 반대되는 리버럴, 혹은 심리학적 접근에서 많이 나타나는 사고가 '죄책감'에 대한 반감을 넘어, ‘죄의식’의 부재에 까지 이르는 문제도 있다고 본다. 모든 이들을 피해자로만 인식하고, 존재하는 것은 곧 옳고 용납할 수 있는 것이라 접근하는 것도, 세상에 존재하는 악과 인간의 죄에 접근하는 방식으로는 상당히 나이브할 수 있다.
각각 관점이 약간씩 다르지만, 크리스토퍼 히친스나 리차드 도킨스, 코미디언인 ‘빌 마허’ 같은 이들은 종교 자체가가 세상 문제의 근원이라고 지적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면 종교가 없다면 세상이 더 좋아질까? 쉽게 답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스탈린주의나 문화대혁명 처럼, 종교를 반대하는 무신론적 사상이 엄청난 폭력과 학살을 자행하고, 그 피해자 상당수가 종교인이었던 경우도 존재한다. 인종차별 반대, 남녀평등, 민주화 운동 등 인류의 발전과 성숙에 중요한 변화에 종교적 가치와 종교인들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던 경우도 많다. 우리 사회의 윤리와 가치의 많은 부분은 종교라는 틀 속에서 존재한다는 점도 중요한 현실이다. 이 부분은 방대하고 좀 다른 주제라 여기까지.

5. 미디어와 선동, 집단화된 광기

 


정진수의 가르침과 박정자의 시연은 새진리회가 지배하고 화살촉이 날뛰는 세상을 만들었다. 화살촉은 무소불위의 자경단처럼 폭력과 테러를 가한다. 감독은 극단적인 주장이 미디어로 확산되고, 맹목적인 집단이 이를 추종할 때 벌어지는 공포를 그려낸다. 오랫동안 정진수와 새진리회의 위험성을 경고해 온 소도 법률사무소의 민혜진 변호사(김현주) 마저 화살촉에게 테러를 당하고 목숨을 잃을 위기를 당한다. 미친 놈들이 정상인 사람들을 핍박하는 무서운 세상이 되는 것. 배우 김현주는, 올곧은 생각으로 불의에 맞서는 인물의 이미지를 잘 표현해 냈다. 민혜진은 겨우 목숨을 건진 후, 딸을 시연으로 잃은 공형준 교수 등과 함께 '소도'라는 이름의 비밀조직을 만들어 고지를 받은 사람을 돕는다. 괴물에 의한 그들의 죽음을 막을 수는 없지만, 실종처리로 그들의 시연이 새진리회나 화살촉에게 공개되는 것을 막아서, 적어도 유가족들이 죄인의 가족들로 낙인 찍혀 고통받고 린치 당하는 것을 막아주는 것. 국사시간에 배웠듯이 ‘소도’는 삼한시대에 제사를 드리던 성역으로 공권력의 힘이 미치지 못해, 억울한 죄인이 목숨을 건지기 위해 숨어드는 곳이었다. 흥미롭게도 성경에도 비슷한 개념이 나오는데 이를 ‘도피성 (Cities of Refuge)’이라 한다. 실수로 사람을 죽인 경우, 복수하려는 이로 부터 도망쳐 숨을 수 있는 곳인데, 어렸을 때 두 개념이 유사한 것이 신기했고, 고대 문화의 유사성이 아닐까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과거 명동성당은 양심적인 종교이자 '현대 사회의 소도'로서 독재권력의 탄압으로 부터 민주화 운동가들을 보호했다면, 드라마의 소도는, 극단화된 종교 집단의 광기로 부터 피해자들을 돕고 있다고 하겠다.


화살촉의 데마고그인 이동욱(김도윤)은 기괴한 분장과 선동으로 주목을 받는데, 새진리회의 주장을 더 극단화해 폭력을 부추긴다. 그런데 왕따를 주도하던 이가 어느 순가 왕따의 피해자가 되듯, 박정자나 고지 받은 사람들을 저주하던 그도 난데없이 고지를 받고 화살촉의 공격이 두려워 폐인처럼 숨어 살게 된다. 시즌 막바지에 민혜진 변호사가 배영재PD 부부와 아이를 데리고 피신하는 곳이 아이러니 하게도 이동욱의 집이다. 그런데 새진리회의 김정칠은 아이의 위치를 알아내기 위해, 이동욱이 아이의 시연 바로 직후 시연을 받을거라 고지 받은 것은, 죄 없이 고지받은 아이라는 신의 실수(?)를 감춰, 새진리회의 교리를 지키라는 신의 특별한 부름이라 유혹하는데, 그 순간 이동욱은 설득되어 소도와 배영재 부부를 배신하고 위치를 알린다. 자신이 고지를 받고 교리의 허상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논리로 자신의 허무한 인생을 메꿔보려하는 이동욱의 모습은 정진수와 유사하다. 가짜뉴스와 음모론, 미디어 선동은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믿는 이들의 무지와 상호작용한다. 이동욱을 연기한 김도윤은 기괴한 연기력을 선보였는데, 과거 영화 ‘곡성’에서 사제역을 맡아 충격적인 마지막 장면을 연기하기도 했고, ‘럭키몬스터’라는 독립영화에서도 뛰어난 연기력을 보여준 적이 있다.

6. 결말과 시즌 2 예고

 


시즌2를 예고하는 막판의 두가지 큰 반전은, 고지를 받은 배영재PD의 아이를 배영재 부부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끌어 안았는데, 지옥의 사자는 두 부부를 불태워 죽였지만 그 안의 아기가 살아남은 것이다. 스스로 지은 죄가 없는 아이가 고지를 받았다는 것, 그리고 그 아이가 부모의 희생으로 살아남았다는 것은 새진리회의 교리를 무너뜨릴 요소가 될 수 있다. 동시에 새진리회가 힘을 갖게 된 계기인 첫번째 공개 시연의 주인공이자, 타다 남은 사체로 보관되어 있던 박정자가 부활(?)하는 마지막 장면은, 새로운 차원으로 시즌 2가 전개될 수 있다는 예고를 한다. 지옥의 시연 만큼이나 이해 불가능한 이런 현상은, 새진리회를 무너뜨릴 수도, 아니면 이를 대체할 또 다른 교리와 종교를 만들어 낼 수 있을 듯.

드라마가 평소 관심있던 주제들을 건드리는 바람에, 생각을 정리해 보려 하다가, 무한정 긴 글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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