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엽

<색, 계(2007) - 적나라한 섹스, 그러나 한 방울의 진심>


 

2008. 2. 이인엽 





1. 줄거리


1938년 홍콩. 전쟁의 와중에 어머니가 죽은 후, 아버지는 동생만을 데리고 영국으로 떠나버리고, 왕치아즈(탕웨이)는 학생들과 함께 피난길에 오른다. 피난생활 중 아버지의 재혼 소식에 좌절하는 그녀는, 우연히 가입하게 된 연극반에서 반일 애국 연극을 계획하는 광위민(왕리홍)에게 관심을 갖게 된다. 홀로 남겨진 인생의 슬픔이 그녀의 연극에서 리얼하게 표현되고 연극은 대 성공을 거두는데, 광위민은 보다 적극적으로 친일파 핵심 인물인 정보부 대장 이선생(양조위)를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그녀는 이에 참여하게 된다. 그녀는 계획을 성공시키기 위해서 자신의 순결마저 포기하지만, 갑자기 이선생이 상하이로 발령이 나는 바람에 암살 계획은 실패하게 되고, 그녀는 좌절감에 홍콩을 떠난다.


1941년 상하이. 무기력하게 살아가던 그녀에게 광위민이 다시 찾아오는데, 그는 보다 전문적인 항일단체와 연결되어 보다 치밀하게 이선생을 암살할 계획을 세우고 그녀의 참여를 권한다. 결국 그녀는 임무를 띄고 이선생 부부에게 접근하는데, 좀처럼 틈을 보이지 않던 이선생이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고 그녀는 점점 더 임무에 동화되기 시작한다.


 



2. 이선생: 섹스와 소통


이선생(양조위)은 친일파 정보부 대장으로 그 누구도 믿지 못한다. 그의 부인(조안 첸)은 오로지 마작에만 빠져있고, 그는 친일파라는 죄책감과, 기울어 가는 전쟁의 형세로 인해 깊은 불안과 공포심에 시달린다. 왕치아즈를 보고 매력을 느끼지만, 신중하게 지켜보는데, 기회가 오자 그는 마치 겁탈을 하듯 그녀를 범하고, 얼굴도 보지 않은 채 냉정하게 그녀를 두고 떠나 버린다. 이 장면은 내면화된 그의 공포심과 폭력성을 반영한다. 그러나 점점 더 관계가 진행되면서 그는 그녀와의 섹스를 통해 자신이 살아있음을 경험하는 듯 하고, 초반의 일방적인 행위를 넘어, 점점 더 완전한 소통과 합일을 갈망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동시에 왕치아즈는 점점 더 자신의 역할에 몰입해 가게 된다.


그런 섹스 신과 더불어, 그에게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은 기루에서의 만남이었다. 일본군들을 접대하던 그는 홀로 남아 왕치아즈를 부르는데, 공포심과 고독에 무너져 있는 그를 위해, 그녀는 노래를 부르며 위로 해 준다. 그는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그녀의 손을 애틋하게 잡고 나서, 조용히 박수를 쳐 주는데, 순간적으로 그 동안의 건조하고 경계하는 듯한 눈빛이 아닌, 애정이 담긴 따듯한 눈빛이 나타난다. 영화에서 배우 양조위는 냉정한 정보부 대장 역할을 하기 위해 늙어 보이는 분장까지 했다는데, 그래선지 평소의 모습과 전혀 다른 싸늘한 공무원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다른 영화에서 드러났던 배우 양조위의 매력적인 모습이 살아났다. 영화의 내용에서 보자면, 그녀와의 관계 속에서 이선생은 자신의 살아있음과 마음의 위로를 경험한 것이다. 조국을 배반자의 마음에도 소통에 대한 갈망은 있는 법. 아니 오히려 더 간절했을 것이다. 극도의 경계심을 가지고 살아가던 인물이, 자신을 위로해준 그녀의 노래를 통해 그 안에 남아있던 인간으로서, 한 남자로서의 진심을 내비친 순간이다. 그의 마음에 있던 경계심이 완전히 무너진 것이다. 처음에는 착취하듯 욕망과 폭력성을 그녀에게 쏟아냈으나, 어느새 그는 그녀에게 압도당한 것이다.



 


3. 왕치아즈: 한 방울의 진심  


왕치아즈(탕웨이)가 처음 계획에 뛰어든 것은 아버지로부터 버림받고 혼자가 된 상황에서, 연극을 통해 만남 광유민에게 호감을 느꼈고, 자신이 무엇인가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녀는 이를 위해 순결까지도 포기하고 계획에 뛰어드나 실패하고 만다. 그후 다시 만난 광유민에게 설득되어 스파이 역할을 하게 되는데, 광유민은 그녀를 지켜주겠다고 하지만 무력하기만 하고, 그녀는 오히려 이선생과의 관계에 몰입하게 된다.


절망과 고독에 시달리는 이선생의 내면을 읽어가면서 오히려 그녀는 그에게 연민의 마음을 느끼게 되는데, 기루에서의 만남 이후, 이선생은 완전히 그녀에게 마음을 주게 된다. 그리고 이선생을 암살할 절호의 기회에, 그녀는 극도의 갈등 끝에 암살계획을 그에게 알려주어 그를 살리고 만다.


이 영화는 친일파, 그리고 친일파에게 공작을 하다 그와 사랑에 빠지는 여인을 주인공으로 한 지라, 중국에서는 반발이 많았고, 그래서 중국에서는 탕웨이 출연금지에 연예계 퇴출 움직임까지 있었다고 한다. 애국주의적인 중국의 여론을 잘 보여주는 현상이지만, 영화의 메시지를 한참 잘못 읽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친일파의 암살이나 조국해방 등의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한 인간의 실존이라고 할 수 있다. 거창한 대의 보다도 그녀에게 중요했던 것은, 비록 이룰 수 없는 것일 지언 정, 오늘 이 순간 마음에 다가오는 한 방울의 뜨거운 진심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것을 기대하고 광유민의 계획에 동조해 모든 것을 던졌으나, 오히려 그 진심을 이선생에게서 발견한 것이다. 자기를 향해 이선생이 진심을 보인 순간, 그녀는 결코 그를 죽게 둘 수는 없었다. 그것이 모든 계획을 수포로 돌리고, 자신과 동료들에게 파멸을 가져올 지라도. 영화의 상황에서만 보면, 그녀의 선택을 이해할 수 있을것 같다. 홀로 남겨져 의미를 찾을 수 없었던 세상 속에, 지금 온기를 내뿜는 한 방울의 사랑만이 그녀에게 의미가 있었을 수 있다.


이 영화는 폴 베호벤 감독의 영화 ‘블랙북’과 공통점이 많다. 둘다 전쟁중에 스파이로 일하게 된 여성의 이야기라는 것. 그리고 상대편인 작전의 대상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것. 블랙북의 여주인공도 나중에 자신이 사랑하게 된 독일군 장교가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가족이 몰살했을 때도 보이지 않았던 처절한 통곡과 눈물을 보인다. 이제 자신은 세상에 혼자라고 부르짖으며.



 


4. 여성의 에너지


이 영화를 보고 혹자는 남자의 사랑에 이용당해 그녀가 파괴되었다거나, 정의라는 이름으로 여성의 성이 소비되었다고 쓰기도 했는데, 물론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관점에서는 맞는 말이지만, 이 영화에 맥락에서는 전혀 맞지 않는 해석이라 본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오히려 그녀는 주체적으로 자신의 운명을 선택했다. 결과는 비극이었지만, 그녀는 한 순간 한 순간에 최선을 다했고 후회 없는 선택을 했던 것. 연극단에서 그녀를 빼고는 모두가 아마추어였듯이, 그녀는 삶에 대한 에너지가 충만했다. 그것이 비극으로 끝났지만, 이선생과의 관계에서 발현 된 것일 뿐이다.


어떤 면에서 여성의 에너지는 폭발적이다. 사랑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순결을 지킬 수 있는 것이 여자요, 또한 사랑이나 어떠한 가치를 위해 순결을 포기할 수 있는 것도 여성이다. 미안하지만 남성에게는 이러한 초월적 능력이 없는 것 같다. 그렇기에 남성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여성이다.


그러나 여성의 이러한 폭발적인 에너지는, 그녀의 존재를 의미 있게 해주는, 자신의 에너지에 공명하는 남성이 있을 때 지속된다. 그녀에게 존재 가치를 부여한 것은, 대의를 따르며 멀리서 지켜보는 광유민이 아닌, 매국노이지만 자신의 감정을 열어 보인 이선생이었다.  


특히 그녀는 어떠한 역할에 자신을 완전히 투사하면서 에너지를 폭발시키는데, 초반 애국 연극에서, 아버지에게 버림 받은 감정을 연기로 표현하는 장면에서 나타났고, 이선생과의 관계에 자신을 동일시 하는 과정에서 그녀의 에너지는 이선생을 변화시켜 버린다.


그녀와 대비되는 인물이 이선생의 부인(조안 첸)이다.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 매력을 내뿜었던 배우 조안 첸은 놀라울 정도로 나이를 먹고 달라졌는데, 영화의 이선생 부인도 오로지 마작에만 빠져 있다. 도박은 삶의 의미와 에너지가 소진된 사람에게 잠시나마 목적과 의욕을 끌어올려주는 마약일 뿐이기에, 그녀의 삶에 의미와 에너지가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여성과 남성은 서로를 구원할 수도, 또한 좌절 시킬 수도 있다. 그녀와 이선생 사이에는 이해나 소통의 관계가 없고, 이선생은 고독과 공포심에 짓눌려, 그녀는 도박에 몰두한 채 살아갔다.


이 선생은 잠시 왕치아즈에게서 자신의 의미를 발견할 위로를 찾았지만, 곧 자신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 그녀를 외면할 수밖에 없다. 잠시 내비쳤던 그의 진심은, 허망한 얼굴로 그녀의 빈방에서 침대를 잠시 어루만지는 것으로 끝나게 되며, 그는 다시 어둠 속에 갇힐 수 밖에 없다. 


 

 


5. 의미와 사랑, 에너지의 공명


영화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이루어 질 수 없었던, 한 방울의 애정을 긴박하고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영화를 유명하게 한 소문처럼 섹스 신이 많았지만, 별로 야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영화의 섹스 신이, 인격과 괴리된 쾌락이 아니라 오히려 인물의 내면을 극도로 반영하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다. 양조위의 연기력이나 탕웨이의 매력이 정말 잘 드러났으며 이안 감독의 연출력도 세밀하다.


영화에서 그려지는 그와 그녀의 모습처럼, 인간은 오늘도 '의미'와 '사랑'을 갈망한다. 결국 왕치아즈라는 한 여성은, 그녀의 에너지를 공명시켜줄 진실한 사랑을 발견하지 못한 채 스러져간다. 이선생은 그녀에게서 짧은 빛을 보았지만, 비극적인 상황은 구원을 허락하지 않았다. 


메마름 속에서 보일 듯 말듯 하고 사라진 신기루 같은 애정이 이토록 사람의 마음을 잡아 끄는데, 상대방에 대한 신뢰와 헌신 속에 만들어 가는 두 사람의 진실한 사랑이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사람들은 무언가 색다른, 쥐어짠 한방울에 주목하지만, 오늘 나에게 주어진 평범한 사랑의 가치는 놓치기도 한다.


응답 받지 못한 사랑과 의미를 찾지 못한 인생이여, 슬픔을 고하노라!

서로의 에너지와 사랑에 공명하는 아름다운 두 사람의 모습, 그리고 거기서 나타나는 충만한 생명력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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