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엽

김일성의 아이들 (2020) / 굿바이 마이 러브NK: 붉은 청춘 (2017)
: 1956년 8월 종파사건, 그리고 북한 사회의 주변인들 이야기

2021년 5월 이인엽

시간 날 때 봐야겠다고 생각해 둔 북한 관련 다큐멘터리 두 편을 이어서 보게 되었다. ‘김일성의 아이들(2020)’은 6.25 전쟁 시기 동유럽 국가들에 위탁교육으로 맡겨졌던 북한의 고아들과 동유럽의 선생님, 친구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고, ‘굿바이 마이 러브NK(2017)’는 비슷한 시기 영화를 공부하러 소련에 유학 나왔다가 북한의 종파투쟁 시기 김일성 독재체제 수립을 비판하고 망명을 선택한 이들의 이야기이다. 주제는 다르지만 공교롭게도 두 작품 모두 1956년 8월 종파사건을 기점으로 한 북한 정치 사회의 변화를 간접적으로 묘사하고 있어 관심있게 보았다. 북한사회의 주류가 아닌, 배제된 주변인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의 삶과 이야기를 보면서, 북한의 정치와 역사의 다른 측면을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된 것 같다.

1. 한국 전쟁과 고아들

한국전쟁으로 남북한에서 각각 대략 5만여 명, 한반도 전체에서 약 10만 명의 고아가 발생했다고 추정된다. 남북의 체제와 정책에 따라 대처 방식이 달랐는데, 남한에서는 상당수가 고아원에 맡겨지거나 해외 입양을 통해 외국의 양부모에게 넘겨졌다. 좋은 환경과 양부모 밑에서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입양인도 있겠지만, 양부모에게 학대나 버림을 받거나, 타 인종사이에서 적응하지 못하거나 비참한 인생을 사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한인 입양인들을 많이 받아들였던 스웨덴의 경우, 입양인의 자살률은 일반인의 3.7배, 약물 중독은 3.2배, 알코올 중독은 2.1배, 전과비율은 1.5배 높았다고 하며, 1999년 이후 스웨덴에 입양된 한국인 중 사망자의 59.1%는 자살이었다는 충격적인 통계를 본 적이 있다 (스웨덴 일간지 디겐즈 나에터 조사).

이러한 남한이 선택한 해외 입양 위주의 민간 주도 해결법과 달리, 북한에서는 국가주도적 사회주의적 방식을 택했는데, 소위 혁명 유가족 자녀가 고아가 된 경우, 만경대혁명학원 같은 국립시설을 통해 북한 체제의 엘리트로 양성하기도 했고, 이들 중에서 북한의 당, 군, 정의 요직을 차지한 인사들이 많이 나오기도 했다. 또한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방식은 한국전쟁 시기부터 수천에서 수만명 가량의 전쟁고아들을 동유럽 국가에 보내서 위탁교육을 했다는 사실이다. 이해성의 논문에 따르면, 동구권에 보내진 고아들은 "1951년부터 1959년까지 폴란드에 6천여 명, 루마니아에 3천여 명, 헝가리에 950여 명, 동독에 600여 명, 체코슬로바키아에 400여 명, 불가리아에 500여 명" 정도 였다고 한다.

2. 폴란드로 간 아이들

 


이 내용이 대중에게 먼저 알려진 것은 배우이자 감독인 추상미 감독의 다큐 ‘폴란드로 간 아이들 (2018)’을 통해서였는데, 이 작품은 아직 직접 보지 못해서 보도된 내용을 참고로 언급한다. 위에 언급한 동유럽 국가들 중에서도 이미 전쟁의 아픔을 많이 겪었던 폴란드가 북한 고아들을 가장 많이 수용해 주었는데, 추상미 감독은 탈북 소녀인 송이와 함께 폴란드에 가서 북한 고아 양육시설을 답사하고, 근무했던 폴란드 인들을 만나 증언을 들었다고 한다. 상황은 약간 다르지만 탈북 소녀의 시선으로 전쟁 고아들의 심경을 바라보는 의도도 있었다고 한다. 다큐는 북한 고아들을 인간적이고 따듯하게 돌보아 주고, 아이들을 아직도 기억하고 눈물 흘리는 폴란드 교사들의 인간애를 잘 묘사해 주었다고 한다. 고아들은 폴란드 교사에 의해 교육을 받았지만, 북한에서 파견된 교사들을 통해 한글, 역사, 전통무용, 민요, 군사훈련, 사상교육 등을 받았다고 한다. 북한 정부는 고아들을 맡긴 지 7년 후인 1958년 경부터 고아들을 송환하기 시작한다.

전체적으로 이 다큐는 폴란드에서의 북한 고아들의 경험과 그들을 기억하는 이들의 따듯하고 감성적인 부분들을 강조했는데, 고아들의 송환에 대해서는, 천리마 운동 등 북한 내부에서 노동력 수요가 늘어났기 때문이라고 언급했다고 한다.
일단 이념을 떠나서, 소개된 이야기가 인간적이고 감동을 주는 면이 있고, 당시 사회주의 국가들 간의 교류 협력도 어느 정도 긍정적인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참혹하고 파괴적이었던 6.25전쟁 이후, 북한의 재건이 빠르게 이루어 진 데에도, 동구권에서 온 물자와 기술자들의 도움이 컸다는 것도 잘 알려져 있다.

3. 김일성의 아이들

 


한편, ‘김일성의 아이들’은 이와 유사하면서도 조금 다른 접근을 취한다. ‘폴란드로 간 아이들’과 유사하게 북한 고아들을 사랑으로 맞아준 선생님들과 우정을 쌓은 친구들의 이야기를 조명하는 동시에, 북한과 사회주의국가들간의 관계, 북한 내부의 정치적 변화 등, 고아들이 북한으로 송환되게 된 정치적 배경을 설명하고, 그로 인해 겪은 비극적 사연들도 소개한다.

1956년을 기점으로 사회주의 국가들 안에 많은 변화들이 일어난다. 1953년 스탈린 사망 후 권력을 잡은 흐루시쵸프는 1956년 2월 제20차 소련공산당 전당대회에서 개인 숭배등 스탈린의 과오를 날카롭게 비판하며 ‘스탈린 격하운동’을 시작하며, 서방과의 관계 개선도 도모한다. 본인 사후에도 격하운동이 일어날 수 있다는 위기에, 중국의 모택동은 이에 반발해 수정주의라 비판하며, 김일성도 이를 자신의 권력 강화에 불리하다고 인식한다. 심장병을 앓던 폴란드의 지도자인 볼레스와프 비에루트는 2월 공산당 전당대회에 방문했다가 흐루시쵸프의 연설에 충격을 받고는 귀국도 하지 못하고 모스크바에서 사망하는데, 이에 폴란드에서 자유화 바람이 불고, 6월 부터 시위가 발생한다. 이는 헝가리에도 전해져 같은 해 10월에 격렬한 봉기가 일어나고, 공산당 지도부가 소련으로 도피한다. 이에 개혁주의자인 임레 너지가 부상했고, 일당제 폐지, 소련군 철수, 바르샤바 조약기구 탈퇴 등을 발표했으나, 위기를 느낀 소련의 대규모 군사 개입으로 헝가리 혁명은 좌절된다.

같은 해 8월 북한에서는 유명한 8월 종파사건이 벌어진다. 당시 김일성은 두 달간 동유럽 순방을 하게 되는데 그 사이 북한의 소련파와 연안파는 손을 잡고 김일성 실각을 시도한다. 잘 아는 바 대로 김일성은 유일독재체제를 수립했고, 그것이 오늘까지 아들과 손자로 이어지고 있으나, 북한 정권 초기에는 소련의 지원을 받은 김일성을 지도자로 했으나 다양한 공산주의 파벌이 공존하고 있었다. 김일성의 만주빨치산 파 외에도, 가장 최후에 숙청된 갑산파, 박헌영의 남로당파, 중국 공산당 및 인민해방군과 항일투쟁, 국공내전에 참여한 연안파, 그리고 소련 내의 고려인 공산주의자들이었던 소련파 등이 있었다. 이미 김일성은 6.25 전쟁 중에서 부터 전쟁 책임을 뒤집어 씌워 연안파의 무정과, 남로당의 박헌형을 숙청한 바 있었다. 이후 김일성의 개인 우상화와 중공업 우선시 정책에 불만을 품은 소련파와 연안파는, 8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을 실각시킬 의도로 공개 비판하는데, 이미 소식을 들은 최용건과 김일성 세력은 격렬하게 항의해 이들을 무력화 하고, 빠르게 귀국한 김일성은 이들을 숙청한다. 이로 인해 중국과 소련은 북한에 항의하고 조치를 철회하라고 압력을 넣었으나, 김일성은 겉으로는 동의하는 척 하면서, 결국은 이들 세력을 모두 뿌리뽑아 버린다. 이 시기 김일성 편에서 이들을 숙청하는데 참여했던 갑산파도 이후 1967년 비슷한 이유로 김일성의 정책을 비판했다가 숙청당하는데, 결국 북한에는 김일성 파 외에는 다른 견제세력이 모두 사라지게 된다. 김일성의 만주빨치산 파는 교육수준은 떨어졌으나 생사고락을 함께 한 경험으로 단결력이 강했고, 결국 이들이 북한의 정치투쟁에서 승리하게 되는데, 이것이 북한 사회에서는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다양성과 집단지도체제의 성격이 말살되고, 김일성 유일체제와 개인우상숭배가 고착되어, 같은 사회주의권이라도 중국, 베트남 등과는 다른 길을 가게 된 중요한 요인 중 하나가 된 것이다.

다큐는 이러한 국제적, 국내적 정치 격변으로 인해 다수의 북한 고아들이나 유학생들을 유럽에 남겨두는 것에 북한 지도층이 불안감을 갖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놀랍게도 헝가리의 10월 혁명에 가담한 북한 고아들이 있었고, 폴란드에 있던 북한 고아 2명은 오스트리아로 도망치려다 붙잡히기도 했다. 김 감독에 따르면 고아들을 동구권에 보낸 목적에는 “기술과 문화 등 여러 측면에서 앞선 동구권에서 아이들을 교육시켜 활용할 계획”도 있었는데, 이러한 정치 격변으로 1956년에서 1958년 경부터 이들을 조기 송환 시키기 시작했다고 설명한다. 송환된 아이들을 역마다 2, 3명씩 나눠서 내리게 했다고 하는데, 혹시라도 있을 아이들의 집단행동을 막고 통제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추측된다.
고아들이 부른 김일성 장군의 노래의 일부를 지금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된 불가리아의 친구들이 기억하고 부르는 장면도 소개되는데, 북한의 김일성 우상화 작업이 60년대가 아닌 50년대 부터 시작되었을 수 있다는 주장도 소개한다.

물론 고아들중에는 북한 사회에서 성공하고 엘리트 층이 된 이들도 있고, 외교관, 교수 등이 되어 폴란드를 다시 방문한 이들도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고아 출신 인사들 중, 한의표는 폴란드 대사, 한경식은 인민군 대좌를 거쳐 폴란드대사관 무관, 박동호는 외교관, 조성무는 조선·폴란드 친선협회 의장을 거쳐 폴란드어 교수가 되었다고 한다. 반면에 동유럽을 그리워 하고 북한 사회에 적응하지 못했는지, 12살 난 한 아이는 다시 동유럽으로 돌아가겠다고, 혼자 북중 국경을 넘다가 늪에 빠져 죽었다는 비극적인 기록도 있다.


또 하나의 비극적인 이야기는, 루마니아의 미르초유 할머니의 사연이었다. 김덕영 감독은 2004년 선배인 박찬욱 감독의 제보로 “루마니아에 사는 한 할머니가 북한 남편을 50년 동안 기다리고 있다”는 듣고 직접 방문해서 취재하게 된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루마니아 뿐 아니라 폴란드, 불가리아, 체코, 헝가리 등 다른 동유럽 나라에도 북한 전쟁고아들이 이주한 사실을 알게 되었고, 당시 취재의 결과가 6월 KBS에서 <수요기획-미르초유, 나의 남편은 조정호입니다>라는 제목으로 방송되기도 했었다.


1950년대 초 스무살이던 제오르제타 미르초유는 루마니아에 온 북한 고아들의 담당교사였는데, 이들을 인솔하고 온 북한측 교사 조정호를 존경하게 되고 그와 사랑에 빠진다. 많은 난관에도 허가를 받고 57년 결혼해 딸까지 낳고 북한으로 이주해 살게 되는데, 이 시기 북한사회는 급격히 사상통제와 외부에 대한 배척이 강화되고, 그것이 외국인에 대한 반감으로 까지 이어진다. 그래서 사회주의 형제국가인 루마니아 출신임에도 북한에서 생활이 어려울 정도의 상황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남편은 북한에서 탄광 등으로 옮겨다니게 되고 결국 소식이 끊어졌는데, 죽었다는 통보를 받았으나, 수시로 말이 바뀌어 믿을 수 없었고, 결국 딸과 함께 루마니아로 돌아와서 살면서 여러 곳에 호소를 해 보았으나 아직까지 남편의 생사도 모른 채 수십년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정호 1957’이라 새긴 결혼반지를 아직도 끼고 있는 미르초유 할머니는 남편을 언젠가 만날수 있다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루마니어와 한국어를 연구해 방대한 루한사전을 편찬했다고 해서 감동을 주기도 했는데, 역시 북한 사회가 폐쇄화 되는 가운데 벌어진 하나의 비극적인 사연이라 생각된다.

 

젊은 시절 북한의 고아들과 함께한 루마니아에서의 미르초유
남편 조정호(왼쪽)와 함께 한 미르초유
생사확인을 할 수 없는 남편을 기다리며 루한사전을 펴낸 미르초유 할머니


4. 굿바이 마이 러브NK: 붉은 청춘 (2017)

이와 비슷한 한국전쟁 말기인 1952년에 연극과 영화를 공부하는 8명의 학생들이 소련의 모스크바 국립영화학교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1956년, 이들은 스탈린의 개인숭배를 비판하는 ‘제20차 소련 공산당 대회 흐루시초프 비밀연설’에 감명 받게 되고, 1957년 11월 27일, 재소련 조선유학생대회에서 이들 중 하나인 허웅배가 김일성의 북한 1인독재를 비판한다. 그는 독립운동가 왕산 허위 장군의 손자이며, 아버지 역시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연안파였고, 그를 존경하던 다른 학생들은 비판에 합류한다. 이는 소련파, 연안파가 시도한 8월 종파사건과 흐름을 같이 하게 되는데, 북한에서 이들이 숙청되자, 8인의 학생은 북한으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소련 공산당에게 편지로 호소해 망명을 요청한다. 1958년 이것이 받아들여져서 소련 각지로 흩어져서 영화 관련 업무를 하며 살게 된다. 이들은 참되게 살자는 의미에서 이름을 모두 ‘진’으로 개명하는데, 이들 ‘모스크바 8진’은 떨어져 있더라도 서로 연락을 주고 받으면서 우정을 이어나간다.


그동안 다른 다큐멘터리를 통해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로 흩어져 살아온 고려인들의 발자취를 조명해 온 김소영 감독은 이들의 인생을 뒤따라 가는데, 모스크바 8진 중에 생존해 있는 촬영감독 김종훈과 최국인 감독, 그리고 고 한대용(한진)의 러시아인 아내 지나이다 이바노브나를 인터뷰한다. 광활한 소련내에 떨어져 살았던 이들 중 일부는, 외로움에 시달리다가 고려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카자흐스탄에 모여 우정을 나누며 여생을 보낸다. 특히 연배가 높았던 최국인 감독은 ‘용의 해’라는 영화로 영화제에서 상도 수상하고 동구권에서 이름이 알려졌다고 한다. 그는 해방이전에 조선의용군에 참여하기도 있었고, 연안파에 속하는 김두봉이나 무정 등, 중국에서의 독립운동 항일운동 혁명가들의 사적을 잘 알고 존경했다고 언급한다. 그리고 그렇기에 이들을 숙청하고 씨를 말린 김일성과 그 추종세력에 대해 "중국에서 조선사람들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인정하는 우리 혁명가들을 다 죽인 놈"이라고 신랄한 비판을 가한다. 자신의 일가친척도 김일성의 숙청으로 많이 처형되고 무덤도 없으며 그로 인한 분노로 자신이 중풍이 생겼다고 토로하기도 한다. 카자흐스탄이나 소련 관련 영화만 찍도록 허락이 되어, 민족에 대한 영화를 만들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토로했던 그는, 2015년 작고한다.

유학시절 모스크바 8진의 사진


그래도 조정호 미르초유 부부의 사연과 비교해 보면, 이들은 당시 북소관계가 경색된 상황으로 인해 강제 북송되지 않고 1958년 소련으로의 망명이 허가 되었기에, 최소한의 자유를 누리고 서로 연락을 주고받거나 가까이서 살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1956년을 계기로 김일성을 비판하고 소련의 망명자가 되어 버린 북한의 유학생들, 김일성 파 외의 사회주의 세력이 궤멸되어 버린 오늘의 북한을 생각하면, 이들의 사상과 입장이 매우 인상적이었고, 인간적으로도 이들이 가진 끈끈한 우정과 타국에서 망명자로서 살아간 인생의 모습이 애잔하기도 하고 공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김일성 유일체제와 폐쇄화된 북한의 출발점이 된 1956년 전후의 사건을 다룬 두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게 되고, 분단된 현실 속에서 배제되고 비극적인 삶을 살아간 수많은 이들의 인생을 생각해 본다.
하노이 이후, 출구가 보이지 않는 북핵문제와 북미갈등, 얼어붙은 남북관계에도 새로운 계기가 찾아올 지, 바이든 정부가 어떤 대북정책을 추진할 지 가슴졸이며 기다리고 있는 요즘, 부디 한반도의 화해와 평화, 통일이 이뤄지기를, 그리고 냉전과 분단속에 배제된 주변인들의 인생도 정당한 평가를 받고, 이들의 영혼도 위로 받기를 기를 기도해 본다.

카자흐스탄의 고려인 화가가 그린 8진의 초상화
모스크바 8진 중 한명인 한대용의 희곡 삼팔선의 한 대목


<참고자료>

서정민, "‘김일성의 아이들’ 다큐 만든 김덕영 “이 역사, 대단합니다”", 한겨레(2020.04.09)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936392.html

라제기, ‘김일성의 아이들’ 김덕영 감독 “북한 전쟁고아 보면 50년대 북한 알 수 있어”, 한국일보(2020.02.29)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2002281491030540

박차영, "동유럽 간 북한 전쟁고아 다큐…니스 영화제 진출", 아틀라스 뉴스(2020.03.27)
http://www.atla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914

김종성, "6.25 전쟁고아들 유럽으로 보낸 북한, 김일성의 큰 그림: 다큐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이 조명한 북한 전쟁고아의 삶", 오마이뉴스(2018.10.24)
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481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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