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엽

한국의 민주평통의 기관지인 통일시대에서 최근 미국내에서 벌어지는 아시안 인종차별에 대한 글을 부탁 받아서 5월호에 기고하게 되었습니다. 
주어진 분량이 제한적이고 잡지 성격상 다 담지 못한 내용이 있어서, 관련 사진들을 추가해 블로그에 올려봅니다. 이미 많은 분들이 글을 썼지만, 최근 벌어지는 아시안에 대한 증오범죄와 인종차별을, 조금 긴 역사적 관점에서 조망하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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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아시안에 대한 인종차별의 역사와 현황, 그리고 시사점
: 모범적 소수인종의 신화를 넘어, 차별에 맞선 연대의 목소리 내야

2021년 4월 이인엽 

지난 3월 16일 미국 조지아주 애틀란타에서 벌어진 총격사건은 아시안 커뮤니티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21세 백인 남성 애런 롱(Aaron Long)이 마사지 업소 ‘영스 아시안 마사지’에 침입 1차 총격을 가하고, 이후 골드 스파 등 다른 두 곳의 마사지 업소에서도 총기를 난사해, 8명을 살해했다. 희생자 중 6명이 아시안, 그중 4명이 한인 여성이었다. 이후 애틀란타 경찰은 브리핑에서 범인의 진술을 인용해, 그가 성 중독에 빠졌을 가능성이 있으며 인종적 증오범죄로 판단하기에는 이르다고 언급했다. 또한 총격 당일은 "그에게 정말 나쁜 날(a really bad day)이었다"고 동정적으로 묘사해, 비난 여론이 고조되었다. 그러나 범인이 SNS에 중국을 악으로 규정하고 중국인 혐오를 담은 글을 올렸다는 것이 공개되고, 아시안 업소를 대상으로 한 계획적인 증오범죄라는 비판이 지속되고 있다. 이 사건 외에도, 코로나19가 유행하기 시작한 2020년 3월 이후 아시안 혐오 범죄가 전국적으로 폭증하고 있는데, 아시아태평양계에 대한 증오범죄를 멈추라는 ‘스톱 AAPI 헤이트’ 웹사이트에는3800건의 혐오사건이 접수될 정도이다.
이 글에서는 먼저 아시안에 대한 차별의 역사와, 현재 벌어지는 증오범죄의 직접적 원인들을 살펴보고, 이런 현상이 주는 시사점을 생각해 보려고 한다.

사건이 발생한 마사지 업소와 범인 애런 롱


1. 아시안 차별과 혐오의 역사

​미국에서 아시안 이민과 차별의 역사는 무려 19세기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40년대, 골드 러시와 함께 중국인 이민자들이 유입되기 시작했고, 이후 1860년대 대륙횡단 철도 건설에 많은 중국인 노동자들이 투입되었다. 철도공사 중 암벽을 뚫고 화약을 끼워 넣는 등 백인들이 하고 싶어하지 않는 위험한 노동을 중국인들이 맡은 것인데, 수천명의 중국인들이 이 과정에서 사망했다. 그런데 1870년대 미국 경제가 악화되고 구직난이 심화되며, 1980년에 중국인 인구가 캘리포니아의 10%에 육박하자, 저소득층 백인들 사이에서 중국인들을 자신들의 일자리를 위협한다는 이른바 ‘황색 공포(Yellow peril)’가 퍼져나간다.

대륙횡단 철도공사를 위해 일하던 중국인 노동자들


이러한 인식은 차별적인 법률과 이민정책으로 뒷받침 되는데, 아시안들은 미국 사회에서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고 구조적인 차별에 시달리게 된다. 1854년, 캘리포니아 대법원은 백인의 범죄에 대해 아시안은 증인이 될 수 없다고 판결하는데, 아시안들은 지능이 떨어지고 믿을 수 없다는 편견이 깔려있었다. 이에 따르면 아시안들은 백인에게 살인이나 강간을 당해도, 다른 백인이 증언해 주지 않는 한, 법적 보호나 책임자 처벌을 요구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다. 1871년 백인과 중국인 폭력조직 사이의 갈등으로 20명 이상의 중국인들이 사망한 ‘중국인 대학살 (The Chinese Massacre)’이 벌어지는데, 역시 백인들이었던 살해 용의자들은 제대로 처벌 받지 않았다. 1875년 통과된 ‘페이지법(Page Act)’은 부적절한 목적을 가졌다고 판단되는 이민자들의 입국을 금지했는데, 특히 아시아 여성들이 성매매에 종사하기 위해 미국으로 들어온다는 편견을 바탕으로 입국을 제한시켰다. 아시안들에 대한 차별과 편견은 1882년의 ‘중국인 배척법 (Chinese exclusion act)’에서 정점을 찍는데, 아예 중국인들의 이민과 시민권 부여를 금지하게 된다. 10년간 시행되기로 한 이 법은 계속 연장되었고, 60여년이 지나서 2차대전과 함께 중국이 미국의 동맹국이 되었던 1943년에야 폐지 되었다.

황색공포를 대표하는 신문 만평
황색공포를 대표하는 만평. 아시아인을 범죄, 질병, 아편, 저임금의 위협 등으로 규정하고 있다.


아시안들은 열등하고 불결하며, 바이러스와 질병의 근원이라 지목하는 경향도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1876년, 미국의 천연두 사태가 벌어지자, 백인들은 중국인들을 원인으로 지목하기도 했다. 외과의사이자 1948년 1952년 올림픽 다이빙 2연패를 달성한 아시안의 영웅 새미 리(Sammy Lee, 1920~2016)의 경우에도 캘리포니아에서 수영과 다이빙을 배우기 시작할 때 극심한 인종차별을 겪었다고 하는데, 불결한 소수인종들과 같은 수영장에 들어갈 수 없다는 백인들의 차별로, 비백인들에게는 물을 갈기 전날인 수요일 단 하루만 수영장을 개방했다고 한다. 심지어 1964년 플로리다의 한 모텔에서는, 흑백차별 철폐를 위한 시민권운동의 일환으로 백인 전용 풀장에 흑인들이 들어가 수영을 했는데, 이를 본 모텔 소유주가 사람이 있는 풀장에 염산을 들이부어 충격을 준 사건도 있었다. 미국에서 인종간 결혼을 금지하는 법률들이 최종적으로 사라진 것은 1967년 ‘러빙 대 버지니아(Loving v. Virginia)’ 대법원 판결이 나오고 나서야 가능했을 정도로, 백인들의 인종적 편견은 끈질기게 지속되었다.

19세기 황색 공포를 보여주는 “중국인들은 돌아가야 한다"는 내용의 풍자화. 미국을 상징하는 엉클 샘이, 한 손에는 추방명령서, 다른 손에는 소독제를 들고 있다.


1941년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면서 아시안에 대한 차별은 적대국 출신인 일본계 미국인에 집중된다. 바로 다음 해인 1942년, 미국은 일본계 미국인을 ‘적성외국인’으로 간주하고 적법한 절차도 없이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행정명령만으로 약 12만 명을 캘리포니아와 애리조나 등 분리 수용소로 강제 수용했다. 미국의 동화책 작가이자 만화가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닥터 수스 (Dr. Seuss)’ 조차도, 당시 일본인들을 본국의 지령에 따라 폭탄을 나눠 갖고 공격을 준비하는 잠재적 테러범으로 묘사하는 만화를 그릴 정도였다. 스타트렉의 술루 역으로 유명한 일본계 배우 조지 타케이도 자신의 가족이 당시 강제 수용소에서 지냈다는 것을 TED 강연에서 이야기 하기도 했고, 당시 상당수 일본계, 아시아계는 미국에 대한 자신의 충성심을 증명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미군에 입대하기도 했다. 당시 장개석의 국민당이 국공내전에 패하기 전의 중국은 미국의 편에서 일본과 싸운 동맹국이었는데, 미국에서는 일본계로 오인해 중국인을 공격하는 일이 벌어지자, 잡지인 라이프(Life Magazine)는 1941년 “일본인을 중국인과 구분하는 법(How To Tell Japs From The Chinese)”이라는 제목으로, 두 민족의 외양적 차이를 설명하는 황당한 기사를 올리기도 했다. 전쟁 이후 일본인 피해자들에게 1948년 3천8백만 달러의 배상을 제공하고, 1980년대 레이건 대통령은 다시 공식 사과와 함께 생존자에게 2만달러를 배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역사는, 미국의 국내외적 상황에 따라 아시안들은 얼마든지 차별과 증오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흥미로운 것은 같은 적성국이었지만, 독일계에 대해서는 공공연한 차별 정책이 진행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기본적으로 숫자가 너무 많았고, 무엇보다 백인이었기 때문이다.

태평양 전쟁시 미국내 일본인들을 잠재적 테러범으로 묘사한 닥터 수스의 만평
1941년 잡지 라이프(Life Magazine)에 실린 “일본인을 중국인과 구분하는 법(How To Tell Japs From The Chinese)”이라는 인종차별적 기사.


결국 아시안의 이민 역사는 거의 200년이 지나가지만, 아시안은 미국 사회의 구성원이 아닌, ‘영원한 이방인(perpetual foreigner)’ 취급을 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골드 러시 시대 부터 미국에 정착해 살아온 중국인들도, 출신지를 물을 때 미국 지명을 말하면, “최초의 출신지가 어디냐 (Where are you originally from?)”이라는, 당연히 외국인일 것이라는 편견을 계속해서 맞닥뜨려야 하고, 심지어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 (Go back to your country)”라는 모욕적인 말을 듣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2. 모범적 소수인종의 신화

2차대전이 끝나고 냉전이 시작되면서, 일본은 경제와 안보에서 밀접한 미국의 동맹국이 되는데, 일본인에 대한 인식은 ‘일본도를 휘두르는 야만적이고 잔인무도한 적군’에서 ‘성실하고 부지런하며 예의 바른 사람들’로 극적인 전환이 이루어 진다. 1965년 이민법 개정으로 이민에서 인종 차별적 요소들이 폐지된 반면, 미국에 도움이 되는 기술, 학력 등을 가진 전문직 이민자 선호가 시작되면서, 동아시아계, 인도계 이민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런 와중에 ‘모범적 소수인종의 신화(Model Minority Myth)’라는 개념이 탄생하게 되는데, 일본계 미국인들의 성공을 다룬, 윌리엄 피터슨의 1966년 뉴욕 타임즈 기사(“Success Story, Japanese-American Style”)가 그 출발점으로 알려져 있다. 아시안들은 문화적으로 근면 성실하며, 수학을 비롯 학업 성취도가 높고, 따라서 사회 경제적 지위도 높아서, 미국사회에서 타 인종들보다 성공적인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언뜻 들으면 아시안들을 칭찬하는 내용 같지만, 이는 많은 문제를 야기하는 인종적 편견으로 작용하고 있다.

모범적 소수인종의 신화(Model Minority Myth)’는, 윌리엄 피터슨의 1966년 뉴욕 타임즈 기사(“Success Story, Japanese-American Style”)가 그 출발점


먼저는 이것이 1960년대 시민권 운동 등으로 분출되기 시작한 미국의 구조적 인종차별에 대한 비판에 대한 ‘반대 논리’로 개발되었다는 점이다. 자신들의 특권과 소수인종에 대한 차별을 부정하고 싶은 백인 주류는, 아시아계 평균 수입이 백인들조차 능가하는 통계 등을 인용하며, 미국에 구조적 인종차별이 남아있다면 아시안들은 어떻게 저렇게 성공할 수 있겠는가라고 질문한다. 그리고 아시안들이 증명하듯, 이제 미국에는 백인들의 특권이나 구조적 인종차별이 사라져서 노력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고, 만일 소수 인종들이 성공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차별의 결과가 아니라 노력이 부족한 것이라는 논리를 퍼뜨린 것이다. 이는 흑인을 위한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삭감하는 근거로 활용 되기도 했다. 문제는 1965년 이민법 개정 이후, 교육과 비즈니스의 기회를 찾아 미국으로 온 동아시아계나 인도계는, 기본적으로 교육수준과 성공욕구가 높은 '선별적인' 그룹인데, 이들을 동일 선상에서 다른 인종 그룹과 비교하는 것, 예를 들어 노예로 끌려와서 극심한 차별속에 미국 정착을 시작한 흑인들과 비교해서 노력과 성공을 운운하는 것이 매우 불공정한 담론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는 아시안들을 획일화 하고, 일부 성공적인 이들로 아시안 전체를 과잉대표하는 문제를 가져왔다. 아시안들을 세분하면 인도계처럼 학력 수입이 매우 높은 그룹도 있지만, 베트남계 등 사회경제적 수준이 낮은 그룹도 있다. 앞에서 말한 교육과 비즈니스의 기회를 찾아온 동아시아계, 인도계 이민자와, 난민으로 미국에 오게된 캄보디아계, 베트남 계 등을 한 카테고리로 묶는 다는 것도 심각한 문제가 있다. 실제로 최근의 통계를 보면, 7명중 1명의 아시안들은 서류 미비자(170만명)이며, 4분의 1이 빈곤선 이하로 살고 있다고 확인되었다. 그런데 모범적 소수인종의 신화는 마치 아시안 전체가 동일하게 경제적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있는 것처럼 단순화하고, 이는 아시안들에 대한 지원을 삭감하고, 역차별을 정당화 하는 기제로 작동하기도 한다.

또한 아시안들에 가해지는 차별의 벽을 감추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아시안들은 IT, 의학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으나, 정치, 비지니스, 스포츠, 미디어에서 현저하게 과소대표되고 있어, ‘대나무 천장(Bamboo Ceiling)’이라는 표현이 존재한다. 같은 교육수준이어도, 그에 비례해 받는 아시안이 받는 임금은 백인보다 낮고, 포춘500대 기업의 이사진의 경우 아시아 태평양계 (AAPI)가 단 3%에 불과하다는 통계도 있다. 영화나 대중매체에서 아시아인들이 주역을 맡는 경우가 아직도 매우 드물고, 심지어 백인이 아시아인의 배역을 맡는 ‘화이트워싱(Whitewashing in film)’도 아직 빈번하다.

상당수 아시안들은 백인들이 만들어 놓은 이러한 신화를 내면화하는 경향도 강한데, 특히 '중국인 배척법'이나, 2차대전 중 일본인 강제수용 등의 극심한 차별을 겪었던 아시안들은, 이렇게 자신들을 타 인종보다 높게 평가하는 듯한 백인 주류의 담론을 긍정적으로 수용한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런 신화을 내면화 한 아시안 들은 자신이 겪는 차별이나 빈곤을 구조적인 문제가 아닌 개인의 노력의 문제로 여기고, 자신이 겪는 차별과 문제에 대해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경향을 보인다. 특히 이러한 경제적, 심리적 문제는, 노년층이나 여성들 안에서 더욱 심각하다. 미국에서 태어난 아시아 여성의 경우 자살 충동을 느끼는 비율(15.9%)이 일반 대중보다 높고(13.5%), 15~24세 사이 아시아 여성의 자살율은 같은 나이의 백인 여성보다 무려 30% 높다고 한다.

애틀란타 총격 사건에서 보듯, 아시안에 대한 편견은 '여성에 대한 차별 및 혐오'와 복합적으로 작용하는데, 아시아계 증오범죄 피해자의 70%가 여성이라는 통계가 이를 말해준다. 여기에는 2차대전 이후 아시아에 주둔해온 미군의 경험 등, 역사적 배경이 깔려있다. 2차대전,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 등 아시아의 전쟁들과, 일본, 한국, 베트남, 필리핀 등 미군 주둔의 경험은 기지촌, 윤락가 등이 형성으로 이어졌고, 태국 같은 국가는 미군이나 미국인들의 휴양지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경험은 아시아 여성들을 백인 남성을 위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존재로 규정하고, 과도하게 성적 대상화 하는 뒤틀린 시선(소위 황색 열병, Yellow Fever)을 강화했다.

결국 ‘황색 공포’ 등 ‘황색 열병’이든 그 공통점은, 아시안을 동등한 인격체로 대우하지 않고, 백인 중심적 시각의 편견과 필요에 따라, 때로는 공포의 대상, 혹은 욕망의 대상으로, 비인간화, 객체화 한다는 것이다.

3. 인종차별에서 한 발 떨어져 있었던 아시안, 다시 혐오의 대상으로

한편, 1975년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미국이 중국과 관계를 개선하는 등, 70년대에 데탕트가 진행되면서, 북한을 제외하고는 아시아에 강력한 미국의 적성국은 사라지게 된다. 국내적으로도 흑백 갈등이 고질적인 문제로 지속되면서, 아시안들은 백인 중심의 미국 사회에 대체로 ‘무해’하고 ‘유익한’ 소수인종으로 자리 매김 하게 되었고, 상당수 아시안들은 교육열과 근면 성실을 바탕으로 사회경제적 신분 상승을 이룬 것도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적어도 최근 몇 십년 간 아시안들은 미국 사회의 극심한 인종차별과 갈등에서 상대적으로 한발 떨어져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2001년 9/11 테러 이후에는 아랍계, 무슬림 들이 테러범 취급을 받고 극심한 차별과 공격에 시달렸다.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 사건에서 보듯, 최근 핸드폰 등 기술의 발달로 흑인들에 대한 백인 경찰들의 폭력이나 살인 등 불공정한 법집행의 증거물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이에 대한 분노가, “흑인의 목숨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라는 BLM 운동으로 폭발하게 된다. 트럼프 집권 이후, 강력한 반이민 정책과 함께 중남미 이민자들을 대놓고 범죄자, 강간범 취급하는 경향이 시작되고, 심지어 추방될 아이들을 부모와 분리해 케이지에 가두는 등, 매우 비인간적인 정책마저 시작된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도 모범적 소수인종의 신화를 내면화 한 아시안 들은, 이러한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의 문제를 ‘타인종들의 문제’로 인식하는 경향도 있었다.

그런데 2016년 대선 부터, 트럼프는 세계화와 자유무역의 부산물로 미국의 백인 중산층이 쇠락하는 현상에 집중해, 이러한 불만의 출구를 중남미의 이민자들이나 중국으로 유도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미중 무역전쟁을 강조하고, 중국을 적대국으로 규정하는 정책으로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러한 전략은 미국 경제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이나 해결책을 찾기 보다 대중의 분노를 투사할 일종의 “희생양 찾기”를 노리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있다. 이와 더불어 2020년부터 코로나19가 미국 안에서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면서, 트럼프는 의도적으로 코로나 바이러스를 “중국 바이러스(Chinese Virus)”, 혹은 심지어 “쿵 플루(Kung Flu)” 운운하며, 중국이나 아시안에 대한 분노를 부추기기 시작했다. 이런 와중에 미국인들 사이에서 중국에 대한 인식은 극도로 악화 되었는데, 지난해 4월 퓨리서치 센터가 발표한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들의 중국에 대한 인식이 긍정 26%, 부정 66%로 사상 최악의 결과가 나왔다. 불과 10년 전인 2010년 까지만 해도, 긍정 49%, 부정 36%였던 것에 비해, 완전히 반전된 것이다. 이는 트럼프 같은 정치인들이, 중국 위협론과 더불어, 코로나19 스트레스를 겪는 미국인들이, 아시안 들을 향해 자신들의 공포와 분노를 분출하도록 부추긴 결과라 할 수 있다.

트럼프 연설문에서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표현을 의도적으로 ‘중국’ 바이러스라 고친 부분

 

코로나 바이러스를 쿵플루(Kung Flu)라고 지칭한 트럼프 대통령

 

결국 역사와 현실을 종합해 보면, 아시안들을 비롯한 소수인종에 대한 차별과 증오는 백인 주류의 이해관계와 미국내 소수인종들간의 역학관계, 그리고 미국내의 경제적 상황이나, 미국의 대외관계에 따라 변화해 왔으며, 결국 이러한 배경하에서 백인 주류사회의 필요에 따라 특정 인종을 차별하고 증오하는 현상이 언제는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관찰하게 된다.
아시안들은 이민 역사 초기부터 차별에 시달렸지만, 미국 백인 주류 사회의 필요에 따라 한동안 모범적 소수인종의 신화를 내면화 하며, 극심한 인종 갈등에서 한발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최근 다시 증오와 혐오의 대상으로 지목되고 있다고 요약할 수 있겠다.

사실 이러한 사례는 비교적 최근에도 있었다. 1992년의 LA 폭동이 그것이다. 속도위반으로 붙잡힌 흑인 남성 로드니 킹을 백인 경찰이 가혹하게 구타해 청각까지 잃었지만, 경찰들이 무죄로 풀려나자 흑인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주류 매체들은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두순자 사건을 집중 조명하는데, 이는 한인 여성으로 슈퍼마켓 주인이었던 두순자 씨가 흑인 소녀를 도둑으로 오인해 싸움 끝에 총으로 쏜 사건으로, 미디어는 이 사건을 부각해 백인 경찰에 대한 분노를 한흑 갈등으로 치환한다. 또한 경찰은 백인 부유층 거주지인 베버리힐스는 철통같이 방어하고, 반면 흑인 지역과 백인 지역 중간에 위치한 한인타운은 방치해, 흑인들은 6일간 한인타운을 습격하고, 이로 인해 2,200군데 한인 상점이 불타고 파괴될 정도로, 전쟁터가 되어 버린 것이다. 역시 백인 주류 사회의 필요에 따라, 아시안들을 비롯한 소수인종을 언제든지 희생양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다.

1992년 LA 폭동

 

LA 폭동 와중에 전소된 상점 앞에서 망연자실한 표정의 한인 여성


4. 모범적 소수인종의 신화를 넘어, 차별에 맞선 연대의 목소리 내야

그렇다면 아시안 이민과 차별의 긴 역사와 최근 벌어지는 아시안 대상 증오범죄의 폭발적 증가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먼저, 미국 내에 백인우월주의와 소수인종에 대한 법적, 정치적, 사회적 차별이 지속되며, 일부 정치인들이 이를 이용하려 들 때, 아시안을 비롯한 그 누구도 안전하지 않고, 언제 희생양으로 지목될 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아시안들은 그 숫자가 적고, 아시안 내부의 다양성이나 갈등 요인 등으로 잘 단결하지 못하며, 정치참여에 소극적인 경향이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증오범죄의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현실을 접하며, 우리의 생존과 안전을 위해서라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우리 모두가 미국 사회의 모순과 차별을 나의 문제로 인식하고, 차별 없는 세상을 위해 다른 소수인종들과 적극적으로 연대하며 싸워나가는 사고 전환의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반성적으로 보자면, 상당수 아시안들이나 한인들은, 백인 우월주의가 심어준 모범적 소수인종의 신화와 인종간의 위계질서를 비판의식 없이 내면화 해 온 면이 있다. 흑인들의 시민권 운동 등, 미국 역사 속에서 다른 선구자들이 인종차별과 싸워온 성과들을 인정하고 감사하기 보다는, 그 열매만을 따 먹어 왔다는 비판도 있다. 미국사회에서 지속되어 온, 구조적 차별을 직시하고 타 인종들이 겪는 부당한 차별에 관심을 갖고 연대하기 보다는, 백인 주류 사회가 정해놓은 게임의 법칙에 가장 잘 적응하여 주류사회에 편입하고, 타 소수인종 보다는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겠다는, 결국은 매우 기회주의적이고 속물적인 태도는 아니었나 싶은 것이다. 한 예로, 중국인 혐오가 시작되자, 일부 한인들은 부당한 차별을 지적하기 보다는 “나는 중국인이 아닙니다 (I am not Chinese)”라는 티셔츠라도 입어야겠다고 농담을 했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애틀란타 총격사건 이후 추모행사를 기획한 목사님에게서, 지역에 수많은 한인 교회가 있지만, 참여하겠다는 곳이 없어 안타깝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모범적 소수인종의 신화를 내면화 하고, 주류 사회에 편입하고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에 빠져, 한인 사회의 피해자 마져 외면하는 이런 모습에 대해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특히 우리 한국인들은 민주화를 이뤄온 자랑스러운 역사가 있으며, 최근에도 촛불 혁명 등 높은 수준의 시민사회의 역량을 보여 주었고, 문재인 대통령과 많은 시민들이 미얀마 사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지지를 보내는 등, 세계의 민주화와 정의에 기여할 역량과 책임이 있다고 본다. 영화 ‘기생충’이나, ‘미나리’가 미국과 세계에서 주목을 받고 있는 것에서 보듯, 한국인들의 고민과 경험이 세계적이고 보편적인 공감대를 일으키는 시대가 왔다. 미국의 한인들이, 최근 벌어지는 아시안 대상 증오범죄에서 오는 슬픔과 분노를 넘어, 적극적으로 미국 사회의 개혁에 참여하고 기여하는 것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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