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엽

 

코로나와 기독교: 1. 대면예배를 고수하는 일부 보수교회, 예수의 길인가 바리새인의 길인가?

 

전광훈의 사랑제일교회와 태극기부대의 광화문 집회 이후에, 방역 모범국이었던 우리 나라에 코로나 확산이 위험한 수준이다.

300명대 확진자 발생이 지속되어 정부는 거리두기 2단계를 전국적으로 확대하기로 했고, 오늘 신규 확진자가 441명으로 방역의 한계에 근접하면서 3단계 격상까지 거론되고 있다. 그 경우 자영업자, 소상공인들과 국가경제에 치명적인 타격이 오게된다. 학생들의 등교도 어려워 진다.

 

이 와중에 한교총을 비롯한 보수 기독교 단체들은 대면 예배를 포기할 수 없다며 고집을 부리고 있고, 심지어 일부 보수 개신교 단체는 행정명령이 하나님의 진노를 촉발한다고 하면서, 정은경 질병관리 본부장을 해임하라 요구하고 있다.

이런 이들에게 대면 예배를 고집하는 이유를 묻는다면, '주일 성수'는 신앙의 본질이며 하나님의 명령이고, 신앙의 자유, 집회 결사의 자유를 위해서 정부의 명령에 저항할 수 밖에 없다, 뭐 이런 대답을 할 것 같다.

그런데, 이게 과연 성경적인 주장이며, 성숙한 신앙인의 입장일까?

기독교인들 안에 일종의 철칙처럼 지켜져 온, '교회에서 모이는 대면예배로서의 주일성수'는 결코 타협할 수 없는 신앙원칙인가?

 

결론부터 말한다면, 보수 교회들의 이런 반응은 성경적, 신앙적 근거를 찾기도 힘들고, 책임있는 사회인의 모습이 아닌, 율법주의와 이기주의에 가깝다는 생각이다.

 

본인도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나 모태신앙으로 평생 주일성수를 하며 살아왔고,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른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신앙양태에 대한 실망속에 깨달은 것은, 오늘 많은 교회들은, 신앙의 비본질을 본질로 착각하고 있고, 많은 경우 비본질이 오히려 본질을 압도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많은 교회와 교인들이 교회 안의 우물안 개구리가 되어,

자신의 주장만을 반복하고, 우리 사회의 이웃들과 대화할 줄 모르며,

교회가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가져야 할 공적 신앙과 사회적 책임, 공동체 의식은 방기한채, 근거없는 피해의식과, 핍박에 대한 공포심에 휘둘리며,

가짜뉴스와 음모론에 빠져서, 심지어 그것을 만들어 내고 확산하고 있다.

즉, 전반적인 기독교의 사회적 성숙도가, 천주교나 불교 등 타 종교나 일반 국민들의 평균에도 미치지 못하는, 유치한 수준에 머무르고 있으며, 우리 사회의 정치적, 사회적, 신체적 건강을 위협하는 위험요소가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부끄러움과 자성의 마음에, 부족하나마 쓸데없이 긴 글이라도 써 보게 된다.

 

아직도 대면예배 고수를 신앙적 투쟁 처럼 생각하는 분들을 위해, 성경을 보고 판단해 보자. 성경이 말하는 신앙과 안식의 의미는 언제나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과 연결되어 있다.

 

먼저 구약의 말씀 몇 구절을 보자.

 

<이사야 1:11-17>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기름기가 지겹고, 나는 이제 수송아지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피도 싫다. 너희가 나의 앞에 보이러 오지만, 누가 너희에게 그것을 요구하였느냐? 나의 뜰만 밟을 뿐이다!

다시는 헛된 제물을 가져 오지 말아라. 다 쓸모 없는 것들이다. 분향하는 것도 나에게는 역겹고, 초하루와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참을 수 없으며, 거룩한 집회를 열어 놓고 못된 짓도 함께 하는 것을, 내가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나는 정말로 너희의 초하루 행사와 정한 절기들이 싫다. 그것들은 오히려 나에게 짐이 될 뿐이다. 그것들을 짊어지기에는 내가 너무 지쳤다. 너희가 팔을 벌리고 기도한다 하더라도,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겠다. 너희가 아무리 많이 기도를 한다 하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의 손에는 피가 가득하다.

너희는 씻어라. 스스로 정결하게 하여라. 내가 보는 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을 버려라. 악한 일을 그치고, 옳은 일을 하는 것을 배워라. 정의를 찾아라. 억압받는 사람을 도와주어라. 고아의 송사를 변호하여 주고 과부의 송사를 변론하여 주어라."

=> 하나님은 선행과 정의를 실천하지 않고, 고아와 과부 등 사회적 약자의 편이 되어 주지 않으면서, 예배를 드리고 제물을 바치는 것을 가증스럽고 피곤하며 역겹게 생각하신다는 말씀이다.

 

<아모스 5:21-24>

"나는, 너희가 벌이는 절기 행사들이 싫다. 역겹다. 너희가 성회로 모여도 도무지 기쁘지 않다. 너희가 나에게 번제물이나 곡식제물을 바친다 해도, 내가 그 제물을 받지 않겠다. 너희가 화목제로 바치는 살진 짐승도 거들떠보지 않겠다. 시끄러운 너의 노랫소리를 나의 앞에서 집어치워라! 너의 거문고 소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는,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

=> 같은 맥락에서 이웃, 세상과의 관계에서 정의와 공의를 망가뜨리면서, 온갖 예배와 신앙의 행위를 하는 것을 하나님은 거절하고 싫어한다는 말이다.

 

<이사야 58:3-7>

"주님께서 보시지도 않는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금식을 합니까? 주님께서 알아 주시지도 않는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고행을 하겠습니까?

너희들이 금식하는 날, 너희 자신의 향락만을 찾고, 일꾼들에게는 무리하게 일을 시킨다. 너희가 다투고 싸우면서, 금식을 하는구나. 이렇게 못된 주먹질이나 하려고 금식을 하느냐? 너희의 목소리를 저 높은 곳에 들리게 할 생각이 있다면, 오늘과 같은 이런 금식을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겠느냐? 이것이 어찌 사람이 통회하며 괴로워하는 날이 되겠느냐?" 머리를 갈대처럼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깔고 앉는다고 해서 어찌 이것을 금식이라고 하겠으며, 주님께서 너희를 기쁘게 반기실 날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부당한 결박을 풀어 주는 것,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 것, 압제받는 사람을 놓아 주는 것, 모든 멍에를 꺾어 버리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니냐?" 또한 굶주린 사람에게 너의 먹거리를 나누어 주는 것, 떠도는 불쌍한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겠느냐? 헐벗은 사람을 보았을 때에 그에게 옷을 입혀 주는 것, 너의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 금식기도라는 신앙의 행위를 하면서 약자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등 악한 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이 결코 기뻐하지 않으시며, 참된 금식은 사회정의를 바로 잡아 억눌린자를 풀어주고 압박과 착취를 그치며, 구제와 자비를 실천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출20:10>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 구약 성서가 쓰여진 고대의 세계에서는, 노예, 종, 가난한 자들에게는 인권, 복지, 안식의 개념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성경의 정신과 하나님의 성품으로 볼 때, 율법으로 안식일을 지키도록 강제한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신앙적 의미도 있지만, 약자들에게 최소한의 쉼과 안식을 보장하는 의미가 있었다.

 

구약의 다른 부분인 희년법이나, 고아와 과부를 위한 십일조 등에 나타난 율법의 정신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하나가 되는 것, 즉 하나님을 예배하는 신앙적 차원이, 정의롭고 공평하며, 인애롭고 자비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사회적 차원과 분리 될 수 없음을 말해준다.

크리스토퍼 라이트의 '현대를 위한 구약윤리'를 보면 구약은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 모두에서 총체적 신앙의 실천을 말하고 있으며,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분리 될 수 없듯이, 우리 삶과 이웃과의 관계에서 정의와 자비를 저버린 것을 광신적 종교행위로 보상할 수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

 

신약을 보자.

 

구약에 제시된 안식일의 의미는 신약에 와서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의 치열한 논쟁의 주제가 된다.

예수가 바리새인들에게 분개하고 그들과 철저히 투쟁하신 이유는, 바리새인들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담고있는 '율법'을 '율법주의화' 했다는 것이다. 즉, 율법이 담고있는 정의와 공평, 인애와 자비의 정신은 무시한 채, 그것을 종교적 규율로 만들어, 자신들의 종교적, 경제적 기득권을 유지하고, 사람들을 정죄하고 차별하며 통제하고 착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켰다는 것이다.

예수는 인간을 사랑해서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본 뜻을 왜곡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율법주의의 악'을 저지르는 이들을 향해 불타는 분노와 독설을 퍼부었다. 그리고 이들이 그어 놓은 경계선과 규율에 끊임없이 도전하며, 이들의 위선을 폭로하고, 이들의 종교적 권위를 흔들기 시작한다.

 

<마가복음3:1-6>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런데 거기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은 예수를 고발하려고, 예수가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를 보려고, 예수를 지켜보고 있었다.

예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서 가운데로 나오너라." 그리고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그들은 잠잠하였다.

예수께서 노하셔서, 그들을 둘러보시고, 그들의 마음이 굳어진 것을 탄식하시면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손을 내밀어라." 그 사람이 손을 내미니, 그의 손이 회복되었다.

그러자 바리새파 사람들은 바깥으로 나가서, 곧바로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를 없앨 모의를 하였다."

 

예수가 병자를 고쳐준 많은 기적들의 상당수는, 바리새인들이 노동을 금지해 온 '안식일'에 이루어 졌다. 시각장애인을 치료하고 (요 9:1-25), 18년된 귀신들려 온 몸이 마비된 여인을 고쳐주고 (누가복음 13:11-16), 베데스다 못에서 38년째 병자로 살고 있던 이를 고쳐주고(요5:1-15), 손 마른 자를 고쳐준 사건 (마12:1-14), 이 모두가 안식일에 일어난 일이다.

이런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고, 고통받는 사람이 치료를 받고 병에서 해방 되었는데, 바리새인의 반응은 참으로 이상하다. 이런 기적을 행하는 예수가 자신들이 기다려 온 메시야인지 따져보고 환호하거나, 비참한 삶을 살던 병자가 고통과 질병에서 자유케 된 것을 함께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규칙에 예수가 도전하고, 자신들의 위선과 치부를 드러내는 것에 분노하다 못해, 예수를 죽여버리자고 계획하기 시작한 것이다.

시각장애인이 눈을 뜨자,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고 시각장애인을 쫓아내며 (요9), 귀신들린 여인을 고쳐주자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에 "분 내었다"라고 나오며, 38년된 병자의 치료 이후에는 "예수를 박해 (요5:16)"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손 마른자를 고쳐주자,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거늘(마12)"이라고 나온다.

결국 예수의 도발로 이들은 자신의 참 모습을 드러냈는데, 겉으로는 늘 하나님을 내세우고 부르짖었으나 사실 하나님의 아들을 알아보고 믿지도 않았으며, 이웃의 고통이 해결된 것에 관심도 없었고, 오직 자신들의 종교적 권력과 거기서 오는 경제적 이익에 눈이 멀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 예수는 매우 분노했다.

 

<마가복음2:23-27>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시게 되었다. 제자들이 길을 내면서, 밀 이삭을 자르기 시작하였다.바리새파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어찌하여 이 사람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릴 때에,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를 너희는 읽지 못하였느냐?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다윗이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서, 제사장들 밖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제단 빵을 먹고, 그 일행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

=> 안식일에 밀맡 사이를 지나가면서 배고픈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먹자,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어겼다고 비난한다. 그러자 예수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한다. 즉, 사람을 사랑하고, 이웃을 서로 사랑하라고 하나님이 준 율법인데,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율법주의화 해서, 이제 율법주의가 사람을 억압하고, 사람이 율법주의를 위해 존재하게 되는, 일종의 주객전도 현상, 목적전치현상이 일어난 것을 예수는 질타한 것이다.

 

<마5:23-24>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고 하다가, 네 형제나 자매가 네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나거든,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나 자매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제물을 드려라."

=> 예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외치는 종교인들이 목숨처럼 중요하게 여기는 예배행위, 거룩한 하나님과 만나는 그 시간 가운데라도, 형제나 자매가 나에게 원한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즉 그들에게 내가 뭔가 잘못했고, 관계가 어그러져 있는 것이 생각난다면, 예배를 중지하고 가서 화해하고 돌아와 다시 예배를 드리라고 말씀한다. 예배를 강조하던 당시에 이 말씀이 얼마나 파격이었을 지 상상할 수 있다. 이웃과의 관계가 파괴된 자, 이웃에게 악을 행하고 폐를 끼치는 이가, 거룩한 척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은 받지 않으신다는 말이며, 보이는 이웃과의 어그러진 관계를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예배행위로 보상할 수 없고, 이웃사랑이 없이 종교적 열심만 있는 것은 참된 신앙이 아니라는 뜻이다.

자, 눈치있는 분들은 이미 이미 아시겠지만, 이런 구약과 신약의 말씀을 생각해 볼 때, 오늘 일부 보수 교회들이 보이는 모습이 과연 성경적이라 할 수 있는가?

 

금년 1월 20일 첫 코로나 확진자가 발생하고 2월 18일 신천지 대구교회발 확산이 일어난 후 3월 8일 신규 확진자 최고 367명이 발생하는 등 국가적 위기를 맞았다. 이후 질병관리 본부, 의료인들, 자원봉사자들, 그리고 방역에 참여한 모든 국민들의 피나는 노력으로 3월15일 확진자 두자리 수로 감소(76명), 5월 6일 신규 확진자 최저 기록(2)으로, 해외 언론이 한국의 방역에 주목하며 찬사를 받았고, 코로나를 이렇게 통제한 예를 보기 힘들 정도였다. OECD 국가들의 경제전망에서도 우리 나라가 최고의 성적을 보였다. 촛불 집회 이전까지 지난 몇년간 OECD에서 대한민국이 1위를 한 항목들은 자살률을 비롯한 온갖 부끄러운 모습이었던 것을 기억하는가?

 

일부 교회들은 이런 성과를 인정하고 국가적 노력에 동참하기 보다, 대면 예배를 고집했고, 특히 문재인 공산주의자, 탄핵을 운운하며 대정부 투쟁에 나선 이들이 유독 기독교에 많았다. 특히 극우의 핵심에 있는 전광훈의 사랑제일교회에서는 환자들이 많이 나오기 시작했고, 전국적인 우려에도 광화문에서 대형 집회를 추진해서, 8월 19일 확진자 수가 297명으로 폭증했고 이후 300명대를 유지하게 되었다. 심지어 전광훈 교회 부목사는 신도들에게 의심증상이 나타나도 8/15 태극기 집회에 참가하고 검사를 받으라 했고, 보건소가 아닌 일반병원을 가라고 통화한 녹취록이 확인 되었으며, 태극기 집회에서는 정부가 확진자가 생겨도 동선추적을 못하도록 핸드폰을 끄고 신용카드 사용을 금지한다고 연락을 돌리기도 했다. 야외에서는 코로나에 걸리지 않으며, 신앙에 의한 치료 운운했던 전광훈 본인과 태극기 집회 참여를 주도한 주옥순, 차명진, 극우 유튜버 등이 줄줄이 확진을 받았고, 전광훈 교회 발 확진자만 천명에 육박하고 있다. 일부 집회 참가자들과 교회들은 검사거부, 집회 참가 여부 및 동선 확인 거부, 명단제출 거부 등 방역당국에 협조 조차 거부해, 코로나 대응에 어려움을 주고 있다.

 

극우적인 정치관에 사로잡힌 목사와 신도들이 온 국민이 노력해 온 방역을 무너뜨리고, 불안과 공포를 확산시키고 있으며, 이로 인해 방역이 2단계로 격상되고, 3단계까지 고려하고 있는 이 상황을 보면, 신천지에 이어, 극우 기독교가 심각한 국가적 민폐를 끼치고, 코로나의 진원지가 되었다는 것을 부인하기 힘들다. 의식있는 신앙인들은 깊이 자성하고, 사회적 노력에 동참해야 할 순간이다.

 

예수는 안식일에도 사람들을 치유하고 살리는 일에 매진했으나,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율법주의가 깨진것에 분개하며 예수를 비난했다. 굳이 오늘에 적용하면 예수의 모습처럼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희생적 실천을 보이는 것은 누구인가? 그것은 교회가 아니라, 문재인 대통령과 정은경 본부장을 필두로 한 질병관리 본부, 의료인들, 자원봉사자들 등등이다. 얼굴이 짓물러 가면서, 땀을 바가지로 흘려가면서, 심지어 자신이 코로나에 감염되어 가면서까지 사람을 살리는 모습에 국민들은 감동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국가적 노력에 참여하기는 커녕, 기독교는 근거없는 문재인 공산주의, 문재인 탄핵을 외치는 극우 목사와 맹목적으로 그를 따르는 신도들을 배출해 코로나 재확산의 문을 열었고, 이에 대한 자성과 코로나 방역 노력에 적극 참여하기 보다, 종교탄압 운운하며 대면예배를 고집하고, 오히려 정부정책과 질병관리본부를 비판하고 있다.

결국 이러한 교회들은 이웃을 사랑하고 사람을 살리는 예수의 모습이 아닌, 율법주의에 집착해 화를 내고 있는 바리새인의 모습이 아닌가? 지금이 대면예배라는 외적인 형식에 집착할 때인가, 아니면 예배 중간에라도 나와서, 교회와 우리 사회의 이웃과의 어그러진 관계를 회복하고, 사람을 살리는데 동참할 때인가?

 

이런 교회들은 자신들은 신앙적이기 때문에 사회적 비난을 감수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절대 그렇지 않다.

당신들은 성경적 신앙적 원칙을 율법주의로 오해하고, 예수의 길이 아닌 바리새인의 길을 따라가고 있기에, 비난 받는 것이다.

예배를 전면 금지하는 것도 아니고, 대면예배를 금지하는 것이다. 즉 온라인예배 등 비대면 예배나, 가정예배, 개인 예배 등, 여러가지 다른 방식으로 예배를 드릴 수도 있는데, 국가적으로 거리두기 3단계로 넘어가느냐 마느냐를 고심하는 이 코로나 폭증의 순간에까지 왜 굳이 대면예배를 고집하는 것일까?

 

여기에는 율법주의 외에 몇가지 중요한 이유가 더 있다.

웬만한 이들은 다 알고 있지만, 신앙의 본질 보다도, 헌금과 교회 재정의 문제, 무조건 신자들을 교회로 끌어와서 신앙을 유지시켜 온 이원론적 신앙양식의 문제, 그리고 보수정치이념이 교회를 지배하고 있는 문제 등등이다.

이런 진짜 이유를 신앙으로 포장하고 있기 때문에, 일부 몰지각한 교회들은 더 큰 세상의 비난과 하나님의 심판에 직면할 수 밖에 없다.

글이 길어져서 이 부분은 시간될 때 더 이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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